올림픽과 평화를 구축하려던 오랜 노력들...
올림픽과 평화를 구축하려던 오랜 노력들...
  • 박흥식
  • 승인 2018.02.11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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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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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의 가장 오랜, 그리고 전통적인 주제는 전쟁이었다. 인간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그토록 부조리하고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는 일을 벌였는지 그 원인을 찾고 다시는 그러한 잘못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교훈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점차로 사람들은 왜 자신의 편/조상/민족/국가... 등이 전쟁에서 패했으며, 어떻게 하면 전쟁을 이길 수 있을지 고심하게 되었다. 그것이 인간들의 부조리한 본성이다.

전쟁을 막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갈등을 부추겨 전쟁 국면으로 치닫기는 쉽다. 사람들은 진정 평화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통해서라도 내 개인/민족/국가의 이익이 극대화되는 길을 찾았다. 역사학에서는 한 세대 전부터 소위 '역사적 평화연구'라는 새로운 움직임이 있다. 그 연장선에서 여러 해 전(2012)에 평화를 주제로 한 학술대회를 기획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이런저런 책들을 참조해 '서양 고중세 시대의 평화 이념과 실제'라는 글을 발표했다. 조금 길게 그 글을 옮겨본다.

 

"평화를 희구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이 암흑시대가 끝나기까지 어떤 결실을 거두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비로소 기원전 8세기에야 평화를 구축하려는 최초의 성과가 확인되는데 고대 올림픽의 시작이 그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기원전 9세기 말 엘리스의 왕 이피토스(Iphitos)가 신탁을 듣기 위해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 신전을 방문하여 동포들 사이의 적대적 상황을 종식시키는 방안을 물었다. 여사제는 지역의 통치자들이 모여 특별한 휴전을 체결하라고 조언했으며, 이피토스는 그 신탁에 따라 대담한 시도를 주도했다. 결국 그리스인들은 4년 주기로 모든 싸움을 그치고 신들, 특히 제우스를 위한 제사를 올림피아에서 드리고 더불어 운동경기를 개최했다. 그리스 민족을 결집시키는 장이었던 이 제전에 모든 그리스인들이 안전하게 참가하고 이동할 수 있도록 제전과 경기가 열리는 기간을 전후로 각각 12일씩 휴전이 성립되었다. 그 결과로 기원전 776년 올림피아에서 첫 번째 올림픽 경기가 개최된 것이다. 또 다른 설명에 따르면 까마득한 옛날부터 올림피아에서 제전을 거행했는데 전쟁 때문에 중단되었다 한다. 제사를 중단했더니 늘 전쟁과 불행이 반복되어 그리스인들이 올림픽 제전을 다시 열기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올림픽에는 평화의 회복과 풍요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염원이 담겨있었다.

이처럼 암흑시대가 끝나가던 기원전 8세기에 그리스에는 혼란을 극복하려는 여러 움직임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올림픽은 인간사의 불행을 막기 위해 그리스 전역에서 전쟁을 한시적으로 중단하고 제우스 신을 섬기는 행사로 추진된 것이었다. 이 올림픽 휴전' 즉 에케케이리아(ἐκεχειρία)는 문자적으로 손을 잡는다는 의미이며,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누던 자들이 그것을 내려 놓고 손을 맞잡는 휴전을 뜻하게 되었다. 전쟁의 중단은 사실 신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으며, 제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모든 방문자들이 안전하게 올림피아에 올 수 있도록 그리스 전역에 에케케이리아즉 성휴전을 선포하여 배려해야만 했다.

폴리스마다 달력이 달라 매번 휴전기간과 올림픽의 일정을 고지하는 자들이 필요했는데, 그들은 말 그대로 평화의 사신이었다. 올림픽이 개최되던 엘리스 지방은 성역화 되었으며 무장한 자들은 출입할 수 없었다. 그리스 세계 전체에 휴전이 선포되고 또 그것이 관철될 수 있었던 것은 올림픽제전이 처음이었다. 초기에는 엘리스와 이웃한 나라들만 참여했기에 지역적 성격을 가졌고 경기도 하루 정도 소요되었기에 약 한 달 정도의 휴전이면 충분했지만, 7세기 중엽에는 이 제전이 이미 그리스 전체에서 상당한 중요성을 얻게 되었으며 참여규모가 확대되었다. 한 달간에 걸쳐 예비훈련을 하도록 규정한 기원전 5세기에는 휴전기간도 세 달로 늘어났다. 이 기간에는 전쟁만 중단된 것이 아니라, 재판이나 처형도 허용되지 않았다. 기원전 420년 제 90회 올림픽이 열릴 때까지 성휴전을 어긴 사례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해에 스파르타가 군대를 동원해 엘리스의 한 요새를 공격했는데, 나중에 스파르타는 그 일이 성휴전을 알리는 사신이 자기 나라에 도착하기 전에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했다. 스파르타의 행위는 성역을 침범한 일이므로 성휴전 위반으로 판결이 나서 그 해에 경기의 참가가 금지되었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기원전 5세기에도 그리스 전역에 걸쳐 성휴전이 관철되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결국 올림픽으로 인해 4년 간격으로 한시적인 평화가 유지되었으며, 이 전통이 기원후 4세기까지 약 천 년간 지속되었다. 하지만 4년마다 3개월에 걸쳐 이루어지는 휴전으로는 그리스 나아가 지중해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던 수많은 다툼과 폭력행위를 불식시키기에 역부족이었다."

(...중략 ...)

"이 글에서는 서양의 고대와 중세에 걸쳐 평화를 구축하려던 대표적 사례들을 검토했다. 각기 상이한 주체들이 평화를 추구했기에 역사적 맥락뿐 아니라, 평화의 성격에서도 큰 차이를 보였으나 고대와 중세를 관통하여 평화에 대한 열망이 다양한 평화체제 구축의 시도로 이어졌다. 평화가 뿌리내릴만한 기반이 미약했기에 제한적인 휴전이나 폭력의 제한 이상의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으며, 평화는 예외적 조건에서 한시적으로 구현되었을 뿐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주축으로 동맹체제가 형성되었지만, 헤게모니를 노리던 두 맹주 사이의 대결구도와 동맹회원국들의 다양한 이해관계 조정의 어려움은 늘 불안요소였다. 정복과 승리가 최종적인 목표였기에 동맹을 형성해 평화를 이어갈 토대는 본질적으로 빈약했으며 변화하는 이해관계 때문에 평화는 늘 잠정적이었다. 동맹이 영원하다거나 계속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동맹체제를 이용해 성공한 로마는 대제국을 이룩하는데 성공했으며, 한동안 제국을 위협할 적이 없었다. 그렇게 구축된 로마의 평화는 힘의 우위에 의한 강압을 인정하는 체제였기에 내부에 안전한 질서를 확보하는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았다. 외부세계에 대해서 무력으로 방어하는 것이 불필요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전쟁과 군대가 필요 없는 평화로운 세상은 요원했다.

중세 성기까지는 고대의 사례처럼 국가가 주도하여 평화를 추진할 수 없었다. 미약한 왕권으로 인해 사실상 질서가 평화와 동일시 되었고, ‘하느님의 평화는 성직자 및 속인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아래로부터의 요청이었다. 종교기관들은 평화운동을 거치며 차츰 세속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으며, 폭력을 순화시키는 성과도 거두었다. 그렇지만 평화운동의 성과는 실제적으로 폭력을 제한하는데 성공한 점에 있다기보다 폭력을 종교적으로 길들인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운동은 봉건적 지배세력에 대항하기보다는 공권력의 부재로 인한 혼란상태를 벗어나려는 목표를 지향했으며, 지나친 폭력을 자제시키는 차원에 머물렀다.

교황과 세속권력을 대표하는 각국의 국왕들은 평화운동의 에너지를 이용했다. 특히 교황은 하느님의 평화 및 휴전을 발판 삼아 십자군원정을 주창하여 폭력을 유럽 외부로 분출할 계기를 마련했다. 이 원정을 주도한 덕택에 교황은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 세속적인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유럽 내부와 달리 외부세계 특히 이슬람세계에 속하였던 근동지역은 폭력이 난무하는 항구적인 분쟁지역으로 변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국왕은 이 평화운동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중앙집권적 권력을 강화해 나갈 수 있었지만, 서임권투쟁으로 교황과 세속제후들이 이반현상을 보인 독일에서는 평화운동이 국가권력을 강화하고 민중들에게 직접 영향력을 미칠 기회였다. 이처럼 영방평화령은 국왕이 폭력을 독점하는 것을 지향했지만 독일에서는 결국 제국이 아니라, 영방권력을 강화시키고 분권화를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기독교 사상가들은 로마제국 말기부터 평화에 대한 구상들을 제시해 왔으며 중세를 거치며 여러 갈래로 발전시켰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완전한 정의에 의한 참된 평화를 희망했지만, 현세에서는 잠정적인 평화를 이루기 위해 불가피한 폭력도 용인했다. 로마시대와 중세를 통해 이 땅에 구현하려던 평화는 한정된 공간과 시간에 제한된 닫힌 평화의 성격이 두드러졌다. 평화가 통용되는 특정 공간 밖에는 평화가 아닌 폭력이 일상을 지배했다. 국가가 법을 토대로 개인 혹은 시민의 평화를 보장하는 소위 시민평화공공의 안녕및 공공선’(bonum commune)이라는 개념도 등장했지만 보편적으로 구현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는 이르지 못했다.‘

하느님의 평화(Pax Dei)’로마의 평화(Pax Romana)’ 등에서 ‘Pax’평화로 번역되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상이한 의미를 담고 있었듯이 고대와 중세에 평화로 표현되는 다양한 용어들은 실제로는 상이한 맥락과 용도로 사용되던 이념들이었다. ‘영방평화령이나 카롤링시대에 등장하는 평화는 심지어 군주의 평화를 의미하기도 했다. ‘평화라고 칭한다고 다 같은 평화였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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