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살의 피해자 유대인들이 새로운 억압자로?
대학살의 피해자 유대인들이 새로운 억압자로?
  • 정한욱
  • 승인 2018.02.09 02: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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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선, 베들레헴은 지금, 홍성사, 2014년
양기선, 베들레헴은 지금, 홍성사, 2014년
양기선, 베들레헴은 지금, 홍성사, 2014년

베들레헴은, 지금은 팔레스타인의 비극에 대해 별 관심이 없던 한 평범한 한국의 크리스천 대학생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현장에 위치한 베들레헴 대학교에서 2013년 가을학기 동안 교환학생으로 공부하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기록한 책이다. 저자는 자신이 만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살폭탄 공격에 열중하는 미친사람들이 아니라 평화롭게 자신의 땅을 가꾸기를 갈망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며,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통치 아래 있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의 군사점령하에도 놓여 기본적인 자유마저 제약당하던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함께 베들레헴에서 지냈던 경험이 자신의 무지와 편견을 부수고 시야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군사력과 폭력으로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결코 지속가능한 평화를 이룰 수 없으며, 더 늦기 전에 양측 모두가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한 후 땅을 공유하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의 생각 중 중요한 부분을 요약하고 몇 가지 개인적인 단상을 덧붙여 보기로 한다.

분리장벽과 유대인 정착촌 국제법상 불법이라는 유엔 결의와 국제사법 재판소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테러방지를 명목으로 이스라엘에 의해 일방적으로 세워진 거대한 분리장벽은, 실제로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정치적 전략이자 철저하게 이스라엘에 종속된 팔레스타인의 경제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마저도 중단하라는 압력을 넣고 있는 팔레스타인 영토 내의 불법적 유대인 정착촌 역시 미래에 국경을 최종적으로 확정할 때를 대비한 사람을 이용한 국가 차원의 땅 따먹기 전략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정착촌 사업을 통해 역사적인 팔레스타인 영토를 조금 더 얻는 댓가로 순수 유대 국가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했으며, 이는 향후 이스라엘에게 재앙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저항과 난민들 점령의 현실과 해방에의 열망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는 강력한 접착제이며, ‘살아 있기 위해저항하는 현지인들의 일상인 시위는 반복되는 폭력의 악순환을 만들어 낸다. 이스라엘의 강압적인 점령작전은 강제로 고향에서 쫓겨나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에 정착했거나 여러 아랍 국가에서 국적 없이 떠도는 사람들을 포함해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수많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양산했으며, 이스라엘은 유엔에 가입하는 조건으로 난민의 귀환 및 보상권과 토착민의 추방을 금지한 유엔 결의안을 받아들였지만 지금까지도 이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 그 결과 현재 이스라엘에서 난민 문제는 직면하고 싶지 않은 두렵고 금기시되는 주제이며 대중도 학계도 매체도 거의 다루지 않는다.

시오니즘은 성경적인가? 저자는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이스라엘의 회복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기독교 시오니스트들의 논증에 귀가 솔깃하다가도, 베들레헴에 돌아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볼 때마다 회의가 들었다고 말한다. 과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문제도 하나님의 계획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부수적 피해이며, 매주 마주치는 베들레헴 사람들의 서러운 이야기도 하나님의 예언 성취를 위한 불가피한 희생으로 치부하고 눈감을 수 있다는 것인가? 저자는 먼 한국 땅에서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그럴 수 있었겠지만, 이곳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 후로는 더 이상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예언서의 몇 장을 집어내 오늘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자행되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건 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인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는 일이며, 무엇보다도 예수가 이 땅에 내려온 의미를 퇴색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평화의 길 군사력과 폭력으로는 절대 완전한 평화를 이룰 수 없다. 상상할 수 없는 힘의 불균형 앞에서 약자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무작정 이스라엘을 용서하라고 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 오늘날의 비참한 상황에 이르게 된 데에는 이스라엘의 책임이 훨씬 막중하지만, 19세기부터 이어지는 큰 그림을 보자면 두 민족은 서로에게 잘못을 저질러 왔으며 어느 쪽도 일방적으로 의로운 희생자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증오와 폭력의 악순환을 끊으려면, 두 민족이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한 후 땅을 공유하는 것 외에는 궁극적인 해결책이 없다. 이스라엘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아랍인 모두의 이야기를 듣고 이 민족들이 처한 상황에 공감하는 것이야말로 평화와 대화로 가는 첫 걸음이며, 한쪽의 목소리만 듣고 다른 쪽을 악마화하면 사태는 더욱 악화될 뿐이다. 의로운 분노만으로는 절대 평화를 이룰 수 없으며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 모두 하나님이 사랑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용서와 화해? 저자는 용서와 화해야말로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그 방법 외에는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끝없는 폭력의 연쇄를 끊을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런데 내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입장이 된다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어느 날 나타난 외지인들에 의해 내가 살던 땅에서 영문도 모른 채 쫓겨나 다시는 돌아갈 수조차 없고, 내 부모와 형제와 자녀 중 누군가가 그들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한때 내 나라였던 땅에서 자유롭게 이동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철저하게 그들에게 종속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그런 경우에도 내가 그렇게 용서와 화해를 쉽게 입에 담을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차가운 교리에 근거해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의 입장을 부각시키며 팔레스타인 땅에서 자행되는 비극이 성경의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한 부수적 피해에 불과하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일부 복음주의자들이 정확히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입장에 처한다면 그들은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내 장담하건데 그자들은 어떠한 주저함도 없이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억압받던 히브리 노예들과 동일시할 것이다. 만약 그 잘나신 복음주의자들이 믿는 하나님이 딱 그 정도 수준의 부족신이라면, 나는 그런 혐오스러운 복음주의자들의 무리에 끼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20세기의 사건들과 현대신학에 나오는 로즈매리 래드포드 류터의 글 유대인 대학살 -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고찰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대학살 이후의 신학은 해방과 구원을 일방적으로만 이야기하는 모든 신학의 어두운 부분을 비판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질문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해방으로 인해 누가 피해를 당할 것인가? 우리의 구원으로 인해 누가 노예가 되는가? 피해자와 가해자를 넘어 연대하는 신학은 구원론의 어두운 측면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 민족의 메시야가 다른 민족을 저주함으로서만 승리할 수 있고, 우리의 약속의 땅이, 그것이 고대 가나안 사람이든, 현재의 팔레스타인 사람이든, 아프리카 원주민이든 간에, 다른 누군가를 몰아냄으로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새로운 죄악, 새로운 대학살의 씨앗이 뿌려진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대학살의 피해자였던 유대인들이 새로운 억압자로 등극하고, 유대인들을 핍박하고 학살했던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 유대인들이 자행하는 억압과 살해의 옹호자가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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