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위에 하늘을 짓고 사는 이
땅위에 하늘을 짓고 사는 이
  • 엄경희
  • 승인 2018.02.01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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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옥, 땅 위에 하늘을 짓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실천적 영성, CLC, 2017년
김대옥, 땅 위에 하늘을 짓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실천적 영성, CLC, 2017년

작년에 한국에 가서 알던 후배 가정을 만나 교제할 때였다. 제사를 지내는 시댁이 기독교 신앙을 가진 후배 가정에게 계속 절을 강요하면서 오랜 시간 시댁과 발길을 끊고 이민을 고민할 만큼 갈등이 깊어져 있었다.

그냥 절을 하면 안 되나? 중심에만 문제가 없다면 제사 때 절을 해서는 안된다는 형식보다 시부모님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무게있게 던진 말도 아니었다. 후배 가정의 상황을 내 어찌 다 헤아리고 그런 말을 강요할 수 있겠는가? 내 말을 너무 마음에 두지 말라고 했다. 나는 종교 형식보다 시부모님 사랑하는 것이 진리에 더 가까운 중요한 문제라 생각한다고 조심스레 덧붙였을 뿐이다.

사우디에 가기 전부터 알고 있던 후배 가정의 문제에 이런 대안을 불쑥 내밀다니 후배보다 내가 더 놀랐던 것 같다. 사우디에 가기 전까지는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이 기독교인으로서의 신앙을 지키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했다. 시댁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감수하는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고난이고 말이다하지만 사우디에 살면서 내 안에 많은 생각의 변화가 있었나 보다. 나는 제사 때 절을 하지 않는 것보다 시댁 어른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이 더 먼저라는, 다시 말해 진리의 핵심에 가깝다는 생각에 여전히 흔들림이 없다.

이슬람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실생활 전반에 강력하게 깔려 있는 나라에 살고부터 나와 우리 가정은 종교, 즉 기본 신념과 세계관이 다른 이들과 어떻게 이웃으로 또 친구로 살아야 하나 하는 실존적 고민의 답을 찾아야 했다첫 발걸음은 이 생소하고 낯선, 한 마디로 아는 게 전무한 상대를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나와 다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으로 틀린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단은 무엇인지 알아보기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보다 더 진리에 가까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내가 믿는 기독교와 전혀 다른 세상인 줄 알았던 이슬람은 알면 알수록 기독교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참 복잡미묘한, 얽히고설킨 관계에 있었다. 구약 성경을 토대로 하고 있는 종교니 더 말해 무엇하랴. 하나님, 천지창조, 아담, 노아, 아브라함, 다윗 등 우리가 아는 성경이야기를 공유한다. 물론 살짝 다른 버전으로 말이다기독교의 핵심인 예수님도 선지자로 인정한다. 동정녀 탄생이나 기적, 심지어 승천과 재림도 믿는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예수님의 신성,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 부활은 강력히 반대한다.

김대옥, 이슬람의 성경 변질론, CLC, 2013년
김대옥, 이슬람의 성경 변질론, CLC, 2013년

이슬람을 알아가기로 마음먹었을 때 나름 세운 기준이 있었다. ‘사랑이었다. ‘사랑하는 쪽이 진리다. ‘포용할 수 있는 쪽이 더 넓은 종교다.’ 나는 그것을 가늠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기독교와 이렇게 미묘하고 복잡한 관계에 있는 종교인 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이슬람을 알아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혼란을 넘어 고통이요 공포였다. 호기롭게 자신했던 내 안에 사랑과 포용이 대세를 이루기는커녕 이슬람을 알아갈 수록 혐오와 배제의 넘쳐 오르는 쓴 물에 언제나 꼴깍 넘어가기 일쑤였다.

상대에 대해 무지하고 자신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우리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배제하고 혐오하는 경향이 있다.'  작년 이맘때쯤 이슬람과 기독교의 차이에 대한 긴 토론이 페이스북에서 이루어졌을 때 김대옥 교수님이 하신 말씀을 나는 정확히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리는 세상에 하나 뿐인 절대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 진리와 다른 것을 말하는 또 다른 진리는 존재만으로 위협이다. 굳이 일부러 상대를 틀렸다고 공격하지 않아도 다른 무언가를 진리로 내세우고 있다는 자체만으로 내 진리를 뒤흔든다. 내 안의 진리가 연약할수록 그 위협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삼위일체가 아닌 오직 한 분뿐인 신이다’, ‘예수님은 선지자일 뿐 구세주는 아니다’, ‘성경은 오랜 세월을 지나며 변질되었다’.... 등등 무슬림들이 그저 자신의 신앙 고백으로 내던지는 말들은 그 자체로 내가 가진 기독교 신앙을 공격하고 뒤흔들고 훼손했다. 그렇기에 상대가 틀렸고 내가 옳다는 싸움은 불가피해진다. 일종의 정당방어적 공격이랄까이런 평행선 사이의 간격은 자연스레 편견과 혐오, 그리고 배제로 채워진다. 아예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고 말이다. 상대의 자리에 온전히 서봐야 진정한 이해에 이를 수 있는데 자신의 진리에 가해지는 위협을 무릅쓰고 거기까지 가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잘 모르기에 무지와 편견을 피할 수 없고 무지와 편견은 혐오와 배제를 낳는다.

감사하게도 그간 이슬람뿐만 아니라 내 신앙에 대한 이해도 많이 커졌다. 이때 큰 가르침을 주신 분이 김대옥 교수님이시다. 이슬람 국가에서 선교사로 사셨던 교수님은 꽤 오랜 동안 이슬람과 기독교에 대해 학문적으로 체계적인 연구를 깊고 견고하게 해오셨다. 무슬림 친구들의 기독교에 대한 여러 공격이나 차이점에 대해 정말 너무나 풍부하고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시해 주셨다. 그 덕분에 교수님에게 있는 여유와 평안을 조금이나마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제 예전만큼 나와 다른 이슬람 신앙이 어렵지 않다. 예전처럼 내 신앙의 위협으로 느끼지 않는다. 상대에 대한 이해도, 그에 상응하는 내 신앙에 대한 이해도 그간 제법 자랐기 때문이다.

김대옥 교수님의 말씀처럼 나와 다른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내 신앙은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더 견고해지는 게이런 것일 수 있겠구나 걸음마는 뗀 기분이다. 하지만 나의 고민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나와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과 어떻게 이웃으로 친구로 살아야 하는가? 이슬람 한복판에 삶의 터전을 이루고 있는 나와 우리 가정에게 이것은 실존적 생존적 질문이자 고민이었다.

이슬람 신학을 하는 한 무슬림 친구와의 꽤 오랜 페북 토론을 지켜보며 알게 된 바는 김대옥 교수님에게는 이슬람을 공격할만한 어마어마한 무기가 참 많으셨지만 상대를 넘어뜨리려고 그 무기를 결코 함부로 휘두르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상대를 존중하고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충분히 쓰실 수 있는 여러 무기들을 일부러 거두고 자제하셨다. 토론이 끝나고 교수님의 저서 이슬람의 성경 변질론을 읽으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슬람을 반박할 수 있는 이렇게 풍부하고 견고한 논리와 근거를 가지고 계시면서 그것을 십분 사용하지 않으신, 상대를 존중하고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시려 했던 마음이 읽어져 큰 감동이 있었다.

김대옥 교수님은 이슬람과 기독교의 첨예한 차이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만 이슬람이 틀리고 기독교가 옳다는 사실을 입증하기보다 두 종교 간의 이해와 평화,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데 중점을 두고 계셨다. 이슬람 한복판에서 무슬림들과 더불어 사는 우리 가정이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나 이보다 명확하고 흡족한 방향은 없었다.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차이점보다 공통점에 강조점을 두고 그들이 틀렸다고 단정하고 공격하고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대화하고 서로 공통으로 추구하는 바 참된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길에 이를 수 있는 길을 함께 모색하는 것, 정말 마음에 드는 그림이었다. 상대가 옳고 내 것이 틀렸다고 말하라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는 진리가 전부가 아님을 겸손히 인정하고 더 온전한 진리에 이르도록 내 세계의 문을 닫지 않고 열어 두는 것이다. 그렇게 상대와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다.

아직은 그 시도가 미약하지만 나와 다른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가 아는 진리의 틀에 자물쇠를 걸어두지 않는 태도는 나도 모르는 새 내 안에 많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 종교적 형식보다 무엇이 진리의 핵심이요 본질인가 더 보게 되었다. 이슬람과 한국 교회 모두에 자리 잡고 있는, 억압적 기능으로 변질된 종교적 틀이 이전보다 더 명확히 눈에 들어왔고 말이다. 한 마디로 종교진리를 구분하게 되었다. 후배 가정에게 제사 때 절을 하면 어떠냐는 불경한(?) 말은 어쩌다 내뱉은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성경 반입이나 자유로운 종교 활동, 즉 타종교 포교를 금지하고 철학 등 인문학이나 화학, 물리학 같은 순수 과학도 종교적 이유로 가르치기를 꺼리는 등 비판적 사고를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이슬람 사회의 폐쇄성이 이슬람 교리 자체보다도 나는 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게는 이슬람이 진리로서 당당함이 없기 때문에 취하는 비겁한 봉쇄로 여겨진다. 내가 세운 바 더 사랑하고 포용하는 진리와 거리가 한참 멀게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배제와 혐오가 아닌 사랑과 포용을 강조하시는 김대옥 교수님의 신앙 색깔이 기독교 대학의 가르침과 반한다는 이유로 교수직에서 잘라내는 한국 기독교의 행태 역시 사랑과 포용이 아닌 비겁한 움츠러듦과 배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내가 믿는 기독교도 진리가 아닌 것일까? 아니면 한국 교회가 진리인 기독교에서 멀어진 것일까? 다른 종교를, 성소수자와 같이 자기와 다른 이들을 넉넉히 포용하고 사랑해도 흔들리거나 변질되지 않는 견고하고 넓은 진리가 아니라 조금만 다른 것이 들어와도 이내 색을 잃고 붕괴되는 겁쟁이 약골 종교인가?

이슬람도 아니요 한국의 기독교도 아닌 다른 진리가 존재하는 것인가? 사막에서 물리적 고립감도 쉽지 않은데 멀리서 한국 교회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영적으로도 못지 않은 외로움과 낯섬에 휩싸여 있는 기분이다. 교수님의 처하신 상황이 남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다. 한국 교회가 이슬람 등 기독교와 다른 이들을 이런 식으로 배제하고 혐오한다면 나는 도대체 어디에 기대어 무슬림의 땅에서 이들과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될 힘을 얻을 수 있을까?

김대옥, 구약성서와 꾸란의 대화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대화와 화해를 위한 경전 읽기, 예영커뮤니케이션, 2017년
김대옥, 구약성서와 꾸란의 대화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대화와 화해를 위한 경전 읽기, 예영커뮤니케이션, 2017년

교회는 세상 한복판에서 끊임없이 세상과 접촉해야 하지 않는가? 교회를 두르고 있는 담은 세상과의 접촉을 막는 단절의 벽이 아니라 김대옥 교수님처럼 을 모두 잘 알아 어떻게 담을 오갈 수 있는지 알려줄 수 있는 분들로 이루어진 소통의 담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안에 있는 연약한 자들이 보호를 받으면서 외부와 자연스럽고 활발하게 소통이 일어나도록 해 주는, 단단하고 죽은 담이 아니라 견고하되 살아있는 인격의 담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믿을만한 살아있는 스승으로서의 담, 나로서는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 든든히 서 있는 담과 같은 분이 한국 교회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게 참으로 안타깝고 통탄스럽다. 외부인이 들어올 수 없고 내부인이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교회 담이 더없이 우려스러운 이유다. 그것이 기독교를 내세운 기독교 대학의 경우여서 더 암울하다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사태를 바라보며 무엇이 진리인가 더 명확해지는 것 같다. 내가 이슬람 사회에 살면서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더 날카로워지고 선명해지는 이유와 통하는지 모르겠다.

작년 이른 봄까지 이슬람과 기독교 간에 열띤 토론 이후 김대옥 교수님의 저서 성경과 꾸란의 대화와 더불어 이 땅 위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로서의 복음의 의미를 펼쳐내고 있는 교수님의 설교집 땅 위에 하늘을 짓다라는 또 다른 저서를 대하는 내 마음이 더 묵직해지는 이유다어떤 논리나 종교적 형식도 사랑포용보다 앞설 수 없다고 생각한다. 죄인인 인간이 구원에 이른 첫 근거가 바로 사랑과 포용이었기 때문이다. 진리 밖에 있던 인간이 진리 안으로 들어오는 관문이 바로 사랑과 포용이기 때문이다. 제사 때 절을 하는 것이 시부모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앞설 수 없는 이유다. 사랑으로 절을 하면 절을 하면서 제사상이 쪼개지는 영적 힘이 더해지지 않을까? 라고 말하면 내가 너무 이상주의자인가?

다음은 김대옥 교수님의 책에서 가져온 글이다. 이 글을 읽으며 김대옥 교수님은 참으로 말씀하시는 대로, 가르치시는 대로 살고 계시구나 하는 확신에 내 마음이 한없이 겸허해졌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복음을 살기 위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느 때보다 시달린 요즘이었다.

끝으로, 필자는 그동안 성경을 읽어오면서 그것이 근본적으로 위험한책임을 발견해 왔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독자 개인의 존재를 변화시키며, 나아가 독자가 속한 질서를 전복시키는 특성과 역동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주목하여, 독자들을 그의 말씀과 선포에로 소환하며, 나아가 그의 행로와 도()를 따르라 촉구합니다. 그는 위험한 현실에 오셔서 위험한 시대를 살다, 위험한 인물로 십자가에 달려 죽은 분입니다. 그의 메시지는 당대의 지배질서에 심각한 위험이 되었으며, 그의 행보는 결국 십자가로 끝장 낼 수밖에 없는 체제위협적인 것이었습니다”  -땅 위에 하늘을 짓다여는 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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