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과 사랑, 악의 평범함과 기만하는 욕망
뜻과 사랑, 악의 평범함과 기만하는 욕망
  • 이진호
  • 승인 2018.01.30 14: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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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양'에서
영화 '밀양'에서

밀린 글이라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집을 나섰다. 카페로 가는 걸음 속 몇 해 전의 일이 생각났다. 벗을 만나 함께 대화하고 나누며 시간을 보내던 그 날, 굉장히 기분 나쁜 말을 들었다. 도시와 시골의 삶의 양식을 비교하고, 청년들의 삶이 나태하다고 말하며, 마치 in서울과 시골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라는 서열이 담긴 말들의 향연을 들었다. 당시 서울에서 생활하던 나는 어느 정도 수긍했지만 그럼에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도시와 시골의 컨텍스트의 다름 정도와 삶의 방향성과 구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답을 몰라 헤매고 있는 청년들의 불안함과 그 나름의 고민들, 해소할 수 없는 상황 속 도피적 행위가 갖는 의미는 싹 무시된 채 말하고 있는 그의 모습 속 분노가 치솟았다.

대충 기억하는 말을 복원하자면 이렇다. 자신이 밖에서 사람들의 생활을 보고 있으니, 너희들이 하고 있는 행동들이 참 무질서하고, 열심이 없고, 경쟁이 없다는 말을 했었다. 뭐 어디에 출장을 갔는데, 오기 힘든 상황에도 주일날 와서 섬김을 했다든지, 시간이 없는데 영어공부를 한다든지, 뭐 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그 좋은 말 이면에 나타내는 '우월주의''억압'적인 강요는 듣기 힘들 정도였다. 기독신앙인으로써 신실함, 성실함은 자연스레 요구되는 삶의 모습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신실함과 성실함이 어느 방향으로, 어떤 식으로, 어떻게 수행되고, 함께 성실함을 채울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보다 어떤 면에선 밖에 있는 사람들이 훨씬 성실하다. 훨씬 더 책임감 있다. 문제는 기독교 신앙 내에서 주체적인 성실과 신실의 방향성과 책임감과 자유를 지닐 수 있는 주체적 자아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관계 맺는 환경과 사람들은 변화무쌍하다. 끊임없이 변화되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본질과 다양함을 역설로 만난다. '삼인행필유아사언'이라 한 것처럼, 각 사람들이 처한 그 모든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만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하심 안에 있다는 고백,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는 방식이며, 신앙고백 아닌가?? 나를 이끌어주신 삶의 결을 살필 때, 하나님이 선하시다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고백이 바로 섭리의 고백 아닌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이끄신다는 고백 속에서 나의 하나님은 선하고 신실하다는 신앙과 함께 그에 따른 우리의 책임과 자유와 주체와 성실과 신실이라는 반응이 요구되지 않는가?

갑자기 묻고 싶었다. 당신에게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이냐고 말이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섭리란 말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다. 물론 삶을 살아감에 있어 요구되는 '성실함''신실함'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삶의 결의 신비를 남에게 요구하는 것은 '억압'이다. 그가 길을 찾을 수 있도록 기다리고, 대화하고, 소통하고,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서울'이라는 도시와 인서울이라는 기존의 권력제도와 대한민국 사회 속에서 '성공'했다는 명예의식이 갖는 이미지의 피상성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어떻게 섭리가 되고, 하나님의 뜻이 되는가? 물론 하나님의 뜻으로 작용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요구하는 것이, 그렇게 강요하는 것이, 그렇게 억압하는 것이 정말 예수가 보였던 그 제자됨의 길인가?

안타까운 것이 그게 '사랑'이라는 말로 둔갑한다는 것이다. 내게 제일 되는 뜻이 무엇이냐? 라고 묻는다면 '사랑'이라 대답한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이것이 내가 갖는 온전한 하나님의 뜻, 지천명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사랑의 본으로 '예수'라는 스승이 있기에 사랑이 무엇인가?를 배워나갈 수 있으며 이는 신앙인으로써 갖는 행운이자 축복이다. 그런데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은 정말 무겁고, 어려운 신비 혹은 기적이라 느낀다. 그렇다. 사랑은 기적이다. 그런데 이 사랑이 너무 피상적으로 쓰인다. 사랑한다는 말로 억압한다. 사랑한다는 말로 꼰대가 된다.(여기서 꼰대는 선한 꼰대가 아닌 악한 꼰대를 지칭한다) 관계 속에 나타나는 사랑이 아닌 온전히 이기적인, 자아충족적인 사랑을 행한다. 그 사랑 끝에 피해자는 언제나 '타인'이다. 사랑이란 말을 수사학적으로 표현할 때는 더 ''한 폭력과 억압과 차별과 서열이 가득하다.

그렇다. 우리가, 교회가, 한국사회가 쓰는 말을 보면 '본질'을 이야기하지만 '본질'은 없다.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사랑'은 없다. 언제나 추상적이고 피상적인 개념으로 둥둥 떠다니기만 한다. 우리는 그 단어 속에 우리의 욕망을 새롭게 정의내려 풀어헤친다. 우리가 갖는 단어들이 실존적이지 못한 것은 너무나도 애석한 현실이다. 그리고 사랑은 언제나 '권위''구조'를 가지며 악을 답습한다. 새로운 방향으로 새롭게 말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이 생각난다. 아이히만이 보였던 그 평범함 속에 싹튼 악을 생각해 보라, 얼마만큼 그 악의 모습이 태연하고 익숙하게 우리를 형성했는지, 우리를 만들었는지, 이 사회 속 내재해있는지 말이다. 이 속에서 자란 인간이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아니 완전한 '본질'을 깨달을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고 본다. 파스칼이 정의 내렸던 인간 즉 '생각하는 갈대'가 갖는 함의가 나는 인간의 유한성과 기적과 악의 평범함을 적절하게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불안함을, 유한함을, 아니 인간임을 알 때, 역설적으로 그 연약함 속에서 기적은 싹튼다. 연약함 속에서 완벽의 선취를 본다. 유한성 속에서 무한의 맛을 느낀다. 역설이지만 역설이 표현하는 그 신비는 알다가도 모를 정도다.

신앙인이 갖는 회개의 기도가 이 면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 인간이 갖는 본질과 형태에 대한 인정, 인간이 갖는 기만의 폭로, 절대적 타자의 이야기와 권위로의 초대, 절대적 타자의 신실함과 사랑을 통한 회복과 순종, 거대담론 속의 삶의 재형성, 인간 본연의 권위 회복과 동시에 유한성과 기만 인식, 절대적 타자를 의존하여 '사랑'의 유한과 무한성, 낙관성과 비관성, 의존과 주체성 등 형성되는 삶의 실존 속 구체적이고 관계적인 행동, 반복되는 회개의 싸이클 속 갱신되는 인간과 몸의 형성 등등 신앙인의 기도가 얼마만큼 풍부하게 '하나님의 뜻'을 내재화시키는지, 체화시키는 지, 그 기도가 얼마나 '성서적이고 관계적이며, 실존적인지' 그 신비가 우리를 놀랍게 만드는 지 기도가 갖는 대화의 신비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무엇이라 했을까? 아니 교단은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과연 교단이 보편적 교회를 충실히 형성하고, 구성하게 될 것이라는 인식이 있긴 할까? 사도신조 속 거룩한 공교회라는 의미가 갖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해 이해는 하고 있을까? 아니 기도하며 형성되는 놀라운 삶의 재구성이 있을까? 아니 그토록 강조하는 복음 아니 더 좁게 칭의라는 개념이 교회 속 어떻게 삶을 재구성하고, 사회를 만들고, 교회를 만드는 것은 알까?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그토록 강조하는 칭의가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려고 하는 것임을, 칭의의 본뜻은 저기 버려두었음을,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이 그 의롭다함을 나타내는 것이 세상의 가치와 기준과 신념이었음을, 하나님의 뜻이 대기업과 다를 바 없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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