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서 글쓰기까지의 여정
마음에서 글쓰기까지의 여정
  • 박동식
  • 승인 2017.11.05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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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서 글쓰기까지의 여정, 한 번 떠나 보고 싶지 않은가.
영화 '그날의 분위기'(2016년) 포스터
영화 '그날의 분위기'(2016년) 포스터

문을 열어야 하는데 열쇠가 두 개다. 한 번에 해결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지만 하나를 선택하면서도 이걸 거야라는 확신이 없다. 아니 이건 아닐 거야라는 회의적 믿음 아닌 믿음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결국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에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 하나로 열어 보는데 그 또한 열리지 않는다.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 분명 둘 중 하나인데 말이다.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하나? 다시 처음 열쇠로 돌아가야 한다. 문이 열린다. 문 한 번 여는데 세 번의 키질을 해서야 성공 했다는 말이다. 하나 깨닫는다. ‘, 문은 열쇠로 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여는 것이구나.’라고 말이다.

 

마음 읽기

문채원 유연석이 주연한 영화 그날의 분위기”(2016)에 보면 주인공이 여자로 인해 마음을 잡지 못할 때 농구공을 보게 된다. 그 농구공에는 그런 글귀가 있다. “흔들릴 때는 첫 마음이 이끄는 대로.” 늘 흔들리는 생이다. 그럴 때 첫 마음으로 돌아가자. 그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자신의 마음뿐만 아니라 살아가다보면 때로는 타자의 마음을 어쩔 수 없이 읽을 때도 있다. 그 마음 읽다보면 그 마음속에 있는 속마음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 마음이 그 속마음과 다름을 알게 되면 그 마음 읽고 싶지 않게 된다. 아니 더 적극적으로 더 의지적으로 그 마음 읽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사람 마음 읽는 다는 것,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적당히 읽어야 하고 적당히 몰라야 한다. 사람이 사람 마음 어찌 다 알겠는가. 하지만 같은 성정을 지닌 인간이기에 그의 마음이 보일 때가 있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은 언제나 불편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내가 단속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속한다고 해도 그 속마음이 다른 것을 품으면 어쩔 수 없는 일. 자신의 마음도 자신이 단속 하지 못해 날마다 이리저리 방황하지 않는가?

 

자신의 속을 들여다 볼 용기

건강검진을 해 보면 알겠지만 내시경을 준비하는 것이 만만치 않다. 특히나 대장 내시경을 하기 전 날에는 모든 숙변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숙변 제거용 약을 물과 함께 거의 4리터나 마셔야 하는 곤욕을 치러야 한다. 이전에 경험해 본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비릿한 냄새를 견디기는 쉽지 않다. 어떤 이들은 그 과정이 힘들어 중도에 포기도 한다더라. 내시경 검사를 다 하고 나서 대장 내에 채 다 빠져 나오지 않은 숙변과 떼어낸 용종을 사진으로 볼 때 자신의 몸속에 있는 이물질들을 자신의 맨 눈으로 들여다본다는 것은 사실 불편하다.

자신의 속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이는 그 속에 부끄러운 모습도 있고 남에게 보여 주기 싫은 모습도 있으며 성숙되지 못한 모습 또한 있기에 그렇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 자신의 속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내면의 솔직한 모습 그대로의 모습과 마주 대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속 자아가 무엇을 꿈꾸고 있는지 무엇을 진심으로 원하는지 보아야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어차피 자신의 내면의 눈이지 않는가? 그러기 위해 무얼 해야 할까?

 

브레이크 없는 바쁜 일상: 묵상 없는 경주마 같은 삶

어느 곳이나 사람 사는 세상의 아침은 바쁘고 분주하다. 그런데 저마다 재빠르게 움직이는 거리 한 쪽 귀퉁이에 이방인처럼 잠시 서서, 눈앞에 벌어지는 현상들을 바라보는 것 또한 흥미롭고 의미 있다. 먼저 가려 끼어드는 차, 그에 반해 세상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것만큼은 막아야겠다고 필사적으로 저지하려드는 차, 그러다가 터져 나오는 경적 소리, 인상 쓰며 화내는 얼굴들, 출근길 서둘러 어제의 발자국을 기억하며 걸어가는 이들의 초점 흐린 눈동자, 몸은 집밖으로 나왔지만 정신은 아직 잠자리에 머물러있는지 하품하며 학교 가는 아이들, 세상은 그렇게 위태하게 반복적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저마다 시대가 맞춰놓은 삶의 속력에 부대끼며 살아들 가는데 그 삶에 브레이크 장치가 없는 듯하다. 그 속력을 무엇으로 제어할 수 있을까? 여기서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묻는 것은 별 의미 없지만 달리기만 하는 자동차에 브레이크가 없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아찔하지 않는가? 사람에게 안정감을 주는 것은 어쩌면 역설적으로 브레이크 장치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에 각자의 인생의 도로위에 브레이크 장치가 안전한지 살펴보는 수고 정도는 해야 할 것 같다. 새들도 전깃줄에 앉기 위해 자신의 날개에 브레이크를 걸지 않는가 말이다.

멈춤 한번 없이 경주마처럼 오로지 속도를 내는 삶은 빨리는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이 누구인지는 모르면서 살아갈 위험이 크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려면 자신을 보아야 한다. 가던 길을 멈추어 서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도는 물어야 한다. 또한 묻지 않고 행동만 하려 하거나 속도만 내려는 삶은 금세 지친다. 자기 보다 더 속도를 내는 사람이 나타나면 기가 꺾여 금방 포기해 버리고 만다. 거기가 끝이다.

 

존재의 내공

풍경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그 소리만 듣고 있으면 고즈넉한 산사(山寺)에 와있는 듯 하고 예배당 종탑에 걸려 있는 종소리가 들리는 어느 시골 교회에 와 있는 듯도 하다. 바람이 일어 풍경소리를 내는 순간만큼은 아이들 떠드는 소리, 자동차 경적 소리, 옆집 TV 소리 등 세상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온갖 잡다한 소리가 멈추게 된다. 참 좋다.

그런데 때로는 내면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밖으로 열려 있는 귀를 닫아야 할 때도 있다.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부는 날 떠다니는 비닐봉지 같이 어디 한 군데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며 요동치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그 가운데서도 허공의 자유로움에 과감히 몸을 맡기는 건 어쩌면 비닐봉지의 내공의 힘인지도 모르겠다.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든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 내면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무엇에 목말라 하는지 귀 기울여 본다면 거기에 자신의 존재의 내공이 있을 거다. 그걸 만나는 것이 각()하는 것 아닐까?

밖을 향하던 시선이 문득 생각이 될 때가 있다. 그때는 발걸음이 늦어진다. 운전 속도가 늦어진다. 사색은 그렇게 시작한다. 사색은 빠른 걸음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빠른 걸음은 의지를 동반한다. 의지가 동반 되는 순간 사색은 멈춘다. 걸음의 속도를 늦추어 의지가 사라져야 사색이 임한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묵상과 숙고는 어쩌면 이러한 시대의 속도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유일한 장치인지도 모르겠다. 그것들은 삶의 속도에 반발하는 기제다. 속도에 반발하면 묵상할 시간이 생기며 그러다보면 묵상이 가져다주는 신비함을 맛보게 된다. 삶의 속도에 반비례해야 자신의 삶의 걸음을 볼 수 있고 타자의 삶 또한 볼 수 있다. 묵상하며 사는 것은 세상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사는 원동력이 된다. 그래서 오늘도 가던 걸음을 멈추고 생각한다. 존재하고 살기위해.’

 

화두 품고 살아가기

철학은 사실 이렇게 시작한 것 아닌가. 흔히들 철학을 어렵다 한다. 아니 사실 어렵다. 그러나 세상 학문 대부분이 그렇듯이 철학 또한 인간 사고의 산물임을 인정해 버리면 마음이 편해진다. 물론 인류 역사를 거쳐 오면서 켜켜이 쌓여온 심오한 지식과 지혜위에 세워진 것이 철학이기에 그 의미를 헤아리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이는 철학 또한 누군가의 속마음에서 자란 화두에서 시작 된 것이기에 그렇다. 화두 하나에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의미의 세계가 해석되기도 하고 화두 하나에 세계가 열리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인생을 인생 되게 만드는 것이 화두다. 그러기에 그러한 화두를 잃어버리면 삶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자신의 화두를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화두를 잃어버렸기에 우리는 그저 주어지는 것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며 살아가는 듯하다. 인터넷을 통해 주어지는 뉴스를 그저 보거나 수많은 매체를 통해 제공되는 정보를 그저 습득하며 살아가기에도 바쁘다. 그러나 묵상하며 사는 삶, 즉 한 주제를 가지고 스스로 깊이 있게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질문하고 답하며 살아가는 삶은 부족하다. 하늘이 흐리면 그림자도 흐린 법이다. 흐린 하늘에서 짙은 그림자가 나올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빛 따라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그림자 같은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빛 같은 주체다. 주체가 되려면 주체답게 화두를 품고 생각하며, 자신이 제기한 질문에 답하면서, 그리고 그 답이 명확한지 확인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인생이 품고 있으며 수시로 던지는 질문 앞에 당당하게 답하지 않겠는가. 그러기에 오늘도 화두를 품고 살아보자.

그 화두를 품고 살아가면 사색은 글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 몸 자체는 무한한 글의 저장고임을 깨닫게 된다. 몸 자체를 잘 들여다보면 글이 보일 수 있다. 나의 몸이 어떤 언어로 구성되어 있는지, 나의 뼈와 살과 피에 어떤 단어와 문장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들이 태곳적부터 잠들어 있는지, 그 이야기들을 끄집어내는 것도 글쓰기의 한 방법인 듯하다. 나의 두뇌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무슨 생각을 할 것인지 물어보자. 나의 위장은 어떤 존재론적 아픔으로 괴로워하고 있는지, 나의 간에는 어떤 허세가 작렬하여 부은 채로 남아 있는지, 나의 두 손은 무엇을 탐하려고 손가락 운동을 하고 있고, 나의 두 발은 무엇을 그리워하며 싸돌아다니는지, 나의 두 눈은 무엇을 직시하며, 나의 두 귀에는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아니 무슨 소리를 골라 듣는지, 나의 입은 무엇에 입맛 다시며 살아가고 있는지 끄집어내 보자. 나의 몸과 마음에 있는 글들을 하나씩 하나씩 퍼내 보는 것, 그것이 자신을 글로 승화 시키는 작업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하다보면 퍼내고 퍼내도 마르지 않는 자신만의 심연을 발견 할 것이다. 그리고는 언젠가는 알 것이다. 자신의 몸 그 자체가 글 그 자체라는 것을 말이다.

마음에서 글쓰기까지의 여정, 한 번 떠나 보고 싶지 않은가.

 

글쓴이 박동식은 미주 장신대학교 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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