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살리는 곳인가, 죽이는 곳인가?
교회는 살리는 곳인가, 죽이는 곳인가?
  • 김영웅
  • 승인 2018.01.24 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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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환 감독의 영화 '쿼바디스'(2014)
김재환 감독의 영화 '쿼바디스'(2014)

생물!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자극을 받았을 때 반응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자극이 주어졌는데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는 했지만 그 자극을 처리하는 과정이 잘못되거나, 처리과정은 문제가 없었지만 반응과정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 생물은 건강한 게 아니라 병든 것이다.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다.

교회 안에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겼는데도 쉬쉬하며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냥 넘어가는 현상을 과연 나는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문제를 문제로 인지하지 못하는 교인들, 인지는 했지만 처리 과정이나 반응과정이 왜곡되거나 결핍되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교인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눈치 보며 안절부절 하면서 침묵을 지켜야만 하는 무언의 분위기에 압도되는 교인들을 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신앙이 좋아서일까, 믿음이 좋아서일까? 이런 말로 그들의 반응 없음을 이해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살아있는 생물의 입을 솔직하게 열지 못하게 하는 암묵적인 압력이 과연 성숙한 신앙이나 큰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무슨 문제가 생겨도 과묵함을 유지하고 그저 스마일이나 짓고 있는 것이 과연 성숙함의 증거일 수 있을까? 성숙함이란 게 고작 쉬쉬할 줄 아는 능력의 검증이었던가! 그리고 그런 교인을 찍어내는 공장이 교회라는 곳일까? 우리가 다니는 교회가 그런 공장이었던 것인가!

만약 그런 교인들을 모델로 삼아 양산해내는 공장이 교회라면 난 굳이 교회라는 건물에 다닐 필요가 없다고 본다. 나는 묻고 싶다.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그런 묵인의 코드를 받아들이고 우선시해야 하는지를. 차라리 불만을 건전한 토의방식으로 얘기하고, 그 사항을 접수하여 공론화시키고,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서로 대화해 나간다면, 그 문제가 완벽히 고쳐지지 않더라도 불만을 제기했던 당사자조차도 마음이 흐뭇해지지 않을까?

그러는 과정 중에 오히려 예상치 못했던 결속력을 느끼며 서로가 서로를 더 잘 알게 되고 하나가 되는 기회가 생겨나지 않을까? 이해가 되지 않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정황을 감지했는데도, 입 밖으로 꺼내면 마치 테러라도 일으키는 것처럼 대우받게 되는 공동체가 정말 해피한 공동체일까? 그 미소가 진짜 미소일까?

세상 속의 동호회를 가입하거나 탈퇴할 때에도 규칙이 있고 질서가 있고 예의가 있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가 그런 기본적인 것도 무시한 채 그저 스마일 코스프레나 하고 있다면, 이건 정말 엽기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교회가 그냥 관습적인 공장을 잡음 없이 돌리기만 되는 것인가. 그 공장의 부속품이 되어 불량품이 생기면 새것으로 교체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 공장을 돌려야만 하는가. 이러다가 결국엔 자극과 반응의 인과관계를 무시하는, 죽은 자들의 집단이 바로 교회의 마지막 모습이 되진 않을까. 교회는 살리는 곳인가, 죽이는 곳인가? 그리고 교회를 다니기 위해선 나도 그들처럼 죽어야만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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