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주훈] 사람 잡는 어부
[최주훈] 사람 잡는 어부
  • 최주훈
  • 승인 2018.01.23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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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주훈 목사의 설교 - 막 1:14-20

주현절 후 셋째 주일 복음서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첫 번째 설교입니다. 아주 간단하고 직설적인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이지요. 그리고는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막1:17) 이 구절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구절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구절을 볼 때 마다 빙긋 웃음이 나옵니다. 순전히 번역상의 문제이겠지만, 원문과 상관없이 한국어 표현만으로 보자면, '어부'들이 바다에 가서 ‘낚시한다’는 표현은 무언가 어설프게 들립니다. 바다낚시는 생업 어부가 하는 게 아니라 취미 생활하는 사람들 이야기이겠지요. 어부는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는다'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어부라는 말이 나오면 뒤에 따라오는 말은 '낚는다'가 아니라 '잡는다'가 맞지 않을까하고 엉뚱하게 생각해 봅니다. 게다가 요즘 시대에 ‘사람을 낚는다’는 표현이 그리 좋은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어로 번역된 이 구절이 참 재미있습니다. 고기 잡는 어부이니,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구절을 한국어 어법에 맞게 잡아놓으면, ‘사람 잡는 어부’가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그렇게 읽어보니 어감이 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서 ‘너희를 사람 잡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라고 했다고 생각하니 더 이상합니다. ‘사람 잡는다’는 표현이 우리말에서 아주 부정적인 뜻이기 때문에 한국어 성서 번역자는 이 구절을 고민하다가 그냥 ‘사람 낚는 어부’라는 표현을 쓴 것 아닐까하고 그저 추측만 해 봅니다.

어쨌거나 우린 ‘사람 낚는 어부’라는 이 구절이 머리에 각인되어 있어서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그저 이 구절을 ‘전도 많이 하라’는 비유로 통상 이해하곤 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 나오는 어부는 교회다니는 기독교인이고, 물고기는 교회 안 다니는 비기독교인이 되어 버립니다. 사람 낚는 어부, 이 뜻은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을 전도 잘하는 기독교인이란 뜻이 되곤 하지요.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표현이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물고기는 물 밖으로 나오면 죽습니다. 게다가 어부건 낚시꾼이건 물고기를 낚는 이유는 잡아먹으려고 낚는 것이지, 살리기 위해서 고기 잡는 경우는 없지요. 그러니 이 구절을 놓고 ‘전도해서 사람들의 영혼을 살리라’는 식으로 무작정 설교하기가 영 개운치 않습니다.

단순히 한국어 번역에서만 문제가 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의 최초 청중들 가운데 대다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대인들이 들었어도 꽤 이상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목숨같이 여기던 구약성서에서 어부와 고기잡이의 이미지는 모두 심판과 관련해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두어 개 들어볼까요? 예레미야 16:16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며 그 후에 많은 포수를 불러다가 그들을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바뒤 틈에서 사냥하리라”

“내가 또 내 그물을 그의 위에 치고 내 올무에 걸리게 하여 그를 끌고 갈대아 땅 바벨론에 이르리니 그가 거기서 죽으려니와 그 땅을 보지 못하리라” - 에스겔 12:13,

에스겔에서 하나만 더 찾아볼까요?

“내가 갈고리로 네 아가미를 꿰고 너의 강의 고기가 네 비늘에 붙게 하고 네 비늘에 붙은 강의 모든 고기와 함께 너를 너의 강들 가운데에서 끌어내고 너와 너의 강의 모든 고기를 들에 던지리니 네가 지면에 떨어지고 다시는 거두거나 모으지 못할 것은 내가 너를 들짐승과 공중의 새의 먹이로 주었음이라.” - 겔 29:4-5

어떻습니까? 방금 전 읽은 구절 말고도 구약 곳곳(합 1:14; 암 4:2 외)에 나오는 물고기 잡는 어부의 비유는 듣기 좋은 뉘앙스로 들리지 않습니다. 그저 무시무시한 심판의 선언이지요.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나 마가복음을 처음 듣던 유대인 청중들은 무척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제자가 된 사람들은 어부가 되어서 세상을 심판하는 저승사자 같은 이미지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어떤 학자는 (Charles W. F. Smith)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신 것은, 전도가 아니라 임박한 종말과 심판을 선포하기 위해 부르신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Smith, “Fishers of Men,” HTR, 52 [1959], 201). 어찌되었건 우리가 통상 설교하는 ‘전도 폭발’ 같은 뜻을 여기선 아무리 보아도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 낚는 어부’라는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원어로 보면 다른 해석의 가능성도 보입니다. ‘할리에이스 안드로폰’(ἁλιεῖς ἀνθρώπων). 이 구절을 영어로 표현하면 FISHERS OF(FOR) PEOPLE, 정도 되는데, 헬라어 원어를 보면 ‘어부’에 해당하는 단어가 때로는 ‘물고기들’이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마4.17절 해석; Mattew (Zondervan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by Grant R. Osborne and Clinton E. Arnold].

그렇다면 이 구절은 ‘사람을 낚는 어부’ 뿐만 아니라 ‘사람을 위한 물고기’이란 번역도 가능하게 됩니다. 실제로 영역 성경들 가운데엔 그렇게 번역한 성경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구절을 이렇게 읽을 수 있게 됩니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위한 물고기>가 되게 하리라’ 이렇게 읽고 나면 이제 이 구절은 그 의미가 아주 풍성해집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사람을 심판하고 죽이는 게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사람을 위한 물고기의 역할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고기라는 표상은 신약성서에서 꽤나 무게감이 있지요.

산위에서 5천명을 먹이실 때 등장했던 오병이어, 즉 떡과 물고기가 있었고, 부활하신 다음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과 동행할 때를 기억해보면, 바로 옆에 있던 스승마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절망하던 제자들이 제대로 눈을 떠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보게 된 것도 물고기 요리를 함께 먹었을 때였지요. 이렇듯 물고기는 사람을 살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게 하는 상징입니다.

그러니 제자가 되어 사람을 위한 물고기가 된다는 것은 이웃을 살리고 그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게 하는 역할로 부름 받았다는 뜻이 되겠지요.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공동체는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는 곳이 아닙니다. 모여서 사람 잡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교회가 아닙니다. 모여서 사람 살리는 일, 사람을 세우는 일, 그곳에 부활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는 것을 말과 행실로 나타낼 때 그 곳이 교회입니다. 모름지기 교회란 말과 행동으로 사람 잡는 모임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해 제자들을 부르셨고, 그 일을 위해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지요. 갈릴리 해변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거기 있던 사람들이 자기 생업을 다 내려놓고 그분 뒤를 따라갑니다. 막1;16절 이하의 말씀이지요. 이 구절을 놓고 몇 번을 읽고 또 읽어보았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생업을 내려놓고 따라갔을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7절 “나를 따라오라”라는 아주 짧은 초대가 도대체 그리도 위력이 있었을까요? 그 음성에 사람을 잡아 끄는 무슨 마력 같은 것이 있었을까요? 지금 예수님이 ‘나를 따라오라’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재산과 가족을 다 버리고 갈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물론 TV를 보면, 아이돌 스타가 손짓하나만해도 뒤로 까무러치는 군중들이 있지만,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는 시점을 보면, 그분이 세상에 알려진 시기가 아닙니다. 유명세와는 전혀 상관 없던 시기입니다. 게다가 이 사건 이전에 어떤 기적을 행하신 적도 없었지요. 이 사람이 대단하다고 평가하는 사람이라곤 고작 요단강의 세례자 요한 밖에 없던 시점입니다.

17절의 저 짧은 말이 온유하고 정중한 초대였는지, 안 따라오면 두고 보라는 식으로 눈을 부릅뜬 예언자처럼 강한 어조로 말을 했는지도 알 길이 전혀 없습니다. 성경이 그 부분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인기 있는 자리에서 부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신비한 기적을 보여준 다음 부르지도 않고, 덤덤한 말씀으로 부르셨다는 점입니다. 그리고는 그 말씀에 사로잡혀 어부들이 자기 배와 삶의 자리를 내려놓고 그 길로 따라 갔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어부들은 질문이나 지체 없이 순종하고 예수의 뒤를 따라갑니다. 이렇게 예수를 따라간다는 것은 예수를 스승으로 삶고 그분과 함께 방랑생활을 하며 공동생활을 한다는 뜻인데, 그렇게 어부들이 자기들의 사회 경제적 소유를 포기하고 따라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과 모습 때문이라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과연 꼭 그것만 이었을까요?

한 가지 추정해 볼 실마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의 배경을 따져봅시다. 출신지로 보면 일단 ‘이방인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갈릴리’ 지방으로 한정됩니다. 제자들 대부분이 그 근방 출신입니다. 그런데 더욱 특이한 것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직업입니다. 제자들의 직업을 보면, 고향이 원래 농촌지역이지만 그곳에서 땅을 소유하고 땅을 경작하던 농부였다거나 어떤 식으로든 농업과 관련된 일을 했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땅을 소유하고 경작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절대빈곤층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제자 가운데는 세리 마태도 있지만 마태 역시 당시 유대인 사회에선 절대 소외계층, 또는 하층민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의 경제권을 모두 포기 하고 예수를 따라갔다는 말은 무척 대단하고 우리로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인 것 같지만, 실상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이들은 더 이상 포기할래야 포기할 게 없는 극빈층이었다고 보는 것도 타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나를 따르라’는 그 말씀에 순순히 따라갔겠지요. 경제적인 수준에서도 극빈층에 속하고, 사회 구조상으로도 최저수준에 있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최저생계수준의 언저리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버려두고 갔다는 그물과 배를 보고 대단하다고 입을 벌릴 것 까지는 없습니다.

우리가 정작 이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경제권 포기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빈곤한 자들이 빈곤한 자를 살리는 삶에 동참’했다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약한 자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름에 응답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 궁핍하고 절망한 사람들이 함께 모인 곳에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이 시작됩니다. 부유한 자들의 남아도는 여분의 재산으로 하나님나라가 만들어 지는 것 아닙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비유는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의 방식은 가난하고 궁핍하고 절망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자신처럼 가난하고 궁핍하고 절망한 사람을 위한 생명의 떡, 생명의 물고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곳에선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가치를 인정하고 인정받습니다. 그렇게에 일방적인 복지정책의 수혜자, 일방적인 시혜자로 구분되거나 차별되지 않습니다. 서로의 모습을 인정하며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가진 게 없어서 받을 수 있지만 가진 게 없지만 나눌 수 있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의 초대에 필요한 것은 참여하는 용기입니다.

한 구절만 더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막1:14-15에서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십니다. ‘때가 찾다’는 것은 내일로 미루어진 ‘나중 언젠가’를 뜻하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 제대로 다리 뻗고 잘 수 없어 눈물이 나는 사람, 어린 아이와 고아, 홀로 되어 어디에 기댈 곳이 없는 여인을 위해 무조건 약속되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궁핍하십니까? 기댈 곳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바로 지금 일어나 그분의 뒤를 따라 가보십시오. 바로 그곳에 나와 같이 궁핍하고 상처받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손을 잡고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을 살리는 물고기가 되십시오. 저와 당신을 위해 생명의 물고기가 되신 주님께서, 이웃의 손을 붙잡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당신에게 하나님나라의 위로와 평강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길이요. 신앙의 복된 길입니다. 이 복된 하나님나라의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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