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계약 삽질기
집계약 삽질기
  • 강현아
  • 승인 2018.01.24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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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계약하기로 한 원서동 집 주인이 다른 사람과 이중계약을 하는 바람에 일주일간 고민하고 바라던 집을 시간차로 놓쳤다. 집주인에게 계약하겠다는 의사를 전하고, 같이 살고 싶다는 후배에게 방이 세 개니 집 한 번 보고 오라며 약속을 잡아주고 연락을 기다리는데, 예상보다 일찍 전화가 왔다. 같은 시간대에 집을 보러온 다른 사람이 있다고. 얘기를 듣자마자 다급히 집주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 즉시 전화가 걸려왔다. '5초 전에 다른 분에게 전세금을 받았다, 너무 미안하다'. 순식간에 종결된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평정심을 잃고 절절히 매달렸지만, 소용없는 일인 것을 나도 모르지 않았다. 허탈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집주인과 통화하려고 버스에서 내린 게 효제초등학교 앞이었는데, 정류장에 앉아 대놓고 울 수 없어 학교 운동장 귀퉁이 바위에 앉아 훌쩍이다가, 어렵게 후배에게 문자로 상황을 전한 후 멍 때리던 참이었다. 좀 전부터 주위를 계속 맴돌던 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급기야 내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서 뭐하냐, 가던 길이나 계속 가라며 고양이에게 아무 말이나 쏟아내는데 대화인 듯 독백 같은 그 잠깐의 시간이 얼마나 위로가 되던지.

그러다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어 맥 풀린 다리로 집에 돌아와 나도 모르는 초인적인 힘으로 폭풍의 검색을 마스터한 다음, 방금 새 매물로 등록된 세 군데 집 주인에게 연락을 취해 오늘 중에 집을 볼 수 있냐고 물었다. 두 곳에서 좋다는 답신이 와 한 시간 후에 보기로 약속하고 주섬주섬 외투를 챙겨 입는 사이, 집 한 채가 계약이 됐다는 문자가 왔다. 황급히 택시를 타고 남은 한 집을 보러 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계약금을 송금하고, 차를 한 잔 얻어 마신 후 혜화동으로 돌아왔다. 원서동 집 계약이 취소된 지 세 시간 만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 종결됐다.

오래 고민하고 원하던 집은 아니지만, 내게 가장 적합한 집이란 걸 그냥 보자마자 알았다. 좀 전에 겪은 일 때문에 상황 판단이 흐려졌거나 좀 더 과감해졌는지도, 열흘 후면 집을 빼야 하는데 더 이상 집 문제로 괴롭고 싶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전세금이 모자랐지만 그냥 덜컥 계약을 해버리고 나오는데 대책 없이 어찌나 마음이 개운하던지!

 

새 집을 본 지 삼십 분 만에 계약금을 보낸 건 주인댁 분들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주중에 새로 이사할 집은 삼청동 주택가의 작은 삼층짜리 건물, 일층. 우리 옆집엔 삼청동에서 공방을 운영하시는 작가 분이, 삼층에는 주인댁 내외 분, 그리고 이층에는 남편 분 어머니께서 사신다고 했다. 계약 사항을 이야기하러 외부계단을 오르니 밤인데도 삼층 현관에서 북악산 능선이 환히 보였다. 쬐그맣고 하얀 말티즈와 푸들이 입구에서 호들갑스럽게 우리를 맞아주었는데, 손바닥 냄새를 맡더니만 금새 꼬리를 살랑이며 품에 와 긴장을 풀었다.

자신들도 얼마 전까지 혜화동에 살았다며 반갑다고 하셨다. 건물 전체 리모델링이 끝난 후 새 집으로 이주하신 듯 했는데, 건물 앞에 철거 잔여물들이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몸집이 너무 작아 한참 어려 보이던 강아지들은 일곱 살씩이나 된다고. 나랑 같이 지낼 후배가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유난히 이뻐라 했다. 후배는 개를 너무 좋아한다며 종종 멍멍이들을 보러 와도 되는지 불쑥 여쭈었고 흔쾌히 좋다고 하셨다. 우리와 주로 대화를 나눈 분은 아내 쪽이었는데 반려동물 키우는 걸 적극 환영한다고 하셨다. 보통 세입자가 동물과 지내는 걸 반대하는 경우를 많이 봐와서, 따뜻한 분이구나 생각했다. 간신히 누르고 있던 냥집사로의 소망이 한 뼘 더 커지긴 했다. 시장은커녕 구멍가게도 안 보이는 동네라, 장은 어디서 보는지 여쭈었다. 서울역에 있는 롯데마트에 가신다며, 차가 있으니 품목을 알려주면 가는 길에 사다 주겠다, 아니면 같이 가도 좋다고 하셨다. 자전거 운전자인 나로서는 그 대목이 가장 인상 깊었다.

​​​살면서 내가 만난 집주인 중에 가장 친절하셨다. 부모님 건물의 관리자이신 듯 했지만, 가장 젊은 부부이기도 했다. 필요한 것을 챙겨 주시려는 아내 분의 살뜰한 마음도 좋았지만, 몇 년 후에 계약이 갱신되면 혹시 조건이 조금 바뀔 수 있음을 미리 솔직하게 얘기해 주신 남편 분에게도 믿음이 갔다. 계약금을 송금하고 일어날 즈음 간단히 자기소개를 부탁하셨다. 나는 대충 얘기하고 나올 참이었는데 아내 분께서 자신도 글 쓰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포털에 검색하면 프로필이 나오니 나중에 찾아봐도 된다고. 우리는 그 즉시 성함을 검색했다. 출간하신 몇 권의 단행본과 석사 논문이 같이 검색되었다. 마음이 급격히 기운 건 논문 제목을 본 후였는데, 내가 좋아하는 비평가에 관한 것이었다. 동국대 국문과 출신이셨고, 한 다리 건너면 아는 분일 것 같아 더 캐묻진 않았지만 내심 반가웠다.

집 앞까지 배웅해 주셔서 같이 계단을 내려와 계단 옆 아직 창고로 사용 중인 쇼룸 앞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데, 세상에.. 조만간 여기에다 책방을 열 계획이시라고. 순간 내 눈에서 불꽃이 튀었을 것이다. "급한 일로 책방을 비우시면, 제가 가게를 보겠습니다. 최저시급만 맞춰주신다면." 하고 말해 버렸다. 아시는 분도 계실 텐데, 내 레파토리 중의 하나. 몇 년 전부터 책방에서 일하고 싶다는 얘기를 종종 해왔고, 도쿄책방탐사 갔을 때도 책방 직원이 꿈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기도 했다. 여기가 내가 누울 자리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감마저 들었다. 집계약이야 꼼꼼히 따져 보겠지만, 좀 전에 겪은 일 때문에 기분이 묘했다. 전화위복이든, 호사다마든 인생사 새옹지마. 이왕지사 천재일우이길!

아직 삼청동에 책방이 없는 걸로 아는데, 머잖아 생긴다면 정말로 우리집 주인댁 작가 분이시길. 이제 슬슬 짐을 싸야 하고, 침대도 팔아야 하고, 할 일이 태산이건만 마음이 별로 고되지 않고 조금 설레기까지 하는 건 아마 이웃 사람들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지도. 알바야 안 돼도 상관없고, 김칫국 한 사발 먼저 마시는 것쯤이야 지나가는 에피소드여도 괜찮다. 집 앞에 책방이 있는 건 생각만 해도 흥이 난다. 음음~ 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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