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환] 부르심에 지체 없이
[이택환] 부르심에 지체 없이
  • 이택환
  • 승인 2018.01.24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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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목사의 설교 - 막 1:14-20

구약과 신약이 겹치는 시기에 활동한 세례요한의 임무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한 때 자신이 그리스도로 오해받기도 했습니다. 충분히 교만해질 수 있었음에도, 그는 적극적으로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다”라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습니다.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한다”고 겸손했던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정확히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왜 예수님과 동역하지 않았을까요?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면, 더 큰 시너지 효과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각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사명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소개하는 데 있지, 메시아와 함께 사역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두 시대를 나눈다면, 세례요한은 이전 시대, 즉 구약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는 구약의 끝자락에서, 예수님과 함께 곧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을 선포한 위대한 예언자였지요. 그런 점에서 요한은 이전 시대 최고의 인물입니다. 이를 적절하게 표현한 말씀이 마 11:11절입니다.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여기서 천국이란 죽어서 가는 하나님 나라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서 시작된 새로운 시대를 말합니다. 세례요한은 이전 시대의 끝에서 옛 이스라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그러기에 구시대의 인물 가운데 가장 큰 자가 됨에도, 예수님과 함께 도래한 새 이스라엘의 시대, 즉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가장 작은 자에 불과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친히 새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새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12명의 사도들을 부르셨지요. 오늘 본문은 그 중에 시몬(베드로)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어부입니다. 예수님은 왜 어부를 부르셨을까요? 여기에는 어떤 표적이 있는데, 본문은 예레미야 16:16절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16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며”

여기에는 종말론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전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세상을 여신다는 의미지요. 예레미야 16장 16절은 하나님께서 어부를 불러 범죄한 이스라엘을 낚게 하고, 포수들을 불러 그들을 사냥하게 한다는 무서운 심판의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나타낸 신약의 말씀이 마 19:28입니다.

“28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이 말씀은 단지 세상 끝 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이전 세상이 새롭게 되고(종말), 예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얻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때에 옛 이스라엘이 심판받고, 새 이스라엘이 그 자리를 대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실제로 골고다에서 예수님과 함께 옛 이스라엘이 십자가의 심판받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 이스라엘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열 두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새롭게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백성, 최초의 새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그 새 이스라엘에 속한 자들이지요.

17-20절은 예수께서 당신의 백성 새 이스라엘을 창조하실 때, 최초로 부르심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응답했는가를 보여줍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곧 그물을 배에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깁고 있던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물만이 아니라,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결단을 내리는 데 있어서 어떤 심사숙고를 했다거나, 일말의 망설임이 있었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당시 어부들이 단순 무식했고, 힘겨운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당시 어업은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그리스-로마 세계에 있어서 나름 인기 있는 직업이었다는 역사적 연구가 있습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몰라도 특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단지 고용된 품꾼 어부들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적어도 자신의 배와 고기 잡는 장비들을 소유하고, 일군의 어부들을 고용할 만큼 제법 부유한 어업가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즉시 예수님을 따라간 것은 단순히 힘겨운 어부노릇을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마가가 말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부르심의 절대성! 그 부르심은 사람의 어떤 일보다 우선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부르심 앞에,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 조금도 꾸물거릴 시간이 없으며, 즉각적으로 응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초청에 즉시 응했으며, 그런 식으로 하던 일을 곧 그만 두고 예수님을 따라 간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귀한 재산인 배와 그물까지도 버려둔 채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재산이나 소유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재물마저도 하나님 나라의 절대성 앞에서는 철저히 상대화됨을 말합니다. 오늘 서신서 말씀 고린도전서 7장 29-31절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고전 7:29-31,

“29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29절은 남자들이 결혼한 후에도 총각 행세 하라는 게 아닙니다. 결혼이 중요하지만, 절대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은 결혼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안 하는 것도 좋다고 말합니다. 결혼이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30절은 슬픈 일을 당해도 슬퍼하지 말라, 기쁜 일이 있어도 기뻐하지 말라, 무감각하게 지내라는 게 아닙니다. 슬픈 일이나 기쁜 일도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죽고 싶을 정도로 슬펐던 적이 있을 겁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 게 아닙니다. 또 한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기쁘지 않죠? 31절은 마찬가지로 재물도 많건 적건,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절대성은 가족윤리마저 뛰어넘습니다. 20절,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초청 앞에,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이 말씀은 자칫 우리를 시험 들게 할 수 있습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불효자가 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십계명 제 다섯 번째 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 있듯이, 성경은 효를 매우 중요시 여깁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마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 가지, 하나님 나라의 절대성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또한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직업을 버려야 할까요? 물론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라면 재산도 소유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심지어 사랑하는 가족도 버려두고,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초청에 즉시 응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한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직접 명령하신 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보다는 대개 목사, 전도사, 선교단체 관계자들이 요구한 것들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신학교에 가라, 선교단체에 헌신하라, 선교사가 되어라...”

하지만 이런 일들은 아무리 거룩한 일이라도,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는 아닙니다. 교회/선교단체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교회/선교단체가 곧 하나님 나라는 아니지요. 그것은 단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기관일 뿐입니다. 그리고 교회/선교단체에 충실한 것이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면, 직장에 충실한 것 또한 하나님 나라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들을 통해 이러한 사역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라는 요구를 받았다면, 고민하고, 망설이는 게 당연합니다. 또 이런 일들을 100%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곧, 즉시, 즉각적으로 결단하고 실행하는 것은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이를 위해 직업을 포기하고, 재산과 소유를 다 버리고 인생을 올 인하는 것은 후회스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나아가 부모와 형제와 아내와 자식도 팽개치고 그 일에만 매달린다면, 인륜을 저버리는 부도덕한 행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이든 선교회의 일이든 신중한 판단이 요구됩니다. 오히려 여유가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각자가 질 수 있는 믿음의 분량만큼 기쁘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당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절대적인 하나님 나라로 부르셨고, 그래서 우리가 그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해야 하지만, 그것은 어떤 특정한 사역을 하라고 부르신 게 아닙니다.

그보다 예수님은 우리를 절대적인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초청하셨습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 나라를 믿으라는 부르심입니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일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 6:29). 그러므로 우리의 사역도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행함으로 드러난 것이어야 합니다. 오히려 절대적인 그분의 나라에 대한 믿음도 없이 단지 수많은 사역을 행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좋은 일을 많이 하지만, 오히려 세상의 칭찬보다 손가락질을 많이 받는 것도 교회가 하나님 나라보다 인간의 사역을 더 중요시한 부작용입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의 부르심이 절대적인 것은, 그리고 그 부르심 앞에 즉각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것은, 어떤 사역이 중요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이 절박하기 때문입니다. 죄와 죽음 아래 놓여 있는 인간이 그렇게 비참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교회 밖은 물론 교회 안에서도 그 사실을 모르거나, 알아도 자신의 비참함과 절박함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진 재물이 조금 있다고 해서, 선한 일을 조금 한다고 해서, 아직 건강하다고 해서, 이런 저런 이유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절박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서신서 말씀 고전 7:3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외형은 다 지나가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오늘 복음서 말씀은 우리에게 영원하고 절대적인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합니다. 예수께서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새 시대의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그 절대적인 하나님 나라의 부르심 앞에 지체 없이 응해야 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세상의 지나가는 외형적인 것들을 너무 의지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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