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역사서술에서 배우는 교훈
성경의 역사서술에서 배우는 교훈
  • 권영진
  • 승인 2018.01.19 05: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앗수르 제국 산헤립에 의해 함락되는 유대 왕국의 성읍 라기스
앗수르 제국 산헤립에 의해 함락되는 유대 왕국의 성읍 라기스

앗수르(앗시리아), 바벨론(바빌로니아)과 바사(페르시아)는 본질적으로는 이스라엘을 침공했고 다스린 제국들이었습니다. 침략자라는 면에서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 나라들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다릅니다.

앗수르와 바벨론에게는 증오에 가까운 서술들이 이어집니다. 예언서들을 보면 이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선언은 그야말로 산처럼 많습니다. 반면에 같은 침략국인 페르시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후기 역사서술(에스라-느헤미야, 포로기 이후 예언서들 등)들을 보면 심판선언은 고사하고 오히려 우호적인 서술들이 대부분입니다. 특히 고레스에 대한 호의적 서술은 페르시아 정부의 입장을 대변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앗수르나 바벨론이나 페르시아나 모두 하나님의 [막대기]로 사용되었다고 예언서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그 평가는 매우 다릅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사실 간단합니다. 페르시아는 고레스 이후로 이스라엘의 귀환과 성전건축에 있어 유대인들에게 매우 우호적인 정책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페르시아가 야웨 하나님을 잘 믿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자신들의 제국을 융합하는데 가장 효과적이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 제국은 크세르크세스의 죽음(주전 464년 경)이후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애굽 및 그리스의 반역으로 골머리를 앓게 되자 팔레스타인 지역의 소규모 식민지들인에게 매우 우호적으로 정책을 펼칩니다. 그 이유는 여차하면 그들을 일종의 [방패막이]로 삼아 군사적 대응을 펼칠 시간을 벌기 위함입니다. 이로 인해 결과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역, 특히 귀환된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유리한 정책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이는 페르시아가 유대인들을 자신들의 제국을 유지하는 도구로 삼은 것이지 그들 자체가 선하거나 인도주의적인 나라가 아니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귀환한 유대인들에게 초기 페르시아 제국의 정책이 자신들의 터전을 복구하는데 좋았다는 사실은 틀림없었습니다. 따라서 포로기 이후의 역사서 저자들에게 페르시아에 대한 우호적 시각이 깔릴 수 밖에 없었고 또한 그들을 괜히 자극하여 자신들의 일들이 틀어지게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3대 제국 가운데 유일하게 페르시아 제국만큼은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성경의 역사적 관점이 곧 세계사적 관점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본문을 살필 때에도 기계적인 적용보다는 이러한 부분들을 감안해서 읽어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사실 이러한 점 때문에 개인적으로 역사적 사관은 소위 신명기계 역사서들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자신들의 왕조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평가하는 그 서슬푸른 역사가들의 선뜻함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그래서 냉철한 역사의식 보다는 희망에 찬 미래를 말하고자 했던 그들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성경의 역사서술 방식이 모두 정론이라는 착각은 결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레스나 다리우스가 이사야, 에스라-느헤미야, 다니엘서에도 호의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제국의 침략자였고 다른 민족에게는 잔혹한 살인자였을 뿐입니다. 이것을 감안하고 성경의 본문을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성경해석의 바탕이 됩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동일합니다. 미국을, 이스라엘을 덮어놓고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라고 부르짖고 이들과 함께해야 한다고 강변하는 상당수의 목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역사관을 보면 통찰력 없는 한국교회의 역사의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한테 유리하면 하나님의 사람이고 불리하면 사탄이라는 어이없는 인식은 정경 안에서도 드러났던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마저도 시대와 역사의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성경은 결코 숨기지 않고 독자들에게 보여줍니다. 이것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앞에 늘 겸손하라는 무언의 경고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편적이고 치우친 개인의 관점을(특히 목회자들이)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양, 혹은 성경의 절대적인 기준인양 단언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것을 경계하고 극복하라고 성경은 두 역사서 그룹의 선명한 대조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글쓴이 권영진 목사는 정언향 교회를 섬기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