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무너지는 고통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
  • 황교진
  • 승인 2018.01.10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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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진의 사랑학 특강 1화
황교진
KBS 휴먼다큐 사미인곡 "어머니는 소풍중" 화면 ⓒKBS

19971127일 엄마가 의식을 잃은 날

통금이 있던 시절 엄마의 출근시간은 새벽 4시였다. 통금 해제가 된 19821월부터 그 출근시간은 점점 앞당겨졌다. 내가 중학생이던 1983년부터는 밤 10시면 일어나 동대문 광장시장에 나가셨다. 한 사람 겨우 들어가 앉을 만한 작은 공간에서 야간부터 새벽까지 숙녀복 도매상을 하셨다. 지금 밀리오레 같은 동대문 의류상들은 낮 시간, 밤 시간 교대하며 근무하지만, 어머니가 일하신 광장시장은 집안 살림부터 가게 일까지 슈퍼우먼처럼 감당하는 상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지방의 의류상들이 그 시간에 광장시장에서 도매로 물건을 띄어갔다. 어머니는 그분들을 상대로 새벽 장사를 하셨다. 아버지는 어머니 가게에 의류를 공급하는 작은 공장의 사장이었는데 형편은 그리 좋지 못했다. 80년대 중반부터 브랜드 파워가 있는 옷들이 시장을 장악하면서 우리 집처럼 시장 브랜드의 도매상은 매출이 급감했다. 어머니는 생활고를 붙드느라 매일 밤을 새워 일하시면서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도 아버지는 해외여행 자율화가 시행되기도 전에 조기축구회 동호회에서 유럽 여행, 일본 여행을 다녀오시기도 했다. 두 분은 너무 달랐다. 즐기고 누리는 분과 참고 삭이는 분, 나는 엄마의 고통에 아버지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버지 생각은 달랐다.

내 청소년기는 우울했다. 매일 밤 10시면 고단한 몸을 일으켜 삶에 기쁨과 보람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지친 얼굴로 생계를 위해 일하러 가시는 엄마의 얼굴을 마주하며 마음이 무거웠다. 아버지가 차로 어머니를 가게로 데려다주시지 못한 날은 택시를 타셔야 했는데 나는 어머니를 택시 승차까지 동행해 드리고 오면서 우울감이 깊었다. 어머니 낮과 밤이 다른 어머니들처럼 평범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었다. 여행도 좀 다니시고 쉬는 날은 마음껏 쉬게 해드리는 것이 내 기도제목이었다. 이 기도는 후일에 뜻밖의 모습으로 이뤄졌다. 내가 잘 돼 엄마의 저 고통을 끝나게 해드리고 싶었다. 오전에 가게 문을 닫으신 뒤에도 엄마는 바로 귀가하여 쉬지 못하셨다. 을지로의 백화점을 돌며 시장조사를 하며 다음 시즌의 디자인들을 눈여겨보았고, 집안 살림을 위해 장을 보고 집에 오시면 오후 시간이었다. 반찬과 국을 만들어두고 바로 잠드셔도 매일 4시간도 채 못 주무셨다. 불면증도 있으셔서 하루하루가 인내뿐인 삶이었다. 나는 초등학교부터 귀가하면 출근을 위해 잠시 주무시는 계신 어머니 모습을 봐왔다. 주말과 주일에 잠시 어머니를 대면할 수 있었다. 왠지 어머니 삶의 고통은 전부 내 탓인 것 같고 그 책임감에 일기를 쓰면서 달래는 조용한 모범생으로 학교를 다녔다. 부엌에서 창밖의 노을을 소녀의 얼굴로 바라보시던 엄마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뒷모습을 보며 다독였다.

 

KBS 휴먼다큐 사미인곡 "어머니는 소풍중" 화면 ⓒKBS

'내가 잘 돼야 해. 엄마가 편안하게 사시게 해야 해.'

빚쟁이들이 집에 찾아와 시달린 날도 종종 있었다. 다음 날이 시험이어서 공부를 하고 있는 날이었는데 그들이 집에 닥쳐 풍비박산으로 만들어 놓고 갔다. 어머니는 주무시지도 못하고 가게에 나가셨다. 나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든든하게 보호해 주지 못하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며 심리적으로는 내가 어머니의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실에서 나는 말이 없었다. 어쩌다 중고등학교 친구를 만나면 그들은 하루 종일 아무 말 없는 조용한 아이로 나를 기억한다. 어머니는 아주 힘든 날이면 안개꽃에 쌓인 프리지어 꽃을 사서 집에 오셨다. 그 꽃병이 엄마의 감성을 지켜준 유일한 친구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고덕동의 18평 주공아파트에 세를 얻어 할아버지, 할머니, 여동생과 함께 여섯 식구가 살았다. 어머니는 소리 내지 않으시고 시부모님, 시동생들까지 거두셨다. 수험생인 나를 다른 엄마들처럼 챙겨주지 못해 늘 미안하다고 하셨다.

내가 대학에 진학한 뒤 어머니 가게 매상이 오르기 시작했다. 군 복무 마치고 복학했을 때는 강변역 동서울터미널 부근의 우성아파트를 구입했다. 26평의 우리 집을 얻은 기쁨에 청소년기부터 불안정했던 나는 이런 평안이 실제일까 하는 의심이 들 만큼 불안 불안한 감정이 제자리를 찾는 듯했다. 여전히 어머니 출근은 밤 10시였다. 대학 4학년을 맞으면서 나는 학교 부근에 작업실 겸 자취방을 구해 졸업 작품에 몰두했다. 설계 과목 학점 따기가 어려운 건축공학을 전공하며 4학년에 제출해야 할 졸업 작품과 학사논문을 잘 마치려면 시간을 아껴야 했다. 선교단체 동아리 IVF 활동에 의미를 둔 대학 생활에서 공부할 시간이 부족했던 나는 아쉬움을 보충하려는 마음으로 4학년 때 집중한 학업에서 좋은 결실을 맺었다. 졸업 작품은 공학 전공자들의 경연대회인 형남과학상에서 대상을 받았고, 학점도 좋았다. 종합 평균점이 대학원 특차 입학의 커트라인을 넘었기에 졸업 후 대학원에서 더 공부하기로 했다. 경제활동을 좀 늦추더라도 어머니를 쉬게 해드리려면 전공 공부를 더 깊이 하는 쪽이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였다.

문제는 내가 집을 비운 1997년에 벌어지고 있었다. 고단한 생활을 20년 넘게 해온 어머니 몸에 이상 징후가 있었는데 우리 가족은 아무도 큰일이 일어날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당시 내가 공부에 열을 올리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아들이 유학을 원하면 보내줄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쉬지 않고 가게 일을 하시면서 계를 드셨다고 한다. 아들이 고등학교 때 등록금을 제대로 내지 못하고 보충수업비 납부와 교재를 사야 하는데 말도 꺼내지 못하며 3수를 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어머니 마음에 묵직한 짐으로 놓여 있었다. 나는 유학은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이제라도 아들이 원하는 무엇이든 뒷바라지를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해에는 유독 두통이 심하셨다. 몸에 문제가 생겨도 병원보다는 약국 약에 의지하던 어머니의 수많은 약봉지가 한참 후에 화장대 서랍에서 발견되었다. 문제는 차곡차곡 납입한 계모임에서 어머니가 수익을 얻을 차례에 계주가 사라지면서 벌어졌다. 그렇게 고생하여 버신 돈으로 기대한 계가 깨진 데 대한 극심한 충격과 스트레스로 며칠을 잠을 못 주무시고 심한 두통과 구토를 일으켰다(두통과 구토가 함께 오면 반드시 응급실로 가야 한다. 뇌출혈이 시작된, 이상 조짐이기 때문이다). 나는 무지했다. 건강에 대한 정보도 없었고, 기도하면 지나가는 단순한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받은 그 고통의 내용도 뒤늦게 알았다. 두 번째 구토를 일으킨 날도 어머니는 제시간에 가게로 출근하셨다. 그때 가족 중에 아무도 어머니를 빨리 병원으로 모시지 못한 사실이 장남인 내게 죄책감으로 몰려왔다. 나는 대학원 진학과 교제한 지 두 달쯤 된 연애로 하루하루가 설레던 날이었다.

어머님께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IMF가 터진 지 6일이 지난 1127일 새벽이었다. 광장시장 가게 문을 열고 잠시 뒤 어머니는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으셨다고 한다. 주변의 상인이 발견하고 어머니를 깨웠을 때 어머니는 의식이 돌아오셨다. 몸이 심각한 것을 직감하시고 20여 년 간 한 번도 하지 않으신 행동을 했다. 처음으로 가게 문을 닫으시고 을지로 백병원으로 가셨다. 응급실에 걸어 들어가셔서 혈압 측정 중에 큰 쇼크를 일으키며 의식을 잃으셨다. 나는 그날 졸업시험 두어 개를 남겨두고 대학원 실험실에 자리를 잡고 선배 실험을 돕다가 11시쯤 귀가한 상태에서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가 빨리 백병원으로 오라는 전화에 택시를 잡아 달려가면서 마음이 크게 불안하지는 않았다. 우리 네 식구 중에 어머니와 나만 신앙생활을 해오고 있었다. 명성교회 집사인 어머니는 수면 시간을 쪼개어 구역예배에 참석하고 절실하게 기도하며 주일성수를 지키셨다. 나는 대학생 선교단체 활동을 전공 공부보다 열심히 해왔다. 기도하면 지켜주시리라 믿었다.

그러나 백병원 응급실에서 마주한 어머니의 모습은 경악과 충격 자체였다. 좁은 응급실 침대에서 온 몸이 무서울 만큼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고, 남자 간호사 한 명이 어머니 입에 수동식 인공호흡기인 앰부를 눌러가며 호흡을 돕고 있었다. 당장 응급조치를 하지 않으면 이 순간이 이별일지 모른다는 다급한 생각이 들었다. 당시 응급실 분위기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촌각을 다투는 위급한 어머니 외에도 응급 환자들이 몇 분 계셨는데 의사 선생님은 한 분도 보이지 않았다. 전화기를 계속 돌리던 간호사는 짜증이 가득 오른 목소리로 좀 기다려 보라고 소리를 쳤다. 마냥 기다릴 수가 없었다. 내가 병원에 도착한 지 30분이 지나도 의사는 보이지 않았다. 골든타임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서 119에 전화를 했다. 응급실로 와달라는 요청에 의아해하던 119는 빨리 환자를 이송해야 한다는 절박한 외침에 와주었다. 앰부를 누르던 남자 간호사와 함께 어머니를 119에 태우고 빨리 가까운 큰 병원으로 가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119 기사는 부근의 서울대 병원이나 세브란스 병원으로 가지 않고 좀 떨어진 왕십리의 한양대 병원으로 갔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일일이 확인하고 목적지를 외칠 경황이 없던 터라 한양대 병원 응급실에서 빨리 조치해 주기만을 바랐다. 하나님께 절박하게 기도하고 울음을 참았지만 꺽꺽거리며 절규하는 통곡이 튀어나왔다. 한양대 병원 응급의가 어머니를 진찰하기 시작했다. 구원자를 드디어 만났다는 조금의 안심은 금세 무너졌다. 지금 어머니는 사망하실 것 같고 현재 병원에서 급하게 수술할 준비를 할 수 없어 구의동 병원으로 가보라는 소견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있을까.

병원이 있는 구의동까지 멀지는 않았지만 발병 후 중대한 골든타임은 그렇게 무너지고 있었다. 대학병원보다는 규모가 작은 병원에서 급하게 신경외과 선생님을 호출했다. 무시무시한 내용의 수술동의서를 쓰고 어머니 머리카락을 깎아내는 장면을 목도했다. 별일 없을 거라 믿고 기도하며 택시 타고 달려온 지난밤부터 이 새벽까지 가까스로 참았던 울음이 폭발했다. 분노와 답답함,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배신감, 청소년기 때부터 기도해 온 소망이 땅에 떨어져 버린 착잡함, 내가 아는 하나님과 다른 모습의 현실을 마주할 때의 고립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수술실 문 앞에서 간절히 기도했다. 이런 복잡한 마음으로 의지할 분은 하나님뿐이었다. 화도 나고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앞에 극도로 고통이 밀려왔지만 기도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벼랑 끝에서 내 영혼은 이미 떨어져 가고 있었다. 그래도 추락하면서 지푸라기라도 손에 걸려 이 추락이 꿈이기를,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도했다.

3시간쯤 후 수술실 문이 열리고 머리를 붕대로 감고, 목에는 기관 절제하고 삽관한 호스가 끼워진 상태로 상상하지 못한 중환자가 된 어머니를 마주했다. 아직도 현실이 아닌 것 같다.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지 못한 생태로 훅 들어온 그 모습에 침착하려 해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억지로 마음을 다잡고 "엄마, 엄마"라는 외침만 터졌다. 수술 후 어머니 침대는 중환자실로 이동했다. 철문이 닫히고 면회 시간까지 기다려 달라는 안내를 받았다. 수술을 집도하신 선생님은 "수술은 잘 됐으니 기다려 보라"는 말씀을 하고 가셨다. 그 기다림이 20년이나 이어졌다. 식물 상태라는 어마어마한 중환자가 된 어머니와 함께한 20년의 기다림은 내 청춘과 인생 전반을 바꾸어 놓았다.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고민보다 어머니의 생명을 보존하고 그 심한 고통을 덜어드리는 힘과 지혜를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바로 넘어왔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우리 어머니여야 할까? 난 왜 의대생이 아니고 공대생일까? 도대체 내 삶의 과정은 왜 이렇게 뒤죽박죽이 됐을까? ‘.. .. 질문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글쓴이 황교진은, 출판편집인이자 <어머니는 소풍 중>의 저자이며 강연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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