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써야 한다
뭐라도 써야 한다
  • 강현아
  • 승인 2018.01.10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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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에 관하여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

'뭐라도 써야지' 하는 마음과 '생각나는 대로 쓰지는 말자'는 마음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어렵다. 어느 날은 아무 것도 쓸 에너지가 없다가, 어떤 날은 하고 싶은 말이 넘쳐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다. 단편적인 아포리아라도 생각난 걸 써두지 않으면 하루 종일 그 문장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고 속 시끄럽게 한다. 12회 포스팅을 넘지 않으려고 제법 애써왔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안 볼 사람들은 안 볼 테니, 앞으로는 마구잡이로 쓰려 한다. 쓰다 보면 맘에 드는 문장이 한두 개 쯤 나오지 않을까. 아무 것도 안 쓰느니 뭐라도 쓰는 게 낫다. 온라인 밖에서 얼굴 보면 괜히 안 해도 될 핀잔주지 마시고, 신경 꺼놓거나 팔로우를 취소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한 사람의 언어생활과 의식(혹은 무의식)은 곧장 직결되어 있다. 필터에서 아무리 거른다 해도 불쑥 튀어 나온다. 가령 비아냥거리는 말투는 그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비겁한 행동이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사태를 내면으로 가져와 성찰부터 하는 게 반사적인 처신이었는데, 이제는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불쾌/불편하다는 말의 순화된 표현은 무엇일까. 상대방이 표정을 못 읽을 때 감정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상대방이 당황하도록 만드는 내 의도적인 행동도 좀 쪼잔한 태도다. 정당방위인 듯 말해놓고 먼저 움찔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태도만큼 정치적인 행위는 없다. '모든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자 하는 건 결국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뜻'이라던 철학자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61)의 말을 이제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마음은 애초에 없지만, 무의식적으로 보편이라는 윤리적 기제가 먼저 작동한다. 그저 신념대로 살아가는 용기 있는 인간이 되고 싶다가, 애초에 신념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이 정도의 행동 밖에 못 취하는 건 아닌 지 반성하게 된다.

 

글쓴이 강현아는,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전공한 후 정부기관에서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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