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학]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으로
[장동학]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으로
  • 장동학
  • 승인 2017.12.31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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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사랑- 선을 행하는 방법 - 눅 10:25-37
하늘꿈연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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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는 내년도 선교적 교회의 삶을 사는 것을 방향으로 잡고 있다. 우리는 복음을 만났다. 우리는 복음하나면 충분하다.”는 고백을 한다. 그런데 말로만 고백을 한다. 따라서 복음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러다가 우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만났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사랑과 선을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2018년도에 표어가 된 것이다.

다 같이 해보자. “ 사랑과 선을 목적으로이다. 오늘 오전 예배 때에는 1차로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였다. 그 하나님 사랑에 대해 실망하게 되는 이유를 살펴보았다. 그것이 무엇이었는가? 1)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2) 자기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니까 하나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3) 인내하지 못하니까 하나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을 알아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 사랑을 받고 고백하고 나서 행할 일이 무엇인가? 바로 선을 행하는 것이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송구 영신예배 때는 선을 행하는 것에 대해 말씀을 전할 것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율법학자와 토론을 하고 계셨다. 율법학자는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물어본다. 그러자 예수님이 역으로 물어본다. 그러자 그가 대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그렇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목적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 율법학자는 다른 궁금증을 질문을 한다. 그게 무엇이었는가?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여하튼 이 사람의 질문이 옳다. 우리가 궁금한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는데 이웃을 모르는 것이다. 정말 여러분은 이웃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내 이웃이 누구인가? 이웃을 사랑해야 되는데 그 이웃이 누군지 아는 것이 우선이라고 할 수 있다예수님은 이웃이 누구인지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로 말씀하신다. 오늘 말씀을 통해 게 2가지를 말씀을 만날 수 있다. 첫째 왜 우리가 이웃에게 선을 베풀어야 할까? 둘째 도대체 우리의 이웃은 누구일까?

 

조성진 인터뷰 jtbc (2017.01.28)
조성진 인터뷰 jtbc (2017.01.28) ⓒjtbc

첫째, 우리가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성진이라는 친구를 아는가? 21세 때 폴란드 국제 쇼핑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였다. 그때 일본 기자들 중심으로 폴란드 대사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하였다. 인터뷰한 내용이 정말 너무나 어른스럽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유명해지는 것은 황홀한 일이지만 저에게는 탁월한 음악가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일본기자:: 음악을 공부하는 다른 이들에게 조언을 해 달라.
조성진 :“10년 후에는 내가 뭐라고 충고를 해줄 수 있겠지만 나도 아직 불안정한 상황이라서 감히 충고나 조언을 하기 에는 이르다.“
일본 기자 : :프랑스 심사위원이 자신에게 최저점인 1점을 준 것에 대해서?

조성진 :“모든 사람은 다른의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비판할 수 없다.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이나 더 좋은 것을 우리는 알 수 없다. 맞는 말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판단하거나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준다. ? 예수님께서 계명 중에 큰 계명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2: 36-40,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렇다. 왜 우리가 이웃 사랑의 선을 행해야 할까? 예수님께서 가장 큰 계명임을 말씀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계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을 성경은 긍정과 부정으로 나누고 있다. ‘하라하지 말라라고 하는 것이다. 십계명도 마찬가지이다. 도적질 하지 말라고 한다. 살인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할 때 죄라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하지 말라는 말씀에 집중을 한다. 그런데 하라에 대한 말씀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라는 것을 하지 않았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웃 사랑하는 것을 큰 계명으로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 어떤가? 이웃 사랑을 하지 않으면 죄일까? 아닐까?

플로센뷔르크 수용소(Flossenbürg concentration camp
플로센뷔르크 수용소(Flossenbürg concentration camp

독일 히틀러 시대에 1906년에 태어난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45)라는 유명한 목사가 있었다. 당시에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히틀러를 옹호했다. 그런데 본회퍼는 고백교회 운동을 일으키면서 나찌를 대항한다. 결국 1945년 4월에 플로센뷔르크 수용소(Flossenbürg concentration camp)에서 39세에 처형을 당한다. 본회퍼가 당시 독일 교회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한 것은 값싼 은혜이었다. 그는 이렇게 값싼 은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다. 값싼 은혜는 자기 자신에게 경배하는 것이다. 값싼 은혜는 회개를 요구하지 않은 채 용서만을 선포하는 은혜이요. 교회의 치리를 받지 않으면 세례를 주는 것이며, 고백 없이 성찬을 베푸는 것이다. 값싼 은혜는 제자도가 없는 은혜요, 십자가가 없는 은혜이며, 살아계시고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이다. 우리는 너무 이기적이다. 신앙생활도 너무 이기적이다. 리는 정의를 알고 있다. 올바른 삶을 알고 있다. 그런데 자기밖에 모른다. 자기 편리하게 예수를 믿는다. 입으로는 찬양을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은혜라고 한다. 그런데 선을 행하지 않는다. 주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고 있다.

우리가 선을 알고 있다. 옳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옳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죄일까? 야고보서 4:17절을 보라.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그렇다.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선택 사항이 아니다. 복음을 만난 사람들은 당연히 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대로 은혜가운데 이웃 사랑의 선을 행하는 귀한 지체들이 되길 바란다.

 

mbc 뉴스 화면
mbc 뉴스(2000.04.19) 화면 ⓒmbc

둘째, 그렇다면 우리의 이웃은 도대체 누구일까? 올해 기독교 단체에서 목회자 중에 제일 존경 받는 분 중에 한경직 목사님이 뽑혔다. 제가 알고 있는 분은 한경직 목사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다. 한 목사님의 성품이나 습관이나 버릇이나 음식이나 사모님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고 있다. 한 목사님을 닮으려고 애를 쓰시는 모습이다. 그래서 그 목사님에게 여쭈어 보았다. “목사님은 한 목사님을 아시는 것 같은데 한 목사님은 목사님을 아세요?” 그랬더니 아니요. 전혀 한 목사님은 전혀 저를 모르세요.” 그래서 함께 웃은 적이 있다. 사실 우리가 기준만 바꾸어도 틀리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이웃관도 마찬가지이다. 내 기준으로 이웃을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기준은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이웃이다. 나와 연결된 사람이 이웃에 대한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웃에 대한 관점을 바꾸신 분이 우리 주님이셨다. 우리 주님은 누가 이웃이라고 하는 것인가? 강도 만난 사람이라고 하셨다. 이웃의 정의가 강도 만난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웃에 대한 정의를 시험의 중심으로 본다. 예수님의 정신으로 이웃임을 인정해보는 지 확인해보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말하는 이웃의 개념은 무엇일까요? 내게 이익과 기쁨을 주는 사람만을 말하지 않는다.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이웃이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해 보자.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다 이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이웃이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나 교인들이 이웃 대상이 될 수 있다. 이웃은 장소적 개념이 아니다. 강도 만난 사람과 같이 정말 도움이 필요하거나 사랑으로 안아주어야 할 사람이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웃 종류들을 말씀하고 있다.

1. 강도 같은 이웃이 있다. 이웃이 강도이다. 만나면 아프게 하고 공격을 한다.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 만날수록 힘든 사람이 있다. 잘 난체한다. 자기만 알고 이기적이다. 돈을 쓸 줄 모른다. 예전에 교회를 잘 나오던 남자 성도가 있다. 지금은 나오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지만 한 부부가 너무 얄밉다는 것이다. 어디 부부끼리 놀러가면 회비를 내야 하는데 머리를 쓴다는 것이다. 저녁 늦게 도착을 해서 회비를 내지 않고 지내고 간다는 것이다. 정말 얄미워서 그런 사람이 교인이라면 나오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강도 같은 이웃일 수 있다.

2. 강도 만난 이웃이 있다. 강도만난 이웃은 어떤 어려움을 당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냥 당혹하고 힘든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세상에 자기 혼자만 남아 있는 기분이다. 당황하고 두렵고 배신감에 빠져 있는 사람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위치나 신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강도를 만났다고 하는 상황이다. 저는 이 경험을 했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이때 강도 만난 사람에게 돌을 던지면 안 된다. 더 많은 상처를 받는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 이웃이 강도 만났는지 모른다. 그냥 지나간다. 레위인과 대제사장처럼 그렇다. 그런데 강도 만난 사람들은 정말 슬프고 고통스럽다. 지나가는 사람은 그냥 지나간다. 별로 잘못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강도 만난 이웃은 매우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3. 제사장이나 레위인 같은 이웃이 있다. 이들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두고 간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예배를 집례를 해야 한 사람이다. 혹시 제사 시간이 늦을 수 있다. 나실인들은 시체를 만지면 안 되었다. 정결법에 위배가 되는 것이다. 제가 처음 교육 전도사를 했던 곳이 신림4거리에 있는 교회이었다. 늘 주일 새벽에 일찍 가야 했다. 4거리가 건널목이 있어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이라 차들이 없으니 빨리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었다. 그러자 한 차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런데 그 뒤에 따라오던 차가 지나가는 줄 알고 더 속력을 냈다. 대형 교통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내가 목격자이다. 나만 있었다. 앞 차 운전자는 죽은 것 같았다. 그 사람을 끄집어내야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내게 떠오른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 ! 예배 늦는데 담임 목사님한테 늦었다고 혼나는데.... 중등부 설교해야 하는데... 양복에 피 붙이면 큰일 나는데... 경찰서에서 조서 쓰라고 왔다 갔다 하라고 하면 어쩌지?“ 걱정이 되었다.

이 본문을 보면 난 그때가 떠오른다. 이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예배드리러 가야 한다. 소도 사야 한다. 장가도 가야 한다. 세상일도 바쁘다. 가족끼리 놀러 가야 한다. 나도 돈이 없다. 나도 시간이 없다. 나 자신도 힘들어 죽겠다.“ 공감되는가? 이게 우리의 모습이다. 강도만난 사람은 죽어 가는데 우리는 우리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할 말이 많다. 할 말이 많은 우리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다.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에 우리가 핑계를 될 수 있는가?

4. 사마리아 사람 같은 이웃이 있다. 주님은 사마리아 이웃을 이야기 하신다. 사마리아 이웃을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사마리아 사람이다. 유대인들이 무시했던 사람이다. 유대인은 기분 나쁘다. 여행 중이다. 즐거운 시간을 낸 것이다. 강도만나는 것은 상상도 못한다. 그런데 강도만난 사람을 본다. 그리고 어떤가? 불쌍히 여겼다. 바로 사마리아 사람 같은 이웃에 대해서 진짜 이웃임을 말씀하셨다. 바로 사마리아 이웃은 상황과 환경은 힘들지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궁금하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무엇일까? 원어로 보면, 내장이 끊어지는 것과 같은 괴로운 심정을 가지고 아파하며 그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마음이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이웃으로 생각하고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다. 이 마음으로 우리가 이웃이 되었고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마태복음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태복음 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그렇다.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도 예수님의 마음이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다.

2018년에 우리교회는 이웃을 위해서 선을 목적으로 살 것이다. 그때 제일 중요한 것이 예수의 마음이요. 바로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이다. 이웃이 되려는 마음이다. 그래서 기도해야 한다. “이웃을 바라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옵소서.” 바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새해에는 가족, 교인, 세상의 이웃들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축복한다.

 

글쓴이 장동학 목사는 하늘꿈연동교회 담임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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