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득한 연결망 그러나 결핍된 관계망
가득한 연결망 그러나 결핍된 관계망
  • 이진호
  • 승인 2017.12.31 09: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다문화사회, 정보화시대라 불려도 정작 정보와 지식을 다루는, 필요한 관계를 만드는 것엔 미숙한 시대가 현 사회라고 생각된다. 연결망은 가득하지만 관계망이 부족한 현재. 많은 것을 얻는다고 생각되지만 실질적으로 중요한 지혜는 사라져가는 시대. 참된 존재와 세계는 사라져가고 허물만이 가득한 시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내용물이 아닌 포장으로 가득 찬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회의가 자꾸만 든다.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학문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학문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직업 때문이다. 한국에서 삶을 살아가며 직업을 찾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고단하고 힘들다.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직업으로서의 학문>(2006, 원서 Science as a Vocation, 1919)을 살펴보면 직업에 있어 찾아오는 지점, 즉 어렵고 힘들고 끈질기게 붙잡고, 체면이 구겨져도 그 안에서 행복과 향유를 누리면서 삶을 개진하는 직업의 정의가 한국사회에선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어릴 때부터 직업에 귀천이 있다는 것을 교육받고, 명예와 돈이라는 가치 판단 아래에 구별되고 소모되는 것을 느껴왔던 삶 속에서 직업이 갖고 있는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나타내며, 구체적으로 개진하고 나타내며 사/공익을 발화하는 것이 한국에선 불가능하다는 것이 자꾸만 든다. 한국에서 직업은 소유하기 위한 업이고 소유로 돈이나 명예, 체면과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작용하고 있다는 판단이 든다.

소유라는 것으로 업을 판단하니, 자연스레 연봉과 누구나 알만한 네임 밸류, 가치를 올려주는 브랜드 등의 외적가치에 시선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 적실한 삶을 위한 업으로의 작용은 불가하고 성공이라는 문법 하에 행복이 점쳐지며 타인과의 경쟁을 통해 관계는 깨지고, 그 위에 올라서서 의기양양한 자태를 뽐내는 것이 현재 한국에서 직업으로의 소명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사회를 살아가며 깨닫는다. 이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몸으로 강렬하게 와 닿으니 소망이 없다는 기분이 자꾸만 든다.

직업에 대한 무의식적 가르침 속에 또 다른 유령이 한국사회를 맴돌고 있는데, 이는 관계성이 끊어진 상태에서 맺어지는 학연과 지연, 혈연의 늪이다. 성공과 체면, 물질과 명예라는 문화적 코드 속에서 자연스레 위계질서가 생겨나고, 이는 밖에서 알 수 없는 튼실한 정보들을 공유하며, 나름대로의 연대와 의식을 이끈다. 알짜배기 정보들이 그 안에서 돌아다니고, 자료와 양식 정보들은 이러한 관계 속에 구성되고 진행되며, 그 안의 끈끈함과 자연스레 내재된 의식들이 결합되고 체험되어 느껴지는 불합리함이 이제는 만연해지기 시작했다.

불합리와 부조리를 느끼면 뭐하나. 더 나은 행복을 위해 공동체가, 국가가, 구성의 구성물인 개인의 의식이 변하지 않는 이 시대에서 민주주의 사회니 뭐니 인간이 가진 존엄성에 근거한 평등, 가치, 존재 등의 가치구현은 이미 죽은 지 오래다. 완벽하지 않는 인간들의 공동체는 결국 어느 한 쪽으로 쏠리기 마련이고, 이러한 쏠림을 방지하기 위한 법과 체계는 끊임없이 변하며 사회를 구성하지만 어느 순간 이러한 변화는 무능의 산실이 되어버렸고, 당연한 이치로 되어버렸다. 경쟁으로 얻는 소유가 모든 것을 결정되는 상황. 하지만 그 경쟁도 정확하지 않고, 기존에 형성된 논리를 따라 색안경을 끼고 형성되는 사회. 누구나 바뀌어야 한다고 느끼고 생각하지만 정작 바뀌지 않는 강력한 패러다임으로 굳어진 사회.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이러한 사회다.

암울한 사회 속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도 마찬가지의 모습이다. 새로운 삶, 사회, 공동체, 이상을 나타내야 할 그리고 삶의 양식으로 전복적이며 선의 이정표를 보여줘야 할 교회가 세상의 마이너들이 모이는 곳, 자기의 욕망들을 점치며 세상에 재기하기 위한 힘을 키우는 곳으로 변해버렸다. 기존의 문화를 다른 모습으로 답습하고 있으며, 또 다른 세계를 만들면서 도태되고 있는 곳이 교회 아닌가? 이러한 상황에서 신학생들은 안팎의 고통을 느낀다. 신학교에서 배우는 신학은 일상성을 잃은 배타적 상아탑을 구성하고, 각 업과 관련되지 않거나 사회와 현장과 결부된 신학만을 제공한다. 그나마 신학을 구현하고, 실존과 현존 속에서 몸부림치며 살려는 신학생들에게 요구받는 것 마녀사냥이단’ ‘자유주의라는 딱지다. 맞지 않다는 이유로 손가락질 받는 신학생들이 과연 그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 사회에서 가장 낮은 등급과 멸시를 받는 신학생들은 일상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들은 신학이라는 학문 아래 정작 배워야 할 것을 체화하지 못한다.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도 되지 않는 채 사회에서 원치 않는 스펙과 삶의 고통을 짊어지며 정작 사회를 변혁하는 행복과 삶, 이상을 현전하는 믿음과 사랑을 배우지 못한 채, 사회에 녹아들고 닮아간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니, 하나님 나라 운동이니 말은 많다만 정작 현실가능성, 현장, 일과 직업에 대한 커뮤니티와 리소스는 하나도 없는데 공허한 메아리만 외치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다. 제대로 정착되지 않는 가치결여된 프레임들 속에 고통 받는 건 순진하고 순수한 신학생들뿐이다. 신학생이라는 현장으로 컨텐츠를 소비하는 자들은 그걸로 삶을 살아가지만 정작 현장에서 살아가는 신학생들은 마이너 중 마이너로 몰리며 삶을 겁탈당한다.

직업소명설을 가르치면서, ‘만인사제설을 선언하면서 정작 이 개념들이 적용되는 범주는 교회라는 곳 하나뿐이다. 전문적인 신학교육이 되는, 그 영역을 현장에서 체화하고 서술하며 풀어내며 맛보는 일과는 관련 없고, 온전히 CCM이니, 교회니, 수련회에 힘쓴다. 사회가, 개인이, 아니 직업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없는 사람들이 그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너무나도 다른 사회의 치열함과 동떨어진 달리 말하면 일상이 없는 특수한 종교성에 매몰된 종교가 어떻게 참된 종교일 수 있을까? ‘일상적 형태로 이어지지 못한 종교적 경험의 신비적 형태는 다른 종류의 환상이나 환각들과 구분할 길이 없고, 또 그 자체가 무의미하다. 참된 종교는 일상을 바꾸고, 일상이 진리되게 만드는 즉, 삶을 진리되게 만드는 놀라운 힘을 가진다. 그런데 일상과 종교는 분리되고 종교가 가진 특별성은 그 자체 안에서 사회가 지닌 마이너들의 사회로써 작용하며 자기들을 위로한다.

신학교는 삶을 기반으로 교육하지 않고, 신학을 체화하지 않는다. 교회는 신학을 거부하고, 변화를 반기지 않는다. 새로운 삶과 메시아적 삶의 양식은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지만 그 새로움을 빨갱이로 정죄한다. 결국 남은 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공동체로의 힘을 모으지 못한 채 홀로 죽어간다. 교회는 그렇게 보편적인 힘을 사라지게 만들고, 교회라 불리지만 사회에 짓밟히는 사회의 징표로 나타난다. 삶의 토대를 갖지 않고, 변하지 않는 그 모습은 믿음 없는 교회. 맛을 잃은 소금이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아무것도 없는 사회, 커뮤니티도 없고 관계성도 단절되며, 그 관계도 결국 잘못되었다는 것을 언제야 인식할 수 있을까? 인식할 수는 있을까?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노자의 선포가 바로 이 하방연대의 이유다.“ 분명히 세상에는 평범한 99%가 더 많은데, 99%가 깨닫지 못하고 함께하지 못하며 1%를 들기 위해 삶을 살아간다. inner circle을 어떻게든 들어가려고 노력하며 각 존재와 관계를 짓밟고 욕하며 지랄했던 그것들을 배워간다.

신영복, 담론, 2015
신영복, 담론, 2015

날라리들은 학교 교육을 간파하고 있다.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면 계층 상승이 가능하다는 것이 허구임을 꿰뚫어 보고 있다.(중략) 그들은 저항의 대상으로 삼았던 그 사회의 노동력을 충원하는 집단으로 전락된다. 기존 체제의 위선에 대한 저항이 그 사회를 개혁하는 동력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대 그 체제의 효과적인 작동에 봉사하게 되는 역설이 사회에 만연하다.

신영복 선생님의 <담론>(2015)에 나오는 한 꼭지다. 나는 정말 이 사회가 변했으면 좋겠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 교회. 문화. 이념. 이해. 삶이 정말 바뀌었으면 좋겠다. 거기에 기반이 기독교 신앙이고 그 신앙 아래 하나님 나라가 현전했으면 좋겠다. 여기서 매번 느끼는 것은 하나다. 더욱 나를 깊이 성찰하는 것. 그리고 그 성찰 끝에 연대하고, 함께하며 사회를 개혁하는 동력으로 성장하는 것.

아직 나는 성장치 못했다. 그나마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양질의 정보도 얻고, 의식도 생겼지만 그럼에도 아직 부족하다.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깨어진 관계성, 문화, 행복을 바꾸기 위해선 나부터 바꿔야한다. 분명히 나부터 바꿔야한다. 그리고 함께 할 사람들을 찾아야 아니 관계를 맺고 그 안에 신실해야한다. 그 사람과 함께 행복을 꾸려가야 한다.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니다. 내가 먹고 살 최소한의 행복. 존재 자체에서 발화하는 행복을 위한 삶의 양식을 만들어가야 한다. 물론 얼마나 힘들고 엿같을 지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은 선택할 수 있기에, 그리고 그 선택 너머에 신비가 있고, 신 즉, 존재이자 하나님이 있기에 걸을 수 있다고 믿는다.

 

글쓴이 이진호는, 일상과 문화에 관심이 많으며, 일상 가운데 교회가 되고 싶고 교회로 살고 싶은 강한 열망으로 살아가는 청년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