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나’로 표현하고, 개인을 발화하게 만드는 비평은?
온전히 ‘나’로 표현하고, 개인을 발화하게 만드는 비평은?
  • 이진호
  • 승인 2017.12.28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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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 매슈 보몬트. 비평가의 임무. 민음사. 2015
이원석. 서평 쓰는 법 독서의 완성, 유유, 2016

 

한국사회는 개인의 표현을 반기지 않는다. 한국 사회 다수의 사람은 각 개인이 지니고 있는 맥락과 특별함, 의도와 담론은 무시한 채, 떠돌아다니고 있는 유령화된 범주 속에 집어넣고, 정의되지 않은 진영논리로 이해하거나, 존재에 대한 사유와 느낌에 대해서 일말의 존중을 하지 않은 채, 그가 가진 사회적, 정치적 입장이나 정확하지 않은 사실의 파편들로 펼치는 망상인 근거 없는 생각, 개체와 타자의 얼굴을 인식하고 보지 않고 물건으로 혹은 상품으로 인식하는 주체-객체의 이분법적 사고로 상대방을 소유하려 드는 것이 한국사회 속에 강하게 작용하는 힘의 논리이자 심성이다.

개인의 탄생을 기다리는 현 사회에서 비평은 그 역할을 잃어버렸다. 조선 최고의 실학자이자 역사상 최고의 지성이라 불리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그의 제자들과 아들에게 한 삶과 공부에 대한 조언을 보면 무엇을‘, ‘어떻게’, ‘라는 질문으로 갈래를 나누고 이에 따라 분류와 범주화를 진행한 후에 기존의 자료와 비교-대조하며 의문을 던지고, 근거를 흔들어 따져가며 당대의 지식을 평가하여 혼재한 것들을 단순하게 만들고 갈래를 나누는 것을 애민사상이라는 목적과 현장 안에 새롭게 전유해야 함을 동시에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과 대화와 논쟁으로 부족함을 보고, 입체적으로 사유하며 수긍하고 반박하며 삼인행필유아사언(三人行, 必有我師焉)의 마음으로 의 의견을 만들 것을 가르쳤다. 그의 가르침은 저서 여러 군데 등장하며 사회에 빛을 발했는데, 사상에 기반이 된 경전에 대한 여러 해설을 새롭게 정리하고, 혼재한 역사 서술에 대한 엄밀한 분석하여 새로운 역사서를 집필하며, 의학에 관련한 실용서, 문명의 발전으로 진보된 농사와 축조에 관한 책 등등을 당대 삶의 시공간의 맥락에서, 사상적 지형도 안에서 새롭게 전유하고 현장에서 적용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포함한 백성의 삶을 주체적으로 영위하고 표현하며 각자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작용하고 있는 비평의 모습은 삶이 사라져버린 평가들로 즐비하고, 기존의 패러다임만 그대로 답습하며 정치 지형도만 유지하는 형태가 되어버렸다. 각 개인의 표현들을 이끌고, 사상의 범주를 개인과 사회, 세계적 맥락으로 나누며, 현장의 적용되는 토대로써 작용하지 않고 시민을 대상으로 두지 않는 정치적, 상업적 내용으로 소비되고 있다. 아카데믹이란 이름은 인간이 사라진 이론의 잔치로 전락해버렸고, 자기들만의 정치적 지형에 따른 기득권 유지가 되어버렸다. 일례로 책에 대한 평가 중 대부분이 주례사 비평, 인상 비평 등등이 즐비하며, 인맥을 유지하기 위한 혹은 자기의 이득을 이면에 숨겨두고 평하는 비평들이 즐비하다. 실질적으로 학계에서 자리하고 있는 지형도나 한국 상황에서의 전유, 자기 뜻으로써의 비판 등등이 부재하다. 모호하고 중의적인 언어로 평가되는 비평 중 시공간적, 사상적 지형 위에 세워주고 이를 통한 구현화의 토대가 된 비평들은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정작 전문가들의 비평다운 비평이 혹은 전문성은 부족하지만 그런데도 관심 있는 개인의 비평이 실리게 되면 많은 경우 기존의 기득권 혹은 진영논리로 그 맥락의 진위와 평가는 사라진 채 마녀사냥 하거나, 블랙리스트로 만드는 등 개인의 존재 자체를 삭제한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사회 속에서 비평의 본질은 어떻게 하면 살아날 수 있을까? 기득권과 그 반대급부로 형성된 꼰대 진영의 공격에서도 삶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며 무심코 닥쳐오는 앞날의 미래를 어떻게 준비하고, 대비하며 개인의 개화를 표출하는 비평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 비평을 하는 데 필요한 미덕은 무엇일까? 많은 내용이 범람하는 것 같지만 실상 제국주의적 논리 하에 권력 구조가 존재하고, 그 안에 객체로써 소비되는 시민들이 아닌 그 내용이 서로 간의 시너지를 일으키며 각자의 삶과 이상을 향한 느슨한 연대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테리 이글턴. 매슈 보몬트. 비평가의 임무. 민음사. 2015년
테리 이글턴. 매슈 보몬트. 비평가의 임무. 민음사. 2015년

이러한 질문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학비평가이자 마르크스 비평으로 유명한 테리 이글턴은 비평가의 임무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상태이다. 매 순간순간이 언제라도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좁은 문이라는 벤야민의 말이 문자 그대로 옳은 건 아니다. 그러나 진정 불시에 우리를 덮치는 것이야말로 미래가 곧잘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비평가의 임무를 사유하는 것, 그것은 도달한 미래 앞에서 우리가 무력해지지 않는 한 방법이다.”라고 정의한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위대한 비평가는 자신의 비평적 분석을 토대로 다른 이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비평가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것은 그가 무엇을 표상하는가이다. 그는 이것을 우리에게 말해야 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 비평은 이론의 핵심적인 개념과 가치관들이 언제나 그 이론이 탄생하게 되는 사회적, 역사적 배경과 그 이론이 수용되고 활용되는 정치적 맥락 속에서 바라봐야 하며, 정치적으로 소비되기에 어떤 목적과 방법으로 그리고 입장으로 비평을 개진해야 하는지, 그 개진이 얼마나 공적으로 유익을 받는지에 대해 고민해야 함을 말한다. 공적 유익이 저해되고, 방해받아 각 개인의 개화를 막는 비평과 이론, 대화야말로 그 이면을 감춘 채 조종하려고 드는 것인 제국주의적 사상이라고 그는 비판한다. 개인으로 비평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모순 내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것인데, 계급으로 분할된 사회가 만들어낸 이런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며, 그것은 계급 사회 자체의 폐지와 더불어서만 사라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동안 우리는 내용에 관련해서 말할 수 있는 우리의 불쾌한 특권과 죄의식의 위기 속에서 평가를 포기하는 것이 사실상 급진적 생각 전체를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회 질서의 손에 그것을 내주는 일이라는 인식 사이에서 있으므로, 이 사이에서 이전에 있던 맥락에서 인정할 것은 인정하면서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이 역사와 삶, 상황과 이론을 통합하여 개인의 의견을 개진하는 기반임을 설명한다.

<서평 쓰는 법>의 저자인 이원석 저자도 서평이란 것 자체가 요약감상에 기반을 둔 평가라고 말하는데, 이 평가에 있어 공시적, 통시적 맥락, 시공간적, 사상적 맥락 속에서 평해야 함을 말한다. 그런데 이에 있어 각 개인의 입장, 의견의 개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데, 공적인 유익을 위한 지극히 사적인 견해 표명이기 때문에 자기의 입장을 근간으로 한 정치적 행위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 자기가 가진 삶의 정황, 현장에 따른 감상과 이해의 논리적 개진이 공적인 유익을 미치게끔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것이 서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공적인 유익이 무엇일까? 결국, 각 개인의 의견을 존중하고, 존재를 긍정하는 것을 넘어 그 사람 자체가 판단하고 표명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아닌가?

이원석. 서평 쓰는 법 독서의 완성, 유유, 2016년
이원석. 서평 쓰는 법 독서의 완성, 유유, 2016년

근래에 일어난 비평에 관한 파놉티콘 행태를 봤다. 기존의 질서를 비판하며 새로이 질서를 만든다고 했지만 결국 또 다른 기득권과 정치적 행태로 결정적인 비평의 본질로 승화되지 못한 경우들이 허다하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으론 브라질의 교육학자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 1921~1997)<페다고지>(Pedagogy of the Oppressed, 1968, 한국어판은 1997)에서 지적한 것처럼 계몽된 약자가 약자를 위한 질서로써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닌 무의식적으로 배운 기득권의 관습을 계몽이라는 이름 아래 약자를 다스리는 또 다른 기득권으로 자리 잡은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다. 각자의 사적-공적인 입장, 개인과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 대한 이해와 행위에 대한 고찰 없이 내던져진 이득에 대한 자의식적 나르시시즘 아닌가? ‘넌 잘 모르잖아라는 자세가 함의된 고압적 행태 말이다. 그러니 말하고 표상하는 그 이면의 의도가 모든 사람에게 내재하여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나라에서 개인의 의견을 개진하고, 표상에 대한 자유를 용인하는 빌런적 존재, 단체가 필요하다. 그 단체가 부당한 것으로 까인다 하더라도 각 개인의 입장이 자연스레 표현되는 곳 말이다. 개인의 입장에서 느슨하게 범주가 형성되고 해체되며 각각의 여정 속에 만남과 헤어짐이 있는 법인데, 대안이란 이름을 걸고 선의라는 자의식 속에 무조건 단체옹호주의처럼 행하는 입장과 행태를 보면, 그게 어찌 되었든 각 개인의 표현이 개진되지 못하거나, 의사표명과 표상이 제어 하는 모습으로 변질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시대에 필요한 역할은 영화 <토르 : 라그나로크>(Thor: Ragnarok, 2017)에서 빌런(Villain)으로 인해 새롭게 갱신되어 시대에 맞는 신의 모습을 갖게 된 주인공들처럼 각 개인의 의견들이 관계 속에서 용인되고 포용 되는 경험 하에 각자의 정치적 맥락에 수많은 갈래와 유사한 범주로 섞여 들어가는 단체, 외부에서 봤을 땐, 하나로 묶이지 않는 서로 간의 싸움이 일어나고 시끄럽지만 빌런이라는 정체성의 개인과 단체가 필요한 것 아닐까? 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입장에 대해, 의견에 대해 다를지라도 분명한 건 우리는 다 같은 사람이고, 행복을 바란다는 것이다. 그 방법이 다 다를지라도 분명히 종전으로 걸어가다 보면 겹치는 부분이, 유사한 영역이, 생각의 변화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이 삶을 살아가는 순례자의 여정 아닌가? 서로 간의 대화와 평가가 없이 어떻게 성장과 성숙이 있을 수 있을까? 물론 그게 미덕 없는 윤리로 점쳐져서는 안 되며, 가치판단을 최대한 보류한 채, 자기의 입장과 표상을 전달해야 하지만 그런데도 현재의 입장으로 판단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리고 그 입장을 조심스럽게 나타내는 것이 기록하는 인간(Homo Scriptus)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미덕 아닐까? 각자가 삶을 개진하며 표현이 용인되고 개인이 탄생하여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것. 개인이 먼저 해야 할 그리고 사회가 먼저 키워내야 할 임무이자 삶의 미덕 아닐까?

 

글쓴이 이진호는, 일상과 문화에 관심이 많으며, 일상 가운데 교회가 되고 싶고 교회로 살고 싶은 강한 열망으로 살아가는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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