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은 틀렸다. 그럼 1919년은?
1948년은 틀렸다. 그럼 1919년은?
  • 심용환
  • 승인 2017.12.24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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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건국절 주장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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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문재인 대통령께서 친히 임시정부를 방문하셔서 사진을 찍었고 해외독립운동사 전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지원을 하겠다고 이야기까지 하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정권 교체나 지도자의 변화와 관련 없이 이제부터라도 적극적으로 해외 독립운동사 사적지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과 보존이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무엇보다 이번에 문재인 대통령이 난징대학살을 비롯하여 중국의 아픔에 관해 지적하고 공감한 것에 대해서는 가슴 깊이 다가옵니다. 사실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이야기하면서 중국의 근대사를 경히 여기거나 중국인들이 겪었던 역사적 아픔에 관하여 무지하거나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듣고 있으면 경악을 금할 수 없습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유일하게 인정해준 정부는 쑨원의 광둥정부였고 1940년대 충칭임시정부 역시 끝까지 지원해주고 공인까지 해준 정부 역시 장제스의 국민당정부였습니다. 한인사회주의자들이 중국공산당과 협력하면서 활동했던 것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겠죠. 일본이 징용, 징병, 위안부를 통해 조선 민중을 극한까지 괴롭혔듯 중국에 쳐들어가서 하얼빈에 731 생체실험소를 세웠고 난징대학살이라는 어마어마한 만행을 저질렀으며 위안부를 비롯한 각종 전쟁 범죄를 일으켰던 것 역시 일본 제국주의 시대라는 통합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부분이겠고요. 모쪼록 이번 방중에 관해 우리 모두가 여러모로 깊이 있게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다만 제가 굳이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1919년 건국절입니다. 그간 뉴 라이트에 의해 ‘1948년 건국절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이 수년간 횡횡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다행히도 이 문제는 국정교과서 문제가 마무리 되면서 어느 정도는 해결된 듯 보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반대 여파가 있습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을 건국절로 하자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의아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분격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일을 건국절로 할 수 없다는 주장은 저의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라 사실상 상식이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조선왕조에서 독립운동사로 정통성이 계승되었을 뿐입니다. 임시정부가 아니라 독립운동사 전체입니다. , 구한말 나라를 살려보겠다며 개화운동, 위정척사운동 그리고 의병항쟁, 애국계몽운동 등의 치열한 투쟁이 있었고 이 와중에 조선이 멸망을 합니다. 독립운동가들은 만주, 연해주, 상하이, 미주 등으로 흩어져서 독자적인 활동을 했으며 3.1운동을 계기로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모든 독립운동가 세력을 포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며 해방 때까지 독립운동세력의 대표성을 완전히 확보한 적도 없습니다. 정부수립 당시에 대통령 이승만의 선임을 두고 외무총장에 선임된 박용만 등이 일찍 사퇴를 했고, 임시정부 수립의 한 축인 대한국민의회 역시 이동휘 세력만 참여했을 뿐이지 나머지는 시작부터 반대를 했습니다. 신채호의 격렬한 반발은 너무나 유명할뿐더러 이동휘 역시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2년도 안된 1921년이 되면 사실상 임시정부에서 발을 빼게 됩니다. 너무나 혹독한 갈등으로 인해 1923년에는 국민대표회의가 열리지만 오히려 이를 통해 소수의 임정 고수파를 제외하고는 창조파, 개조파 모두 임시정부를 떠나면서 심각한 위기에 처하기도 합니다. 이후 임시정부 주역이었던 안창호가 오히려 민족유일당운동에 매진하면서 좌우합작을 주도하는 등 사실상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거까지 임시정부의 활동은 미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 후 1941년 충칭임시정부가 수립될 당시까지도 김구, 조소앙, 지청천, 김원봉 등의 갈등은 대단했고 통합된 이 후에도 장준하의 회고에 나오듯이 같은 광복군 내에서도 계파 갈등이 심했습니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면 끝이 없습니다. 만주 지역의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이 임시정부 산하기구 임을 선포했지만 실제로 지도를 받는 것이 아니라 표방을 했을 뿐이며 그렇지 않았던 단체들 역시 부지기수였습니다. 임시정부가 끝까지 버텨냈고 해방 직전에 적어도 중국 관내에서 민족주의 진영을 통합하며 사회주의 진영과의 연대까지 이루어냈다고 하는 사실은 깊은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 36년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사를 임시정부의 역사로 귀결시킬 수는 결코 없는 노릇입니다.

둘째, 사회주의 진영의 독립운동사를 배제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얼마 전 원로 역사학자이자 한국근대사 분과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신용하 선생께서 아주 위험한 발언을 하셨습니다. 요지는 ‘1919년부터 1948년까지 건국은 만들어간 과정이었다 인데 이런 식으로 보면 결국 1948년에 만들어진 대한민국이 한민족을 대표하는 유일한 국가가 돼버립니다. 그러면 북한은 어떻게 할 것이며 통일문제 어떻게 할 것입니까? 감정적으로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한민족, 남북통일같은 대명제는 우리 사회에서 단 한 번도 의심된 적이 없습니다. 유일하게 뉴라이트 진영에서 이 부분을 문제 삼았습니다. 왜냐면 그들의 입장에서야 붕괴론을 신봉했으니 북한 멸망 이 후 북한 지역을 점령한다 식으로 편하게 생각을 했고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헌법의 가치라든지 북한의 역사성같은 것은 아얘 고려조차 안 한 것이지요.

북한의 역사야 그렇다 치죠. 그렇다면 1920년대 이 후 본격화된 한인사회주의의 역사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대한민국 국민의 감정적인 문제 그리고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국가적 정체성의 문제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리 역사 속에 너무나 명확하게 자취를 갖춘 한인사회주의 독립운동의 역사는 어떻게 할 것이냔 말입니다. 중국공산당과 연대하여 싸운 무정, 김두봉 같은 연안파, 국내에서 치열하게 일제와 투쟁한 박헌영, 현준혁 등의 국내파의 역사는 지워버리면 그만일까요? 여운형이나 김규식 그리고 김원봉, 심지어 김구의 좌우합작 노력은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겠고요.

건국절이 없는 나라는 부지기수입니다. 중국의 경우 국가 기념일을 15년 전쟁, 즉 만주사변(1931)-중일전쟁(1937)으로 이어지는 기간의 투쟁에 초점을 맞추어서 만들어져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승전기념일, 즉 전승절 같은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제헌헌법도 그렇고 현행 헌법도 그렇고 ‘3.1기미독립정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제헌헌법과 현행헌법의 차이는 ‘4월 민주 혁명이 들어갔느냐의 차이가 가장 크구요. 이를 기반으로 4대 국경일(3.1,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을 만들었습니다. 유구한 역사를 강조하기 위해 개천절을 만들었고(사실 대종교가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고, 임시정부에서 개천절과 비슷한 어천절 행사를 했다는 것 역시 큰 영향이 되었죠.), 3.1절을 통해 독립운동사의 정통성을 부여했고, 광복 이 후 새로운 헌법에 기초한 민주 공화국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화통일과 세계평화를 지향한다는 것이 헌법에 반복적으로 기술되어 있고요.

제가 갑자기 임시정부의 고결함 혹은 정통성을 부정한다고 보면 곤란합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하더라도 역사를 과장되게 해석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역사왜곡의 과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입니다. 임시정부가 아닙니다. 독립운동사 안에 임시정부가 있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시점부터를 건국절로 지정한다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모호했고 하지만 다발적으로 치열했기 때문에 학교에서 흥선대원군부터 동학농민운동을 거쳐 의병운동까지 상술해 놓은 것입니다미래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남북통일이라는 보다 거대하고 원대한 꿈을 평화적으로 이루어낼 때 진정한 한민족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요? 국가가 특정 날짜를 지정하여 기념하는 것은 국가적 정체성 그리고 방향성까지 함께 고려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방향성이 1919년으로 꼭 찍혀져서 방향성이 상실되는 그런 모습을 기어코 보고 싶은 것입니까?

그리고 제발 부탁입니다. 역사학자, 역사교수, 역사 선생님들 침묵 좀 하지 마세요. 우리가 연구하고 가르치는 교과 교육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연구한 내용들이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왜 나누려고 하지 않습니까? 끼리끼리의 치열한 논쟁이 얼마나 무용한지는 뉴 라이트라는 광풍을 겪으면서 너무 명확해 졌다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제도에 안주하여 기껏 해봤자 비인기암기과목으로 돌아가는 것은 지난 추운 겨울 국정교과서 음모를 함께 맞서 싸워준 국민들에 대한 예의 또한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심지어 815일을 전승기념일로 하자는 주장도 있습니다. 정답을 가르치자는 것이 아니라 생산적인 논의를 주도하자는 겁니다. 그게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의 책임 아닌가요? 여하간 이상한 건국절주장, 결코 방치하지 않겠습니다. 잘못된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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