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주훈] 이 시대의 모든 마리아와 모든 엘리사벳을 기억하며
[최주훈] 이 시대의 모든 마리아와 모든 엘리사벳을 기억하며
  • 최주훈
  • 승인 2017.12.24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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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픈 이에게 가장 좋은 소식을 - 눅 1:26-38
레오나르도 다빈치, 수태고지(1472~75),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레오나르도 다빈치, 수태고지(1472~75),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누가복음 1장에는 두 명의 여자가 등장합니다엘리사벳은 희망을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어디를 가든 자기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눈빛, 자신을 두고 수군거리는 소리, 이 모든 게 이젠 생활의 일부가 되어 버렸고, 그냥 그렇게 평생 살다 갈 줄 알았습니다. 매번 사람들이 묻습니다. “애를 안 갖는 거야 아니면 안 생기는 거야?”묻는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오지만 언제나 심장에 바늘을 꽂는 것 같았습니다. 그 말 뒤엔 언제나 아이 못 낳는 여자라는 복선이 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젠 그 질문이 바뀌어 버렸죠. “애를 안 가졌던 거야 아니면 안 생겼던 거야?” 아이가 생기자마자 사람들의 질문은 이렇게 현재형에서 과거형으로 바뀌었을 뿐이지만, 여전히 불편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희망을 포기한 또 한 명의 여인이 있습니다. 마리아 역시 희망을 포기한 상태입니다. 어디를 가든 자기를 불쌍하게 바라보는 눈빛, 자기를 두고 수군거리는 소리, 이 모든 게 점점 커져갔고, 그 만큼 사람들 만나기가 무서워졌습니다. 사람들은 매번 이렇게 물어옵니다. “, 어쩌다 애를 가졌어? 앞으로 어쩌려고 그래?”그런 소릴 들을 때 마다 앞날이 두렵고 막막합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사람 모인 곳을 피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아픔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죠. 그 누구도 사정을 이해해주거나 공감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직 어린 소녀였기 때문에 미혼모라는 수군거림을 감당하기엔 벅찼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전한 소식은 이리도 가슴 아픈 미래의 예고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천사가 전하는 소식을 가만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아픈 소식만 전한 게 아닙니다. 천사는 마리아처럼 딱한 처지의 사촌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제껏 아이가 없던 엘리사벳 이야기는 가족들이 모일 때 마다 입방아거리였지요. 결혼한 지 오래되었던 엘리사벳과 사가랴에게 아이를 기대하는 가족은 이제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나이 들어갔고, ‘불임이라는 딱지를 안은 채 노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마리아 역시 사촌 엘리사벳을 그렇게만 알고 있었는데 천사는 아주 놀라운 소식을 전해 줍니다. 1:37,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라는 선언과 함께 엘리사벳이 이미 아이를 가진지 6개월이나 지났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마리아는 이게 사실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 곧장 달려갑니다. 거리상으론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지도상으로 약 120Km에 육박하는 거리입니다. 그 먼 길을 가는 동안 어떤 생각을 하며 걸어갔을까요? ‘설마 흰 머리 성성한 엘리사벳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의심이 가득했지만, 마리아 자신도 상상 못할 일이 자기 몸 안에 일어났다는 것을 알기에 한시라도 빨리 그걸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곳을 가는 동안 마리아 앞에 놓인 미래가 어떤 것인지 두렵기만 합니다. 어린 나이에 미혼모라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혀를 차는 소리, 수군거림. 앞으로 일어날 이런 모든 일들이 공포스레 덮쳐옵니다. 그런 두려움과 공포 가득한 길을 걸었고, 드디어 사촌 엘리사벳을 만나게 됩니다. 드디어 두 여인이 서로 마주 보고 섰습니다. 한 사람은 아직 소녀티 가득한 앳된 마리아이고, 또 한 사람은 얼굴에 주름 가득한 엘리사벳입니다. 엘리사벳은 사촌이지만 할머니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여기 두 사람은 방금 전까지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깊은 나락을 경험했지요. 한 사람은 결혼한 지 오래되었지만 아이를 갖지 못했는데, 이건 당시 문화에선 최악의 상황입니다. 다른 여인은 이와 정반대죠. 약혼은 했지만 제대로 따지면 아직 미혼입니다. 그런데 태중에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가 생겼습니다. 이 역시 당시 문화에선 최악입니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 한 사람은 평생 가슴 졸이던 모든 짐이 과거가 되어버렸고, 다른 한 사람은 또 다른 종류의 짐이 이제 막 시작되려는 찰나입니다. 이렇게 두 사람이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함께 있지만, 서로의 처지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두 사람이 서로 만나 처지를 확인했을 때, 방금 전까지 두 사람 모두에게 드리워 있던 어두운 그늘이 벗겨졌다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은 불임여성’, 다른 한 사람은 미혼모라는 딱지가 붙어 있고, 따가운 시선, 수군거림, 뒤에서 조용히 혀를 차는 소리가 주변을 깡패처럼 둘러 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선 자리에서, 서로의 모습을 통해 확인한 것이 있기 때문이었죠. 무엇입니까? 천사를 통해 전해진 말씀, 1:37,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하늘의 선언입니다. 그렇게 이 두 여인은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며 하나님의 역사 한 가운데 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교회가 바로 이런 것 아닐까요? 서로 다른 처지의 사람들이 만나 그리스도 안에서 쉼과 용기를 얻고 희망을 만들어 가는 모임, 그리고 서로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확인하고, 서로의 힘이 되는 만남. 이것이 바로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제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봅시다. 이 두 여인의 처지를 돌아보면, 이 만남은 단순한 두 사람의 만남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봅시다. 오래 전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역시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흰 머리가 성성할 때까지 아이가 생기지 않아 희망을 포기했던 여인입니다. 야곱을 두고 서로 갈등하던 친자매 라헬과 레아도 그렇지요. 사랑하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아 속을 까맣게 태웠던 라헬, 아이는 있지만 사랑 받지 못해 속을 쥐어짜던 레아, 모두 질곡의 인생을 걷던 여인들입니다. 기도의 어머니 한나도 마찬가지지요. 아이를 얻지 못해 갖은 수치와 모욕을 당했고, 끈질긴 기도 끝에 사무엘을 얻게 됩니다.

룻과 나오미의 관계도 떠오릅니다. 고향 이스라엘을 떠나 외국 땅으로 이주했지만 타향살이도 힘든데 그곳에서 남편과 아들이 모두 죽게 됩니다. 나오미에겐 모두 죽고 타향에서 얻은 외국인 며느리 둘 만 남게 됩니다. 그 중 오르바는 떠나고, 룻만 시어머니 나오미와 남게 됩니다. 룻은 젊고 나오미는 노인입니다. 이방 땅에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이 두 사람에겐 여전히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를 보면 참 놀랍습니다. 후에 룻은 위대한 왕 다윗의 선조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기 때문이죠.

이렇게 하나님은 비탄을 기쁨으로 바꾸는 일을 하십니다. 비탄에 빠진 이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주신 바로 그 하나님이, 오늘 본문의 엘리사벳과 마리아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희망이 절실한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의 모습을 보여주며 하나님의 능력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우리가 마리아의 찬가라고 부르는 노래를 힘차게 찬송하기 시작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여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나를 만세에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1:46-48)

그런데 여러분, 이 찬송은 저에게 마리아의 독창이 아니라 합창으로 들립니다. 마리아와 같은 처지에서 냉가슴을 앓았던 모든 여인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라헬, 레아, 나오미와 룻 그리고 엘리사벳. 지금 마리아의 목소리를 통해 이 모든 여인들이 그동안 가슴 깊이 품고 있던 한이 터져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들의 합창이 바로 마리아의 찬가가 아닐까요? 마리아라고 하면 보통 젊고 아름답고 지체 높은 귀부인을 연상하곤 합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고려해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지요. 마리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 나이는 어떠했는지는 지난 주 설교를 통해 잘 설명되었으니 생략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의 마리아는 단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늘 이 시대 환영 받지 못하는 미혼모이기도 하고, 아니면 아주 평범한 아이의 젊은 엄마이기도 합니다. 단칸방에, 아이 때문에 잠을 못 자 지친 얼굴, 어디라도 갈라치면 아기 보자기에 기저귀 가방, 분유통, 여분의 옷이 한가득 담긴 배낭이 몸에 붙어 있고, 또 한 손엔 힘겹게 유모차를 끌고, 아빠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그 옆 자리는 언제나 비어 있지요. 단칸방에서 이사를 가려면 아빠가 돈을 좀 더 벌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더 많은 시간을 회사에 나가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하고 젊은 엄마가 마리아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수태고지(1472~75),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벨기에 화가 Rogier van der Weyden(1400~1464), 수태고지(1440)

 

그렇게 본다면 엘리사벳 역시 우리 주위에서 흔히 만날 수 있습니다. 엘리사벳과 그의 남편 사가랴는 이미 직장에서 은퇴했기에 일감이 없습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식탁에 앉아 같은 쌀밥, 같은 반찬을 매일 마주 앉은 둘이서만 나눕니다. 평일엔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주말이나 되어야 가끔 자식들이 찾아와서 밥 한 끼 먹고 훌쩍 자리를 일어나곤 합니다. 식구들끼리라도 자주 만나고 싶지만 자식들이 모두 멀리 살고 이래저래 직장 때문에 그렇게 할 수 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루하고 건조하고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은퇴자금이 넉넉해서 누구처럼 해외여행이다 뭐다 하며 흥청망청 살만한 여유자금도 없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사실 우리의 대다수의 우울한 자화상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복음의 말씀은 바로 이런 이 시대의 모든 마리아와 모든 엘리사벳을 위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마리아와 모든 엘리사벳을 돌보십니다. 그 돌보심의 감격과 체험이 마리아의 힘찬 찬송 속에 묻어납니다. 그 노래 속엔 사라의 목소리가 담겨 있고, 레아와 라헬의 목소리, 한나와 외국 이주민 노동자였던 나오미와 룻의 서러운 한이, 그리고 하나님이 베푸신 그 감격이 담겨 있습니다. 누가복음 1:46이하에 나오는 마리아의 찬가를 한 구절씩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거기에는 2천 년 전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의 이야기, 내 이웃들의 서러운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찬가는 바로 그 서러운 사람, 억울한 사람, 외로운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노래합니다. 로완 윌리엄스라는 성공회 대주교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이 가장 좋은 것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성탄과 그 날의 복된 소식이 우리에게 가장 분명하게 전하는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로완 윌리엄스, <삶을 선택하라>, 민경찬/손승우 역(서울: 비아, 2017), 67.]

그의 말대로 하나님의 눈에는 가장 가난한 자가 가장 좋은 것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단순히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지칭하는 게 아닙니다. 마리아처럼, 엘리사벳처럼, 사라처럼, 라헬과 한나, 나오미와 룻처럼 냉가슴을 앓고, 마음이 상한 자가 가장 좋은 위로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가장 가난한 자, 가장 마음이 상한 자, 가장 극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이 가장 좋은 것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처한 비극의 심연을 살피시고 그 어두운 곳, 포기와 절망의 늪에서 당신의 능력을 흘러넘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라는 말의 뜻입니다. 값없이 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은혜는 가장 가난한 자, 가장 아픈 자, 가장 마음이 상한 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내일을 향한 용기입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성탄의 메시지입니다.

한 번 더 강조하고 설교를 끝내야겠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로 다른 처지의 사람들이 만나는 곳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가장 가난한 자, 가장 아픈 자, 가장 마음이 상한 자에게 위로와 평강이 주어지는 곳이 교회입니다. 거기엔 어떤 조건도 달리지 않습니다. 누구나 가난하고 아프고 상한 자라면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서로의 모습을 통해 확인하고 내일을 향한 용기를 얻고, 이 용기와 위로를 이웃에게 전할 책임을 기쁘게 나누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에선 마리아의 찬송 끊임없이 울립니다. 우리 한 목소리로 천천히 누가복음 1:47-55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여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 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는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 찬송의 울림과 고백이 성탄을 기다리는 저와 여러분의 일상에 가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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