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사람이 소망이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사람이 소망이다
  • 김상일
  • 승인 2017.12.24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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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othykell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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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1219, 최근까지도 미국 뉴욕의 리디머 장로교회를 담임하다가 그 자리에서 내려와 현재는 신학생 교육과 대중 강연 및 저서 집필에 전념하고 있는 티머시 켈러(Timothy Keller) 목사가 뉴요커(New Yorker) 저널에 미국의 복음주의는 과연 도날드 트럼프와 로이 무어를 넘어설 수 있는가? (Can Evangelicalism Survive Donald Trump and Roy Moore?) 라는 칼럼을 써서 반향을 일으켰다.

켈러가 그 칼럼에서 보여준 문제의식은, 미국의 대통령 도날드 트럼프 (Donald Trum)와 로이 무어 (Roy Moore) 상원 의원의 성추문과 인종비하적 행태가 별 스스럼없이 많은 목회자들과 기독교인들에게, 특히 자신들을 복음주의자라고 부르는 기독교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현대의 문화적 맥락 속에서, 과연 현대의 복음주의자들이 자신들을 복음주의로 칭하는 것이 일종의 인지 부조화를 불러일으키지는 않느냐는 것이다.

켈러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복음주의라는 말이 가진 도덕적 수월성에의 전통과 유산을 돌이켜 볼 때, 또한 복음주의가 지칭했던 그룹이 20세기 중후반까지만 해도 폐쇄적이고 전투적인 근본주의자들과는 다르게 좀 더 상식적이고, 지적인 대화에 참여할 줄 알며, 문화에 대해서 좀 더 유동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신앙적 갱생(renewal of the Christian faith)을 추구했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음을 고려할 때, 과연 현재 트럼프와 무어가 상징하는 복음주의가 이런 신앙 전통에 서고자 하는 사람들의 복음주의를 대변할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와 의구심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이런 회의와 의구심은 양식 있는 미국의 복음주의자들만의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전병욱과 오정현은 소위 복음주의 4인방(이동원, 옥한흠, 하용조, 홍정길)을 잇는 차세대 복음주의권의 지도자들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적어도 겉으로는. 하지만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병욱은 성추행을 일삼고도 아무런 반성과 회개의 기미도 없이 여전히 자신을 목회자라고 부르며 사역을 이어가고 있고, 오정현은 세월호 막말 파문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사랑의 교회를 국내 3위 교회라고 부르는, 아무리 봐도 전혀 복음주의적이지 않은 몰상식한 추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과 함께 복음주의 4인방의 열매 중 하나라고 불리는 박성수의 이랜드는 최근 아르바이트생들의 임금을 정당하게 지급하지 않은 것은 물론, 계약직, 정규직 임금 900억을 체불하고도 여전히 사내에서 기독교의 예배를 중요시하는 인지 부조화적인 행태를 일삼는다.

그 뿐인가. 김삼환의 명성 교회를 물려받은 그의 아들인 하나님은 미국의 드류 대학에서 미국 복음주의의 양심이라고 불리는 짐 월리스(Jim Wallis)와 그의 소저너스(Sojouners)에 관한 논문을 쓰고도, 또한 세습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공언하고서도 그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뒤집으며, 심지어 이 문제는 JTBC를 비롯한 여러 언론이 중대하게 다루는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게 되었다.

왜 복음주의권이 이렇게 된 것일까에 대한 분석은 이미 많이 나와 있다. 복음주의는 권력에 기생하는 주류 기독교의 대명사가 된 지 오래이다. 외형으로써의 세속 문화에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그 문화를 일으킨 돈에 대한 욕심과 세속적 태도에는 시나브로 젖어들었다. 2017년 현재, 한국이나 미국 양쪽 모두에서 복음주의는 문화적인 헤게모니를 점점 잃어가면서도 그러한 헤게모니를 놓치지 않고자 발악하고 있다는 것. 흔하디흔한 얘기들이다.

하지만 상황이 마냥 비관적이고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켈러는 여전히 희망이 있음을 역설한다. 비록 복음주의라는 명칭이 이제 점점 예전의 도덕적 수월성과 고결한 신앙 갱생을 추구하는 그룹을 가리키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말이 가진 함의가 죽어가고 있다고 해서, 그런 그룹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의 백인 복음주의는 죽어가고 있지만, 그 자리를 대신해서 여전히 같은 믿음을 고수하는, 또한 자신들을 딱히 복음주의자들로 칭하지는 않지만 같은 신앙 유산을 공유하는 다양한 신앙 그룹들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성장하고 있음을 가리키면서 켈러의 칼럼은 희망적으로 끝맺어진다. 과연 한국도 그러할까.

90년대 초중반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이후, 복음주의는 나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그 시절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여러 친구들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말이었다. 우리가 받아들였던 복음주의는 정치적으로 우파적인 성향을 담보하는 신앙 운동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좌파 지향적인 운동이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켈러가 말하듯이, 우리가 받아들인 복음주의 운동은 탈정치 성향적이면서도 사회 정의와 정치에 관한 관심을 놓지 않는 운동이었다. 그리고 그 근본적인 에너지는 복음이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가에 대한 깊은 탐구에서 시작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문화적으로 이미 널리 받아들여진 카테고리들을 무기력화시키고,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어내고 재조직화하는 능력이 복음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초대 기독교의 메시지와 삶에서 목격한 바이다. 지금도 복음에 집중하고 복음을 고민하고 탐구하는 여러 그룹들에서 목격하는 바이다. 복음주의가 복음을 독점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다!) 오히려 켈러가 말한 대로, 복음주의라는 말은 이제 그 유효기한을 다했을 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복음주의를 이끌었던 원동력이 되었던 복음의 메시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탐구는 여전히 복음을 고민하는 신앙 그룹들 가운데 새로운 원동력을 제공해주고 있다. 하여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복음을 듣고, 복음을 고민하며, 복음에 천착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들이라고 부르든 아니든 간에, 계속해서 복음주의가 남긴 그 유산을 이어나가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나 또한 켈러와 함께 한국 교회에도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말하고자 한다.

소망은 사람에게 있다. 무엇보다 복음을 듣고, 또 듣는 사람들,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사람들에게 있다 (17:11). 복음은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 이어갈 것이다. 그것이 복음주의라는 말이 용도 폐기 처분된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가 소망이 있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이다.

 

글쓴이 김상일 전도사는, 현재 보스턴대학교(BU)에서 실천신학 박사 과정 재학 중이며, LIKEELLUL 이라는 이름의 서평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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