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수많은 요셉들 덕분에 하느님나라가 이루어질 것
[곽건용] 수많은 요셉들 덕분에 하느님나라가 이루어질 것
  • 곽건용
  • 승인 2017.12.21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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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아버지 요셉 - 마태 1:18-25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존경하거나 사랑하게 되는 데는 대단한 이유가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인에게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많은 경우에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이라고 대답합니다. 물론 이 분들이 위대한 인물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분들을 존경한다는 데는 공감이 가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제가 그분들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분들을 책을 통해 알지만 만나본 적도 없고 실제로 친밀하게 알지 못합니다. 제게는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사랑하려면 그를 잘 아는 것이 필수적입니다존경이란 상당한 무게가 나가는 말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존경하려면 반드시 그가 대단한 철학이나 사상을 갖고 있어야 하지는 않습니다. 큰 업적을 이뤘거나 사람들의 귀감이 되는 삶을 살지 않았더라도 존경하게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작은 일 때문에도 누군가를 존경할 수 있습니다. 훌륭한 삶을 살았구나, 싶은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마음속에서 존경심이 우러나오는 법은 아니란 얘기입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을 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굿 윌 헌팅 (  )
굿 윌 헌팅 (1997년)

20대의 두 절친한 친구가 각본도 쓰고 주연도 해서 두 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쥔 <굿 윌 헌팅 Good Will Hunting>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영화 제목을 들었을 때 무슨 좋은(good) 의도를 갖고(will) 사냥을 한(hunting) 얘기인줄 알았습니다. ‘Will Hunting’이 주인공의 이름인줄 몰랐던 겁니다. 저는 언젠가 이 영화에 나오는 “It’s not your fault.”라는 대사가 준 감동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주인공 윌(Will)은 고아로서 양부모를 잘못 만나 성격이 많이 삐뚤어져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불행이 자기 탓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스스로에게도 남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MIT대학 청소부로 일하는 그는 정규교육은 못 받았지만 수학의 천재입니다. 그가 교수인 제리(Jerry)가 복도 칠판에 낸 문제를 몰래 풀어놓자 제리는 수소문 끝에 그를 찾아냅니다. 하지만 윌은 길거리에서 싸움을 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리는 판사에게 책임지고 윌을 돌보겠다고 약속하고 그를 감옥에서 꺼내서 친구이자 칼리지의 심리학 교수인 숀(Sean)에게 데려갑니다. 첫 만남에서 윌에서 마음의 상처가 있음을 알게 된 숀은 매주 그를 만납니다.

“It’s not your fault.”라는 대사는 이 만남의 마지막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하루는 숀이 병으로 죽은 자기 아내에 대해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녀는 자다가 방구를 뀌곤 했답니다. 어떤 때는 자기가 뀐 방구에 자기가 놀라서 잠에서 깨어나 , 네가 방구 꿨지?”라고 묻더랍니다. 제가 알기로는 사람이 잠을 자는 동안에는 괄약근이 항문을 막고 있기 때문에 방구를 안 꾸는데 좌우간 이들은 이런 대화를 하면서 배꼽을 잡고 웃곤 했답니다. 숀은 이런 모습들이 자기 아내라고 말합니다. 이런 작은 모습들이 바로 자기 아내이고 자기는 아내를 생각할 때마다 이런 소소한 모습들이 떠오른다고 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에피소드인데 이게 제 기억에는 깊이 남아 있네요. 이런 장면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게 만듭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제 스승인 안병무 선생님입니다. 안 선생님은 큰 업적을 남긴 대단한 학자이자 평생을 예수를 추구하고 연구하며 사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분을 존경하는 까닭은 그게 아닙니다. 제가 이분은 존경하는 것은 매우 소소한 이유 때문입니다. 어느 날 그분과 무슨 얘기를 하다가 별 얘기도 아닌데 그분 눈가에 이슬이 맺혀 있는 걸 봤습니다.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대단히 감동적인 얘기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때 , 이분은 이런 소소한 일에 눈물을 흘리는 분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몇 년 후에 제가 첫 아이를 낳았을 때 마침 선생님이 같은 병원에 입원하고 계셨습니다. 안 선생님은 건강이 좋지 않아 자주 입원하시곤 했습니다. 마침 그때 그랬던 겁니다. 저는 아기를 안고 선생님 병실로 올라갔습니다. 선생님은 반갑게 저를 맞으시더니 아기를 품에 안으셨습니다. 그러고는 잠시 아기를 물끄러미 쳐다보시더니 기도하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평소에 당신은 설교는 해도 기도는 할 줄 모르니 기도할 일이 있으면 늘 저를 시키곤 하셨는데 그 날은 기도를 자청하신 겁니다. 그 짧은 순간은 제가 그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경험해본 적 없는 거룩한 시간이었습니다. 제 아이를 위한 기도였기 때문은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진지하고 숭고한 기도를 그 전에도 그 후에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이 분을 존경하는 것은 이런 소소한 사건들 때문입니다.

 

요셉은 누구인가?

이집트 정교회(콥틱 ) 양식으로 그린 그림
이집트 정교회(콥틱 ) 양식으로 그린 그림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요셉은 가장 궁금한 사람입니다. 성서는 요셉에 대해서 거의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실제는 안 그랬겠지만 벙어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한 말이 한 마디도 전해지지 않으니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요셉은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천사의 말을 듣고 그가 하라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요셉은 탄생 이야기 외에는 작은 에피소드 하나도 전해지지 않고 무대에게 사라집니다. 그러니 그에 대해서 얘기할 내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궁금증은 더 커집니다. 안 그렇습니까요셉은 예수님의 아버지요 마리아의 남편입니다.물론 성서의 서술에 따르면 요셉은 생물학적으로 예수님과 무관합니다. 마리아가 요셉의 힘을 빌리지 않고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은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고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셨는데 이분을 그리스도라고 부른다.”(1:16)라고 전함으로써 예수님을 요셉의 족보에 포함시켰습니다. 둘이 무관하다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람들도 요셉이 누군지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기원후 4-5 세기경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누군가가 <목수 요셉의 역사 History of Joseph the Carpenter>(Historia Josephi Fabri Lignari)라는 문서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 이 책에는 요셉 얘기는 별로 없고 어린 시절의 예수에 대한 얘기를 주로 전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 문서를 읽어보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그렇게 잊히는 게 섭섭했던지 가톨릭교회와 정교회, 그리고 성공회교회에서는 그를 성인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가톨릭교회는 51일을 성 요셉의 날로 지키는데 그 날이 노동절이고 요셉이 노동자 목수였기 때문인가 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요셉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 게 거의 없지만 전해지는 단편적인 얘기를 토대로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그의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갈릴리에 요셉이란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목수였던 그는 동네 처녀 마리아와 약혼해서 결혼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약혼녀 마리아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자기와는 무관한 약혼녀의 혼전임신 때문에 그가 얼마나 고민을 했을지 우리는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의 관습대로라면 나의 아이도 아닌 남의 아이를 혼전임신 한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행동했어야 할까요? 그가 약혼녀의 부정을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녀를 아내로 맞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가 조용히 파혼하기로 작정한 걸 보면 그는 상당히 점잖은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와중에 천사가 그의 꿈에 나타나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부정한 짓을 해서 아기를 잉태한 게 아니라 아기는 성령으로 잉태됐고 그 아기는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할 구세주가 될 것이라면서 말입니다.

 

수많은 요셉들 덕분에 하느님나라가 이루어질 것

하지만 남의 아기를 혼전임신 한 여인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내로 맞는 일은 당시 관습에 비춰보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요셉 한 사람만 결심하면 해결되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잠시 손가락질 당하고 끝날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율법을 어긴 사람이 되어 집안에서 따돌림 당할 뿐 아니라 유대인의 종교의식에도 참여하지 못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사회에서 따돌림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런 사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아버지가 되어 그를 키웠습니다. 요셉이 마지막으로 등장한 때는 예수가 열두 살 되던 해 유월절에 성전에 올라갔다가 그를 잃어버렸을 때입니다. 절기가 끝나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예수가 없어졌습니다. 찾다가 못 찾아서 오던 길을 되짚어 예루살렘까지 돌아갔더니 예수가 성전에서 학자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 후로 요셉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는 요셉이 집을 떠나 갈릴리 사람들이 벌이던 반로마 저항운동에 참가했다가 죽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불가능한 추측은 아니지만 역사적 근거가 있는 시나리오도 아닙니다.

요셉을 영웅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를 성인의 반열에 올리는 게 옳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복음서를 비롯한 역사자료에 남아 있지 않아서 우리에게 전해지지는 않았지만 하느님나라 복음을 선포하고 실현하기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그래서 그들을 구체적으로 좋아하고 사랑하고 존경하기는 어렵지만 수많은 민초들이 하느님나라를 위해 예수님과 더불어 크고 작은 일들을 수행했음에 분명하다는 겁니다. 요셉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요셉이 자기 삶을 곤란하게 만들뿐 아니라 그에게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는 천사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이유는 구세주를 기다리는 그의 열망이, 구세주와 더불어 이루어내야 할 하느님나라에 대한 열정이 그만큼 컸기 때문입니다. 이런 열망을 품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조금씩 희생했고 조금씩 헌신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하느님나라 복음이 선포될 수 있었고 실천될 수 있었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마나 요셉은 이름이라도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이름도 남기지 않은 채 희생했습니다. 그들의 사랑과 희생과 헌신이 없었다면 예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한층 더 고되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같이 가는 이 없이 고독하게 홀로 가는 길은 더 힘든 법 아닙니까. 요셉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감수하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고 어린 예수를 키우고 성장시켰습니다. 비록 그의 행적은 별로 남아 있지 않지만 그의 사랑과 헌신과 희생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요셉을 비롯한 수많은 무명의 예수인에게 얻는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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