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찜 속 무소부재한 엄마의 임재
배찜 속 무소부재한 엄마의 임재
  • 강현아
  • 승인 2017.12.17 05: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 내겐 너무 선명한 신의 현현
강현아
ⓒ강현아

 

오늘, 밤길이 정말 추웠지. 귀가 아리게 시려 쫓기는 사람처럼 걸음이 빨라졌지만, 어째선지 집에 오는 길이 더 멀고 낯설기까지 했다. 모자를 챙기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종종걸음으로 돌아왔다.

이놈의 플루. 쉽게 잊혀 지지 않는 나쁜 기억처럼 징그럽게 달라붙어 나를 괴롭힌다. 조금 과장하면, 어제는 자다가 숨이 막혀 졸도할 뻔 했다. 폐병 앓는 식민지 룸펜의 일과처럼 마른 기침을 토해내며 밤새 잠을 뒤척였다. 산소가 부족했던지 아침에는 두통을 조금 앓다가 해가 저물고서야 일하러 갔다. 다행히 저녁에는 동지들의 얼굴을 잠시 보았고, 보약 한 사발 들이키듯 내 몫의 만두전골을 뚝딱 비웠다. 오늘 같은 한파에도 내수동 평안도만두집은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다.

한밤 중에 돌아와, 지난 번 엄마께서 우편으로 보내주신 마지막 남은 배 하나를 꺼내 배숙을 했다. 역시나 함께 만들어 보내신 꿀에 저린 생강차와 동봉한 그녀의 죽마지우께서 보내주신 토종꿀도 한 스푼 넣었다. 기관지에 이것만큼 좋은 걸 아직 알지 못한다.

뜨끈하고 몰캉한 배 찜을 한 입 떠먹으며 무소부재한 엄마의 임재를 느낀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드셨다는 저 유명한 유대 속담이 떠오를 수밖에. 수저로 한 번 뜰 때마다 자궁 속처럼 움푹 패여 가는 배 속을 들여다보며 나는 무소부재한 신의 침묵을 묵상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 나는 불가지론자에 가까웠는데, 이제는 어디 가서 한때 불가지론자였다는 말조차 꺼내기 어려울 것 같다. 본회퍼는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체험이 아니라 믿음이라 했지만, 오늘 내겐 너무 선명한 신의 현현, 루아흐(ruah). , 호흡, 숨결, 바람, 생명.. . 다채로운 성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하나씩 읊어본다. 성령충만한 밤이 아닐 수 없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