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은 발달했으나 우린 경이감을 상실했다. 우리는 더 이상 밤하늘의 별을 보거나 비 온 뒤 무지개를 마주할 때 숨을 죽이지 않는다. 우리는 더 이상 자연 속에 숨어 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않는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산은 흙과 돌로 구성되어져 있고, 물은 하나의 산소 분자와 두 개의 수소 분자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차라리 과학이 발달되지 않았던 우리들의 선조 시대 때는, 천둥 번개가 칠 때나 수십 일 동안 장마가 지속될 때 두려워서라도 하나님을 더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의 우린 너무 많이 알아 버렸다. 심지어 우린 며칠 뒤의 기상도 예측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미리 대비할 수도 있다. 예전에 하나님을 찾던 것들은 단지 우리들의 무지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과학은 자연 속에서 점점 더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해 갔고, 급기야 교회 안에 하나님을 가둬 버렸다.
과연 신앙은 무지의 산물인가? 과학은 신앙을 점령한 것인가? 물이 H2O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물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천둥번개가 치는 이유를 알았다고 해서 그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또한 과거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그 모든 것 안에 거하시고 관장하신다. 하나님이 그것들의 아버지요, 창조자이시기 때문이다.
범신론을 얘기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무소부재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이 교회 안에만 갇혀 있거나, 개인의 마음 속에만 거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 같은 과학자들은 생명 현상의 숨겨진 법칙을 가장 먼저 발견하는 자리에 있다. 누구나 알 수 있었지만, 아무도 몰랐던 그 비밀스럽고 조심스러운 현상을 조그만 생쥐의 뼈 안에 있는 어떤 세포를 통해서도, 그 세포 안에 존재하는 특정한 몇몇 단백질들을 통해서도, 그리고 그 단백질을 구성하는 작디작은 몇몇 분자들을 통해서도 그 누구보다도 먼저 접하게 된다. 그러기에 생물학은 매력적인 학문인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생물학자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생물학자의 차이점을 누군가 물었다. 많은 대답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한 단어, 바로 ‘경이감’으로 말이다. 그렇다. 하나님을 믿는 생물학자나 믿지 않는 생물학자나 똑같이 신비로운 생명현상을 발견하거나 그것의 법칙을 알아내어 세상에 논문이라는 형식으로 발표한다. 즉, 프로세스는 다를 게 없다. 그러나 연구를 진행하며 어떤 발견을 했을 때, 증명을 했을 때 느낄 수 있는 반응이 다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난 ‘경이감’과 함께 하나님이 하신 방법에 숨을 죽인다. 누군가는 똑같은 발견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미래 성공 대박과 직결되는 것으로만 인지하여 경탄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생물학자인 나는 그 현상을 보는 관점이 다른 것이다. 그렇다. 차이는 가치관이다. 세계관이다. 자극에 대한 반응이다. 믿음은 반응을 다르게 한다. 그리고 그 반응은 외부에 보여질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바로 그 때 그 사람의 몸을 통해 드러난 반응 그 이면에서 있던 성령이, 내 안의 예수가, 드러나고 보여지는 것이다. 나는 감히 이 순간을 전도와 선교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다. 생물학에서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니다. 일상의 모든 순간순간마다, 이 유한한 몸을 가진 인간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신다. 모든 자연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 모든 인간의 하나님이 되시는 그분은 언제나 놀라운 방법으로 일하신다. 구원은 인간만 죄악이라는 난파선으로부터 건짐을 받는 게 아니다. 창조세계가 모두 구속되는 것이다. 과학과 신학을 비롯하여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임재를 제한할 수는 없다. 하나님에게 규칙을 정해 줄 수도 없다. 우리에겐 그런 권한이 애초부터 부여되지 않았다. 우린 피조물이다. 우린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재발견해야 한다. 바로 교회 안만이 아닌, 자연 속에서도, 일상의 반복되는 패턴 가운데서도, 그 모든 것 가운데서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