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천국과 지옥을 믿었을까?"
"바울은 천국과 지옥을 믿었을까?"
  • 한수현
  • 승인 2017.12.15 01: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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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에서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천국과 지옥을 찾을 수 없다.
이 글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쓰여졌으며, 평화교회연구소 웹진 평:상에 실린 글이다. <[웹진 평:12] 알쓸바잡 | Act5. "바울은 천국과 지옥을 믿었을까?">

"바울은 천국과 지옥을 믿었을까?" 상당히 발칙한 질문을 던져보았다. “바울은 천국과 지옥을 믿었을까?” 결론만 말해본다면, 바울서신에서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천국과 지옥을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바울은 전혀 내세를 믿지 않았다는 이야기일까? 그렇지는 않다. 바울 또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수십 번 강조하였다. ‘부활을 빼면 바울서신에서 남는 것은 거의 없다. 빌립보서 3장을 보면 20-21절에서 바울은 믿는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과 하늘의 시민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의 g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g 또는 '나라') 그분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다만 현재의 우리가 생각하는 하늘에는 천국, 땅 밑에는 지옥이라는 이야기를 바울에게서 찾는 것이 매우 힘들다고 말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성서 전체에서 우리가 보통 말하는 길에서 전도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말속에 등장하는 현재의 우리가 사는 지구와는 완전히 괴리되어 존재하는 어떤 다른 외부 공간으로서의 천국지옥에 대한 묘사를 찾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현재의 그러한 천국과 지옥의 생각이 확립된 것은 적어도 수 백 년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언급하는 천국과 지옥 같은 것은 어떤 것일까를 물어본다. 제일 먼저 로마서 1장으로 가보자. 로마서 118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고 있다. 이유가 어찌되었던 간에 하나님의 심판은 흔히 지옥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한 행동으로 진리를 가로막는 사람의 온갖 불경건함과 불의함을 겨냥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납니다.” (18)

아마도 여기서 바울이 언급하는 하늘이라는 곳이 천국가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천국하늘나라라는 뜻이므로 하늘에 있는 한 공간을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이라면 바울은 여기에서 천국에 대해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보통 말하는 천국은 하늘에 있는 공간만이 아니라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러나 문맥을 단순하게 이해해 본다면 여기서 하늘은 바로 하나님이 계신 공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구약에서도 자주 나오는 것인데, 히브리어 샤마임하늘을 의미하며 이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이곳은 거룩하여서 인간의 손이 미치는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지금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바울은 내세에 관해 무엇이라 말하고 있을까? 데살로니가전서 4장을 보면 바울이 말하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알 수 있다. 데살로나가전서 416-17절을 살펴보자.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그 다음에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이 본문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죽음 이후에 인간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려야 한다. 그 때까지 잠들어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가 내려오면 먼저 이전에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된다. 본문의 의미와 해석에 대해 여러가지 다양한 가능한 해석들을 말할 수 있지만, 먼저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공중이란 표현은 위에서 언급한 하늘과는 다른 표현임을 알아두어야 한다. ‘하늘공중이 뜻하는 바를 복잡하게 논의하지는 않는다. 다만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과 그리스도를 만나는 곳에 대한 차이를 의미하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 한가지 더 분명한 것은 죽음 이후에 일어나는 일은 바울에게는 천국이냐 지옥이냐가 아니라 부활을 기다리며 잠들어 있는 것이다. 마지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이루어지는 일들 속에서 새로운 부활의 삶을 말하는 것이 바울의 내세관임은 분명하다.

눈을 돌려서 바울에게서 지옥을 의미하는 본문을 찾아보려 한다면 대표적으로 데살로니가후서 16-9절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공의를 베푸십니다. 여러분을 괴롭히는 자들에게는 괴로움으로 갚아주시고괴로움을 받는 여러분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아주십니다. 이 일은 주 예수께서 자기의 권능 있는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에 싸여 나타나셔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처벌하실 때에 일어날 것입니다그들은 주님 앞과 주님의 권능의 영광에서 떨어져 나가서, 영원히 멸망하는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본문은 심판의 매서운 메세지속에 나타나는 영원히 멸망하는 형벌이 무엇인지, 어떤 공간적인 곳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다. 게다가 여기에서 여러분을 괴롭히는 자가 과연 불신자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자만을 의미하는 것인지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데살로니가후서가 바울이 쓴 것이 아니라고 여겨진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데살로니가전서만을 바울의 서신으로 인정한다. 그렇다면 바울의 서신으로 여겨지는 글들 속에서 영원 형벌등을 의미하는 구절을 찾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우리가 그토록 궁금해 하는 내세에 대해 확실히 이야기해 주지 않고 있을까? 이 질문을 곱씹어 보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바울은 우리가 궁금해 하는 문제에 원래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바울은 죽어서 가는 공간인 천국이나 지옥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이런 질문에 대한 첫 번째 이유는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사실 바울은 죽어서 가는 천국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곧 자신의 삶에 나타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재림이 어떤 것인가는 또 다른 신학적 질문이지만, 하나 명확한 것은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현실 속에 경험하며 에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행하는 사람이었지 자신과는 동떨어져 존재하는 천국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찰을 통해 물어야 할 질문은 그럼 천국과 지옥은 없다는 것인가?’가 아니다. 거꾸로 우리의 질문은 왜 우리는 그토록 죽음 이후의 천국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을까?’이다. 세상과는 동떨어진, 또는 세상 속에서는 설명하기 힘든 초자연적인 기적이나 신비, 또는 내세에 대한 질문들은 초대 기독교에서보다 현대의 기독교에서 더욱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생각에 매우 비관적인 사람이었다. 고린도후서 121절에서 5절을 살펴보자.

"자랑함이 나에게 이로울 것은 없으나, 이미 말이 나왔으니, 주님께서 보여 주신 환상들과 계시들을 말할까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하나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까지 이끌려 올라갔습니다. 그 때에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나는 이 사람을 압니다. 그가 몸을 입은 채 그렇게 했는지 몸을 떠나서 그렇게 했는지를,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이 사람이 낙원에 이끌려 올라가서,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사람이 말해서도 안 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두고서는 내 약점밖에는 자랑하지 않겠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이나 부흥사들이 바울의 말을 통해서 삼층천이나 신비나 입신의 경험 등을 떠들어대지만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런 것이야말로 바울이 비판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본문의 배경은 이러한 신비를 떠들어대고 환상을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바울 자신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영성가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을 자랑하는 것이 이로울 것이 없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 대신에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다. 자신의 현실적인 삶 속에서 고난 받고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약하디 약한 사도의 삶을 자랑한다. 이후로 나오는 것이 그 유명한 바울의 고난의 목록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신비와 기적으로 가득 찬 것이 아니다. 깊은 신앙의 신비를 가슴에 품고 현실의 삶 속에서 날마다 인간적 약함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적어도 바울에게 천국은 현실 속에서 경험되는 고난 속에 피어난 꽃과 같은 영성이며 지옥은 고난을 버리고 세상을 선택할 때에 만나게 되는 유혹의 달콤함이 아니었을까?

 

글쓴이는 한수현 박사는 시카고신학대학교(CTS)에서 바울학을 전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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