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홈스쿨의 중심 - 성경
우리집 홈스쿨의 중심 - 성경
  • 엄경희
  • 승인 2017.11.03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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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스쿨 맘 엄경희의 사우디 통신

우리집 홈스쿨의 중심, 즉 판도라 상자는 영어나 책 읽기가 아니라 바로 성경이다. 영어나 책 읽기는 모두 성경을 읽고 이해하기 위한 도구이며 훈련일 뿐이다. 아이들이 습득하는 지식 역시 성경 이해를 돕고 또는 성경적 관점으로 다시 조망하곤 했다. 분명 우리집 홈스쿨의 중심에는 성경이 있다. 성경을 해석하고 그 성경에 따라 세상의 지식을 이해하는 데 있다. 실제 얼마나 성경을 우리집 홈스쿨 중심에 두었는지는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다. 언제나 반성이 되고, 성에 차지 않으며, ‘좀 더 해야 하는데...’하는 조바심이 떠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홈스쿨의 시작이자 중심이자 목표는 분명 성경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잘 하고 있다는 자신감에 있기보다는, 해도 해도 부족하다 느끼는 이 불만족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엇이든 억지로 하는 것에는 아이들의 반항이 뒤따르는 법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성경을 너무 강조하다가 혹시라도 아이들 안에 성경을 향한 자연스러운 열정의 빛을 꺼뜨릴까 싶어 성경 시간을 형식적으로 몰고 가거나 너무 자주 하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러면서도 성경 시간이 너무 부족한 게 아닌가, 내 안에는 조바심이 일곤 했다. 그야 말로 가장 최고의 때에 최고의 시간을 만들고자 내가 가장 신경 쓰고 가장 중심에 둔 것은 바로 성경 시간이었다.

세 돌이 다 되어 가던 윤하는 지난 번 유럽 여행을 통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 수많은 주제의 그림들과 조각품들 중, 일부러 강조하거나 유도한 것이 아닌데도 윤하가 예수님의 그림이나 조각품에 유달리 관심을 갖는 모습이 신기했다. 어디를 가나 예수님에 관한 작품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윤하는 언니, 오빠들은 경험한 바 없는 새로운 방법으로, 성경을 본격적으로 읽어주기도 전에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 이제 윤하는 신학적 질문의 폭발기라 할 수 있는 만 4세가 되어 간다. 성하부터 슬하에 이르기까지 만 4세쯤부터 아이들에게 어린이용 성경을 쉬운 것부터 읽어주곤 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경우 이 무렵에 가장 심오하고 경이로운 신학적 질문들을 쏟아 놓곤 했다.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따 먹을 줄 알았으면서 에덴동산에 만들어 놓으셨어?”

하나님은 왜 셋이야?”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어?”

이런 성경 이야기를 접하면서 아이들이 던지는 단순한 질문들은 언제나 성경의 가장 심장부를 향하곤 했다. 그리고 내 경험상 신학이나 성경에 가장 열정적인 관심을 보이는 시기가 이 때였다. 성하, 수하, 준하, 슬하 모두 다 이미 이 시기를 지났다. 항상 젖먹이 동생으로 바쁜 때이기도 해서 안타깝게도 나는 이 시기에 아이들에게 충분히 성경을 읽어 주었나, 늘 아쉬움이 많다. 첫째 성하는 어린이 성경을 한번 다 읽어 준 것 같지만 수하부터는 다 못 읽어주었지 싶다. 준하는 형 누나의 성경 시간으로 자연스레 합류했고 요즘 슬하에게 미처 다 읽어주지 못한 성경을 마저 읽어 주려고 하는데 만 6세가 지난 슬하의 성경에 대한 관심이 부쩍 줄어든 것 같아 안타깝고 미안하기만 하다. 그래도 윤하 성경 읽어 줄 때 슬하와 못 다한 시간을 보충할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해 본다. 어린이 성경을 읽어 주다, 성하가 4학년, 수하가 2학년 되던 해, 사우디 오던 해였으니까,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쯤 부터 성하 수하와 어른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창세기부터 한 장씩, 대학 시절 성경 본문을 읽고 관찰하고 질문하고 해석하던 방법을 나름 응용하여, 아이들과 2시간 넘게 꽤나 심도 있는 성경 공부 시간을 시작했다.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 대학생들이 성경 공부하는 방식이 과연 통할까 내 딴에는 큰 모험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한 그 이상의 이상이었다. 아이들의 질문에 함께 답을 찾아가면서 영혼이 채워짐은 물론이요, 우리 가족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기도 했으며, 심지어 아빠의 사업을 위한 방향을 보여 주시기도 했다. 사우디 오게 된 해 1월부터 시작한 이 성경 시간은 사우디 오는 과정에서 부터 사우디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생생하게 우리 가정을 인도하는 말씀을 공급해 주었다. 4세 이후로 새로운 신앙의 시기가 지금 성하에게 오고 있는 것 같다. 곧 세상이 말하는 사춘기다. 부모를 떠나 세상에 홀로 독립해야 함을 자각하기 시작한 시기에 성하는 신앙을 부쩍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성하 뿐 아니라 부모인 우리도 마찬가지다. 이제 우리 돌봄을 떠나 혼자 삶을 독립해야 하는 아이에게 과연 우리는 무엇을 가장 주고 싶은가 질문하게 되었다. 대학 입학은 실용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가시적 목표일뿐이다. 우리 부부는 아이 인생이 결코 어느 대학을 들어갔는지에 달려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세상의 변화를 봐도 그렇고, 혹여 아이가 나름 이유가 있어 가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더 용기 있는 선택이라 기꺼이 지지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곧 우리 품을 떠나 독립을 앞둔 자녀에게 꼭 주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의 답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었기에, 찾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of God)과 예수 그리스도다. 이 신앙이 아이 안에 분명하다면 우리는 아이에게 우리 품을 떠날 준비를 온전히 시켜 주었다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운전하는 배에 같이 타고 있던 아이들이 자기만의 배를 타고 홀로 항해를 떠날 때 그 배 안에 예수님이 함께 타고 계시는 것을 본다면, 비로소 부모로서 안심하고 아이를 홀로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에는 일주일에 한번, 두어 시간씩 주로 구약 성경 한 장(Chapter)을 공부했다면, 요즘에는 신약 성경을 몇 절씩 매일 묵상하는 식으로 성경 시간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에 더해 성하가 우리 품을 떠나기 전까지 꼭 같이 읽고 싶은 책 두 권을 정하게 되었다. 바로 J. I. Packer(90)“Knowing God(하나님을 아는 지식)”John Stott(1921-2011)“The Cross of Christ(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책이다. 두 책 모두 남편과 내가 대학 때 너무나 감명 깊게 읽은 인생의 책이다. 성하부터 모든 아이들과 성경을 기본으로, 최소한 이 두 책만큼은 함께 읽고픈, 즉 아이들 안에 분명한 이해로 심어 주고픈 핵심 진리를 담고 있는 책이다. 성하가 혼자 읽기 시작한 “Knowing God”을 한 주에 한 장씩 아이들과 같이 나누고 있다. 다시 보아도 너무 좋은 책이다. 그런 책을 나는 지금 아이들과 나누고 있는 것이다. 그 행복이 얼마나 큰지 모르겠다.

지금까지는 내가 주중에 하고 있는 아이들과의 성경 시간에 관한 이야기였고, 우리집 성경 나눔의 중심 기둥은 십 년째 계속해 오고 있는 가정예배이다. 주중 성경 시간은 내가 임신 출산을 반복하면서 멈춘 적도 많지만 가정 예배는 한 번도 끊이지 않고 남편이 책임지며 매주 드려 왔다. 남편은 전도사를 그만 둔 이래 우리 가정의 사역자로 섬김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남편은 성경 한 권을 정해 매 주 한 장씩 같이 읽고 성경 내용이 무엇인지 함께 이야기하는, 이른바 성경강해 식으로 가정예배를 이끌어 오고 있다. 지금까지 함께 끝낸 성경이 벌써 상당한 양이 되었다 싶다. 성경은 이른바 무한하게 열린 책이라 일방적인 강의식 교육이 불가능하다. 부모로서 성경 본문을 설명하고 이야기를 전개해 주고 나면, 부모 역시 청자가 되어 성경이 무슨 말씀을 할 지? 어떻게 전개되어 갈지? 결론을 열어 놓고 아이들과 함께 들어야 한다. 대화나 토론을 안 할 수가 없다. 심지어 슬하 같이 어린 나이에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을 그때그때 질문으로 날리고, 그런 아이의 질문이 놀라운 해석으로 이끌어 주는 경험을 수도 없이 했다.

나는 유대인식 토라 교육에 대해 들어는 봤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교육법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일방적 주입식이 아닌 토론식이라는 것만 알고 있다. 유대인식 토라 교육이 무엇인지 잘 모르니, 우리 가정의 성경읽기나 교육 방법이 그와 유사한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집 교육에도 토론이 많은 것은 분명하다. 유대인식 교육을 인식하지 않아도 누구나 자녀와 성경을 공부하게 되면 토론식으로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어느 부모도 성경의 궁극적 해답을 알지 못하며, 성경은 영원을 향해 무한히 열린 책이고, 상황과 시기에 따라, 또한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게 말씀하는 살아있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엄마, 성경을 읽는 방식이 내가 지금 책 읽는데 많은 도움을 준 것 같아. 성경을 볼 때 먼저 그 의미가 무엇인가 살피고 질문하고 그 안에 담긴 뜻을 찾듯 다른 책도 그렇게 읽으니까 더 잘 이해되고 깊이 남는 것 같아.” 어느 날 성하가 무심코 던진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아이들이 공부를 더 잘 하게 하려고 성경을 같이 공부한 적은 결코 없었다. 성경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최고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보니 성경 공부는 아이들의 공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아이들이 공부하는 대부분은 유한한 것이다. 물론 한 주제를 온전히 마스터하기는 쉽지 않지만, 어떤 것이든 일단 이해하고 기억하고 나면, 내가 그것을 소유했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그럴 수 없다. J. I. Packer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말했듯 우리는 그 무한함에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를 초월하기 때문이. 스펄전 목사( C. H. Spurgeon, 1834-92)는 그의 설교(1855년 1월 7일 주일 아침)에서 이렇게 말했다..

“It (a contemplation of the Divinity) is a subject so vast,
that all our thoughts are lost in its immensity;

so deep, that our pride is drowned in its infinity. ....
But while the subject humbles the mind it also expands it.”

유한한 무언가가 아닌 무한한 무언가를 인지하고 이해하려고 아이들의 지성과 감성, 의지가 반응할 때 아이들의 전인격은 무한을 향해 무한히 뻗치는 놀라운 경험을 한다. 이때 하나님이라는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아이들의 인지에 관련된 근육은 무한히 팽창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아이들의 두뇌와 사고력, 이해력을 놀랍게 발전시켰구나, 이제는 경험으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성하나 수하, 준하가 지금 공부하거나 읽고 있는 책은 영어를 잘 해서가 아니다. 그런 주제를 이해하고 즐거워할 수 있을 만큼, 인지의 그릇이 넓고 깊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영어나 독서력은 그저 지식을 받아들이는 도구에 불과하지 지식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을 같이 나누면서 부모와 자녀들은 생물학적 뿌리 뿐 아니라 영적인 뿌리도 하나가 된다. 특정한 성경 시간 뿐 아니라 우리 부부는 아이들과 수시로 여러 주제에 관해 제법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곤 한다. 독서의 범주가 다양한 성하와의 대화는 그런 면에서 아주 다채롭고, 대화 수준 역시 꽤나 깊다. 그런 대화 덕에 우리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신학과, 생물이 전화했다는 진화론을 상치되지 않는 조화로운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흔히 무서운 2’라고들 하는데 나는 성하나 수하가 크면서 함께 나누는 대화가 얼마나 만족스러운지 모른다. 우리의 대화거리는 무궁무진하다. 아이들은 시험을 위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비롯해 살아있는 책을 읽고 있기에, 언제나 엄마나 아빠에게 들려 줄 이야기가 넘쳐난다. 그러면 나나 남편은 성경적인 관점으로 아이들과 대화를 나눈다. 아이들 뿐 아니라 부모인 우리도 풍성한 시간이 되고 말이다. 나는 지금 성하와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yevsky, 1821-1881)카라마조프의 가의 형제들’(The Brothers Karamazov)을 읽고 있다. 시간이 부족한 내가 성하를 열심히 쫓아가는 형국인데 책이 방대한 만큼 읽으면서 수시로 책 내용을 가지고 대화를 나눈다. 깊이 있는 신학적 주제, 인간에 대한 이해 등, 인생을 알기 시작하는 나이의 성하와 나눌 이야기는 그야 말로 끝이 없다. 성경을 가정의 중심에 심었을 때, 그 나무가 자라 맺는 열매가 독자적으로 아이들을 키울 뿐 아니라 부모까지 성장시키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다. 내가 이해하는 교육은 아이들 마음에 씨를 심는 것이다. 지식은 물량적인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며 유기체라고 생각하며 마음 밭에 떨어진 그 씨앗은 아이들이 자라듯 계속 자라면서 그 뿌리에 상응하는 열매를 맺는 것이라 보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성경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 세계로서 지식을 배워가기 원했다. 신앙적이기 위해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종교적인 것과 비종교적인 것으로 나누고 소위 종교적인 것에만 머무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발견할 수 있는 아이들이기를 바랬다. 나는 여전히 엄마의 하나님이란 표현을 한다. 또한 아이들이 무신론자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각자의 하나님을 만나야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부모가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아이들과 하나님 사이에 일어날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위해 남편과 나는 최대한 우리가 만난 하나님을 최선을 다해 알려 주고 소개해 줄 뿐이다.

나는 그저 아이들과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소통의 문이 활짝 열려 있고, 갈수록 더 넓어지고 깊어지고 높아짐에 감사하고 행복할 뿐이다. 내가 알고 만난 하나님을 내가 낳은 자식들과 함께 알아 가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그 자체가 기쁘다. 아이들이 하는 공부가 죽은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보이는 것, 혹은 보이지 않는 것의 일부로 이야기할 수 있음에 깊은 감사를 느낀다. 그렇게 아이들도, 또 더불어 부모도 파편화된 비성경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세계라는 통일되고 하나 된 전체로서의 살아있는 성경적 지식으로 문학, 역사, 과학 등 모든 공부를 할 수 있음이 가장 신이 난다. 그것이 내가 지금 홈스쿨이 행복한 이유요, 이제는 결과에 상관없이 그 자체로 즐겁고 감사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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