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특강 현장 중계, '정의로운 사랑은 가능한가?'
열린특강 현장 중계, '정의로운 사랑은 가능한가?'
  • 설요한
  • 승인 2017.12.14 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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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1일(월), IVF 중앙회관에서 월터스토프의 정의론 강연 열려
ivp 열린특강
ivp 열린특강에서 김동규 박사가 강연하고 있다. ⓒivp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 1932- )는 미국의 개혁파 신학자로 한국에서도 그 이름이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명성에 비해 정작 그가 계속해서 제시했던 주요 논의가 제대로 소개되지는 않았다. 지난 1211일 월요일 저녁 7, 한국기독학생회 중앙회관에서는 월터스토프의 정의론 강연이 있었다. 해당 강연은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이하 IVP)에서 진행하는 IVP 열린 특강의 일환으로 정의로운 사랑은 가능한가라는 제목으로 진행되었는데, IVP에서는 최근 월터스토프의 사랑과 정의(Justice in Love)를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강사는 서강대학교에서 철학(석사, 박사), 루뱅대학교에서 신학(석사)을 공부한 김동규 박사(서강대 생명문화연구소 연구원)였다.

이날 강연에서 김동규 박사는 정의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월터스토프와 그의 사상을 다루었다. 월터스토프라는 인물을 형성한 배경, 정의를 다뤄 온 여정을 살피고 정의에 관한 그의 주요 저작을 중심으로 정의론을 정리하고 비평적 평가를 제시했다이하에서 강연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강연 내용을 자유롭게 풀어썼으며, 내용에 왜곡이 있다면 그 책임은 모두 글쓴이에게 있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저술들 ⓒ구글이미지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저술들 ⓒ구글이미지

 

1.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누구인가

위키피디아
ⓒ위키피디아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미국 미네소타 주 비글로우 출신으로, 네덜란드 이주민을 부모로 둔 개혁파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논증을 촘촘히 구사하는 일급 철학자이면서도 인식론, 신론, 신앙과 이성의 관계, 정의론, 예술철학, 교육철학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어 왔으며, 철학적-신학적 해석학과 예전신학에도 조예가 깊다.

국내에 월터스토프는 아들을 잃은 후 쓴 에세이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좋은씨앗 역간)의 저자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는 아들의 죽음으로 신과 신앙에 대해 더 깊이 숙고하게 되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는 2014년 세월호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가 보인 반응에서도 알 수 있다.

그의 삶을 형성한 몇 가지 요소가 있다면, 첫째로 개혁주의 신학 전통, 둘째로 칼빈 칼리지, 셋째로 약자들과의 만남을 꼽을 수 있다.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 학문함으로써 월터스토프는 세계와 문화와 사회를 성경의 빛 안에서 해석하는 일과 씨름할 수 있었으며, 앨런 부삭(Allan Boesak)과의 만남을 통해 흑인, 즉 과부와 고아와 따돌림을 받는 사람들의 정의를 고민할 수 있었다. 특별히 과거 남아공 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의 목소리, 팔레스타인인들의 고통받는 상황을 보면서 정의에 대한 소명을 키워 나갔다.

 

2. 정의를 향한 철학자의 학문 여정

월터스토프의 정의론을 보기 위해선 그의 세 저작을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세 저작은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IVP 역간), 정의: 옳은 것과 그른 것(국내 미출간), 사랑과 정의. 여기에 자신의 여정을 서술해 놓은 책인 하나님의 정의(복있는사람 역간)를 함께 보면 좋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1981년 카이퍼 강좌가 2년 후 책으로 나온 것이다. 여기서 월터스토프는 칼뱅주의 신학을 기반으로 삼은 세계 형성적 기독교를 주창한다. 그는 자신의 기획을 위해 당대 사회와 문화의 구조를 비판하는 일이 필요함을 느끼며 근대 세계체제론을 수용한다. 여기에 신칼뱅주의가 사회 내 갈등에 제대로 주목하지 못했다는 약점을 지적하며, 약자의 편에 서기를 주장하는 해방신학을 수용한다. 이를 통해 월터스토프가 추구하는 바는 샬롬 안에서의 정의다. 샬롬은 인간의 모든 관계에서 향유되는 평화를 뜻하며, 이 샬롬의 비전은 정의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여기서 월터스토프가 말하는 정의는 자신의 권리를 향유하는 것이다.

2008년도에 월터스토프는 정의를 통해 자기만의 정의로운 내세운다. 그는 우선 고대 로마의 법학자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Domitius Uplianus)의 정의 공식, “그의 권리를 각자에게 돌려주는 것이라는 공식을 수용한다. , 정의는 우리가 권리를 소유한 어떤 것이 정당하게 분배되는 것으로 구성된다. 아울러, 자연권이 사람에게 본래적으로 합당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보며 본래적 권리로서의 정의인 자연권을 옹호한다.

월터스토프는 사회와 개인이 따를 수 있는 어떤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정의를 정립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구약의 미쉬파트로서의 정의는 어떤 위계적 질서가 아니라 고아, 과부, 나그네 등 고통받는 가난한 이들에게 옳은 것, 즉 그들의 권리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에게 인간은 그 자체로 귀할 뿐, 다른 능력이나 질서에 의해 존엄성을 부여받지 않는다.

한국어 번역 출판물 중 ⓒ갓피플
한국어 역간 출판물 중 ⓒ갓피플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월터스토프는 기존의 정의론과 인권, 권리-담론을 반박한다. 그가 보기에 행복주의는 타인에 대한 관심을 행위자-주체로 환원하며, 플라톤(Platon)이나 롤스(John Rawls)의 정의론은 이상적인 질서나 사고 실험에 의해 권리-담론을 전개한다는 한계가 있다. 신의 명령 이론 역시 도덕적 의무가 신의 명령에 의해 의무가 발생한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다는 약점이 있다. 인간 능력을 기반 삼아 인간 존엄성을 정초하는 담론은, 능력을 가지지 못한 자의 인권은 보증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월터스토프는 기존의 정의에 관한 담론들을 반박한 후에 하나님의 형상이론에 기초해서 이권의 근거를 설정하려 한다. 다만, 기존 하나님의 형상 이론은 하나님의 형상을 기능이나 능력에서 찾는 한계가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의 관계적 속성이야말로 우리가 기대해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3. 사랑과 정의의 핵심 주장

사랑과 정의의 기획은 사랑과 정의라는 두 명령이 조화를 이루도록 사랑과 정의를 각각 이해하는 길을 제안하고 논하는 것이다. 월터스토프는 이를 위해 안데르스 니그렌(Anders Nygren)과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를 논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는 사랑을 강조하는 니그렌과 정의를 강조하는 니버의 입장에 모두 반대한다. 기존의 아가페주의를 비판하며 월터스토프가 제시하는 것은 배려-아가페주의”(care-agapism). 이는 그의 자연권 옹호와 관련이 있다. 그가 보기에 사랑은 타인의 자연적 권리를 존중하는 데서 비롯한다. 각자가 가진 권리 그대로 대접하는 것이 정의를 포함하는 사랑이다. , 각 사람이 누릴 권리를 있는 그대로 보장해 주기 위해 선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구체화한 용어가 배려. 월터스토프는 이것이 성경의 아가페가 지닌 성격이라고 이해한다. 아울러 배려하게 하는 요인 가운데서도 중요한 것이 바로 공감이다.

월터스토프는 배려의 적용 규칙을 몇 가지 제시하며 이 개념을 실제화하고자 한다. 이는 그가 비판하는 행복주의와 공리주의를 대체하려는 시도다. 그가 보기에 행복주의는 주체-개인의 행위에, 공리주의는 다수의 효용성에 집착하며, 양자 모두 각 개인의 고유한 권리를 합당하게 보존해 주지 못할 가능성을 갖는다. 그가 제시하는 규칙은 다음과 같다. 1) 누군가의 선의 증진이나 권리 보장을 목적으로 추구하더라도 그 사람을 부당하게 대우해선 안 된다. 2) 자신의 선의 증진과 정의 확보를 목적으로 추구하더라도 누군가를 부당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3) 누군가에게 악을 부과하는(그 사람의 번영을 감소시키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추구해서는 안 된다.

이 규칙에서는 악이 부과되는 현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월터스토프는 악이 부과되는 일을 즐겨선 안 되고 오히려 유감스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태도를 말하면서 그가 요구하는 윤리는, 타인의 어려움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의무를 기꺼이 인정하고 내집단과 외집단 분류에 사로잡혀 귀를 막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규칙과 태도, 윤리는 매우 실제적이지만 이를 실행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이러한 시선으로 포도원 일꾼 비유를 보자. 나중에 온 사람을 배려하는 포도원 주인의 태도는 먼저 온 사람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인가? 월터스토프는 주인의 배려 자체가 부당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본다. 이를 부당하다고 느낀다면, 이는 비례적 분배 정의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받을 자에게 받을 것은 준다는 원리로 보면, 주인이 원래 약속을 정당하게 지켰다면 그의 관대함이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ivp 월요 특강
ivp 월요 특강 ⓒivp

월터스토프의 논의는 정교하면서도 실제적이지만, 그의 논의에 약점이 없지는 않다. 월터스토프가 기존의 하나님의 형상 이론을 비판하며 이를 보완하는 논지를 제시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그의 논지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반 삼는 것, 즉 그가 비판하는 신의 명령 이론과 유사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아울러, 월터스토프는 용서를 다루면서 용서는 부분적이며 용서하더라도 제재를 가할 수 있다고 보지만, 동시에 죄의 사면과 화해가 완전히 이루어진다면 형벌 제재를 포기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는 사랑이 정의를 압도하는 경우가 아닐까? 그는 사랑과 정의가 양립한다고 이해하지만 사랑은 정의보다 더 많은 것을 내다봄으로써 가능하다. 배반 가능성이 있음에도 용서하겠다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폴 리쾨르(Paul Ricoeur)는 사랑이 정의를 포괄하면서도 이를 압도하는 넘침의 논리를 말하는데 이것이 온당한 이해가 아닐까?

 

글쓴이 설요한 간사는 IVP 편집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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