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크리스토퍼 라이트 목사라 부르는 건 왜 일까?
‘굳이’ 크리스토퍼 라이트 목사라 부르는 건 왜 일까?
  • 자캐오
  • 승인 2017.12.13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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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도 크리스토퍼 라이트도 성공회 신부이다.
크리스토퍼 라이트 초청 모임 포스터
크리스토퍼 라이트 초청 모임 포스터

 

조금 시간이 지났으니 이건 뭐지..’ 싶은 부분에 대해 한 번쯤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J. H. Wright, 70). 영국 성공회-복음주의 계보에서 존 스토트(John Stott, 1921-2011) 신부를 잇는 리더로 알려져 있는 분이다. 한국 복음주의 진영에서도 꽤 자주 인용되는 사람이다. 그가 얼마 전인 지난 달 초에 한국에 다녀갔다고 한다.

... 그를 소개하는 여러 사람들이 한결같이 크리스토퍼 라이트 목사라고 칭했다. 왜 그런가 싶었는데, 그를 소개하는 포스터에 떡 하니 크리스토퍼 라이트 목사라고 소개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가 초교파적인 선교 단체에서 활동하고 개신교 계열 학교에서 학장을 하기도 했으니,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정말!?

나로서는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는 지 당황스럽다. 자기 신앙 공동체의 목회자를 사제라는 역사적신학적 맥락에 놓인 용어로 부르는 성공회에서, 성공회와 자주 협력한다고 개신교 전통 안에서도 다른 역사적신학적 맥락에 서 있는 개신교 목회자들을 사제나 신부라고 호칭한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런 경우를 아직 본 적이 없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회나 복음주의 일부에서 굳이크리스토퍼 라이트 목사라 부르는 건 왜 일까? 아마 존 스토트 신부도 그렇고, 크리스토퍼 라이트도 그렇고 그 누구도 자신을 사제나 신부라고 부르든 목사라고 부르든 신경 쓰지 않았을 거다. 그들은 성공회 전통 안에서 복음주의를 지향하는 성공회 사제들이기 때문이다. ‘다른 개신교 전통과의 소통과 동행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니 더욱 그럴 거다.

이 문제는 사실, 한국에 자리 잡고 있는 대한성공회에 대한 예의와 존중의 문제다. 존 스토트이든 크리스토퍼 라이트이든 성공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기에, 그들은 공식적으로 ‘priest’로 불린다. 그리고 대한성공회는 ‘priest’사제나 신부로 번역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성공회 사제임에도 끊임없이 분리주의 노선을 주장하는 캐나다 성공회의 제임스 패커(James Innell Packer, 91)를 소개할 때 사제나 신부라고 부른다. 내 신학적 입장에서는 그런 사람을 성공회 사제나 신부라고 소개하는 게 너무 불편하다. 하지만 그가 아직성공회 전통 안에 속해 있고 이를 공개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한, 그게 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나는 생각한다.

더군다나,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하느님의 선교에 대한 성공회-복음주의적인 해석이자 재구성이다. 그렇다는 건, 그만큼 그가 현대 사회와의 소통을 강조하고 있다는 거다. 그런 사람을 내부 판촉을 위해 성공회 사제라는 역사적신학적 맥락을 삭제한 뒤에 슬쩍 목사라는 색을 입혀 소비하고 있다.

동행하는 또 다른 개신교 전통에 대한 존중과 예의도 갖추지 못하면서, ‘무슨 현대 사회와의 소통에 대해 고민하고 배운다는 걸까싶을 뿐이다. 기본도 안 갖추고, 더 복잡하고 중층적인 문제를 풀겠다고. 정말?! 이래저래 싫으면, 최소한 성공회 목회자라고 소개하거나 그냥 서구식으로 크리스토퍼 라이트라고 소개해도 될 텐데, 굳이 목사라는 색을 입혀서 판촉한다.

그의 책을 많이 번역한 한국 IVP’에서도 이미 그를 “1977년에 영국 성공회 교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굳이 목사란다. 더 당황스러운 건, 통역자가 그 한국 IVP를 운영하는 한국 IVF’ 대표이었다는 소식. 다양한 방식으로 응원하던 곳이었는데, 꽤 당황스러웠다. 자신들이 낸 책에는 성공회 사제 서품을 받은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역사적신학적으로 차이가 있는 목사라는 호칭을 달아 판촉하는 곳에 가서 협력하는 건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곳에 가서 이건 좀 아니다라고 바로잡았을까.

무엇보다 번역이든 통역이든 기본적으로 이 땅에서 이미문제없이 사용되고 있는 통/번역 용어가 있다면, 그걸 우선하는 게 통/번역가의 기본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그분들은 판촉을 위해서라면 그런 정도는 쉽게 무시해도 되는 그깟 것이었던 건가 싶다.

자캐오신부(페이스북에서)
자캐오신부(페이스북에서)

뭘 그리 사소한 차이를 짚어야 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런가. 당신은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칼뱅(John Calvin, 1509-64),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의 길이 지향하고 이뤄낸 역사적신학적 성과와 차이, 다름이 사소해 보이는가.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다. 그리고 사소한 차이를 짚는 것 같아도, 내가 말하는 더 중요한 건 존중과 예의. 서로의 다름을 그깟 것정도로 치부하는 순간, 우리는 온갖 폭력적인 사고나 상황과 마주하게 될 때가 많다. 그 다름을 존중하고 예의를 갖춰 조심스럽게 다가서려고 할 때에 비로소 대화와 동행이 시작된다.

모든 걸 판촉을 위한 그깟 것으로 업신여기는 듯한 한국 개신교회나 복음주의 일부가 보여주는 모습. 그분들에게 대화와 동행은커녕, 존중과 예의부터 요청해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게 다가오는 날이다.

 

글쓴이 자캐오 신부는, 대한성공회 용산나눔의집 원장이자 길찾는교회 담당 사제로 동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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