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의 기도' 논쟁? 참으로 잘못되지 않았는가?
'지렁이의 기도' 논쟁? 참으로 잘못되지 않았는가?
  • 심용환
  • 승인 2017.12.11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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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하는 상대가 무슨 히틀러라도 되는가?
김요한, 지렁이의 기도, 새물결플러스, 2017년
김요한, 지렁이의 기도, 새물결플러스, 2017년

지금은 IVP로 옮겨간 L 팀장을 통해 새물결플러스와 새물결아카데미 대표인 김요한 목사를 만날 수 있었다. 기독교인으로서 어떤 형태로든 기독교 인문학 운동을 이어가고자 고민하던 차에 김요한 목사의 활동이 인상적이었으니 만남의 기회를 어찌 마다 할 수 있었겠는가. 원래 분야의 어른이나 전문가를 만나서 얘기를 듣는 것을 워낙 즐거워하는지라 목사님과의 대화 또한 매우 즐겁고 감사한 시간이었다.

두 번째 만남이었던가. 그날 이야기가 뜻하지 않게 엉뚱하게 흘러갔다. 워낙 지성적인 분이시고, 정치사회적 발언을 주저하지도 않으시고, 무엇보다 신학연구 풍토의 문제나 교회개혁 같은 주제에 관해서는 깊이 공감하고 있었던바 여서 주로 이런 대화를 나누다가 주제가 기도와 영성, 목회 같은 주제로 바뀐 것이다.

심선생님은 좋은 사람이에요. 다만 지금 가족 XX에서 문제가 있는거 같아요. 그게 느껴져요.”

조심스럽게 목사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정확히 맞는 얘기였다. 당시 나는 우울증 증세가 나타날 정도로 집안 내의 문제로 힘겨워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 누구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공세적인 대중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던 차에 심용환이라는 개인에 대해 전혀 모르던 목사님이 이 얘기를 하시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별히 그 자리에서 펑펑 울거나 속사정을 쏟아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여튼 누군가가 누군가의 사정을 알아준다는 것에 대한 감사, 그리고 무엇보다 목사님은 목사님이구나하는 신기함을 느꼈다. 하지만 어차피 이 이야기를 집안의 당사자에게 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고 여겨 그냥 혼자만 속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 후 몇 번의 만남이 더 있었는데 목사님이 먼저 영적인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으셨고 나 역시 묻지도 않았다.

 

굳이 이 이야기를 왜 남기는가. 김요한 목사 개인에 대한 일정 정도의 변호도 있겠지만 동시에 소위 <지렁이의 기도> 출간 이 후 벌어진 은사 논쟁에 대해 한마디 할 수밖에 없어서다. 논쟁의 과정이 참으로 기괴하고 무의미하다. ‘싸우려고 작정한 건가라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첫째, 대관절 이 논쟁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계시 이 후 은사가 중지되었다느니, 아니면 예언은 계속된다느니 하는 것이 작금의 상황에서 이렇게 심각한 주제인가 큰 회의감이 든다. 물론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만 논쟁이 가치를 얻으려면 때를 따라 어우러져야 한다. 한국교회가 붕괴하는 것이 은사가 중지되었기 때문에 혹은 예언이 계속되기 때문일까. 당장 명성교회 사태가 심각하니 그것부터 해결하자 식으로 상황론을 이야기함이 아니다. 저명한 목사님, 저명한 신학자분들께서 이 이야기를 굳이 거드는 모양새를 보면서 느끼는 바는 아니, 언제 이 분들이 이렇게 재빨리 움직였지라는 놀라움이다.

하나하나 따져볼까? 이미 한국교회의 부패상은 1997년 금란교회 문제에서부터 본격화되었다. 하지만 지난 20년간 붕괴는 극에 극을 달할 때 이 땅의 목회자와 신학자는 얼마나 재빠르게 움직이고, 논평하고 반발했는가. 행동까진 바라지도 않고 민감성 자체만 따져보자 이 말이다. 찬양사역을 둘러싼 여러 폐해나 문제, 교회학교의 붕괴, 기독교인의 감소 등등 온갖 이슈들이 넘쳐나는 기간 동안 도대체 얼마나 기민하게’, ‘민감하게’, ‘격렬하게반응했는가 말이다. <지렁이의 기도>에 나오는 몇가지 이야기는 참으로 지엽적인 이슈에 불과한데 지금처럼 소위 민감한 논쟁이 오간 적이 얼마냐 있냐는 말이다. 이쯤되면 느껴지는 바는 간단하다. 소위 은사나 예언같은 매우 추상적이거나 작금의 맥락과는 참으로 거리가 먼 주제가 적어도 이들에게는 훨씬 긴박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둘째, 신학이 신앙을 규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논쟁의 모양새가 참으로 웃기다. <지렁이의 기도>에 나오는 내용, 즉 신앙적 체험과 영성 자체를 신학이 평가하고 규정한다? 이게 얼마나 가능한가에 대해 비판자들은 본인들의 메스가 쓰이는 영역에 대한 겸손함이 있는가를 따져보아야 한다. 신학이 먼저인가, 성경이 먼저인가. 성경이 먼저인가, 신앙이 먼저인가. 논리적 고담을 하자는 말이 아니다. 결국 현실이 있고, 현실을 언어적으로 재구성하고, 다시 이를 바탕으로 학문 분과가 만들어지는 것은 비단 성경과 신학이 아니라 인간사의 모든 양상이다. 그러다보니 학문은 학문적 성과의 가능범위와 불가능 범위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흡사 비판자들의 태도를 보면 자신들이 진리 감별사인 듯한 태도를 보인다. 만약 문제가 있다면 사실의 진위 여부가 문제이겠고, 그 다음은 사실 왜곡을 통한 이득의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논란의 과정은 그것보다는 애초에 신앙 경험 자체가 성경적이냐 비성경적이냐 하는 식이다. 더구나 잣대는 개혁신학이다. 개혁신학? 개혁신학이라는 단어가 무슨 만능키인가? 500년 전에 나왔던 학문적 방법론이었고 이전과 이후로 얼마나 하나님과 교회를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도구와 방법들이 고안되었던가. 더구나 개혁신학 역시 이 후 얼마나 다양한 과정을 거치면서 분화되었는가.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이들이 이상한 감별사 노릇을 한다. 몇몇 신조를 읊어대거나, 칼뱅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든지,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정도를 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게 정상적인 태도인가. 적당히들 하시라. 모든 학문은 한계가 있고, 유용함과 무용함이 있다. 전천년설이 맞는가, 후천년설이 맞는가. 아니면 무천년설인가. 본인들의 입장차가 있고, 특정 입장이 모든 것을 해결한 적은 존재한 적이 없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개혁신학자들은 이 부분에서 겸손함을 잃었다.

더구나 황당한 원리주의적 태도도 있다. 잠시 이야기를 돌려서 김동호 목사의 청부론 이야기를 하겠다. 당시나 지금이나 나는 그의 청부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내 입장에서 청부론이라는 것이 얼마나 동의가 되겠는가.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비판자들의 담론이다. 당시 비판자들은 원론 그 이상 무엇을 보여주었던가. 세상은 원론이 아니다. 수많은 결이 있고 맥락이 있고 수많은 부분적인 가치와 자취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관습도 있고 정치도 있고 타협도 있는 것 아닌가. 어찌됐건 김동호 목사는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가고 있고 수많은 비판자들은 지금도 그가 왜 명성교회를 비판하냐며 원리주의적인 비판만을 가하고 있지는 않은가. 도대체 본인들은 무엇을 이루었길래! 이런 식으로 말하면 성과주의라고 공격을 하겠지만 답답한 것은 답답한 것 아닌가.

셋째, 일부 급진적인 해석 역시 간과할 순 없다. 이게 사실 가장 중요하다. 아얘 은사와 예언 자체를 부인하려는 방향. 어느 시절의 급진적인 상황화 신학인지 참으로 대한민국의 지성사는 수준이 낮고 시기적으로 너무 늦다. 지금이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계 종교철학자인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나 영국의 신약학자 존 로빈슨(John Robinson, 1919-83), 미국 신학자 하비콕스(Harvey Cox, 88) 같은 식의 세속주의를 이야기할 때인가.

 

결국 사랑하려는 의지 밖에 없다?

어처구니가 없다. 그렇다면 왜 신앙을 가지는가. 그곳에 신비와 이적과 인간의 힘으로는 넘을 수 없는 놀라움이 없다면 뭐하러 신을 믿는가. 하다못해 무당을 찾아가도 복을 구하게되고 인간의 삶이란 본디 비천하기 짝이 없고 그럭저럭 살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건만 왜 굳이 신을 찾는단 말인가.

신비한 신앙적 경험을 이야기하라면 나 역시 넘쳐난다. 김요한 목사처럼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서는 다른 문제일지 모르겠지만 지독한 합리주의자에 성서신학적 관점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은 여전히 신비이며 기적이다. 아무 길도 모르는 상황에서 기도 가운데 특정 회사 이름을 받아서 그 회사에서 투자를 받아서 사업을 한 적도 있고, 하늘 문이 열리고, 비가 내리고 멈추고 하는 신비한 일들 또한 있었다. 복음전도의 마음을 먹었을 때 내 계획보다 훨씬 풍성한 전도의 열매를 맺기도 하였고, 수많은 불가능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 숱한 위기를 뚫기도 했다.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이지 살아계신 하나님의 숨결이다. 그것이 없이 30년 이상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단 말인가.

너도 결국 근본주의자구나식의 비판은 참으로 우습다. 책 몇 권 읽고 극도로 날카로워진 이성을 가지면 타인은커녕 자기 자신에게서 무엇이 조금이라도 바뀔 줄 아는가? 그리고 누구는 그런 날카로움 그런 지적 회의주의에 빠져 본적이 없는 줄 아는가? 본인이 치기어린 과정을 겪는 것과 세상이 복잡다단한 현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확연히 다른 문제이다. 경험해보지도 누려보지도 못하면서 기껏 세속 학문의 방법론 몇 개 가져와서 들먹이면 그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했다? 이보다 오만한 태도가 어디 있을까.

무엇보다 토론의 방법이 가장 마음에 안 든다. 어느덧 우리 사회는 혐오, 혐오를 혐오하는 식의 이상한 논쟁 방식이 주류가 되어가고 있다. 건강하고 치열한 토론, 공부를 하거나 현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아닌 문제가 생기면 기다렸다는 듯이 편을 가르고, 상대를 규정하고 각하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누리려고 한다. 선한 영향력을 주지 못할 것이면 나쁜 것을 배우지라도 말아야 할 것인데 페이스북을 보고 있으면 콕찝어서 공격하고, 인격 말살적인 표현들을 쓰는데 주저함이 없다. 그런데? 그렇게 비판하는 상대가 무슨 히틀러라도 되는가?

나 역시 참으로 다양한 공격에 지친다. 본인의 짧은 지식과 안 맞으면 틀렸다고 규정하고, 방대한 작업에서 일어나는 부수적인 실수를 두고 모멸적인 비판을 가하고, 본인의 입장과 다르면 뉴라이트-식민사학자 같은 말을 부지기수로 쓴다. 나름대로 매우 개혁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하면서 꼰대식으로 가르치려는 목사들, 혈기 방자한 육두문자를 날리는 활동가들 앞에 어디 한두 번 괴로웠던가최소한의 기준이라도 세워보았음 좋겠다. 감당할 수 없는 주제에 대해 함부로 댓글을 달거나 험담을 하지 않는다던지, 문제가 부정부패인지 논쟁적인 주제인지를 두고 그에 걸 맞는 논쟁 방식이나 태도를 구축하던지 해야 할 것이리라.

나는 지식인이고, 비판적이다. 이것이 모든 행태를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뜩이나 반지성주의에 비판정신이 없는 한국교회는 이런 극히 소수의 논객들에 의해 더욱더 보수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은 왜 안하는가. 작작들 좀 하시라. 도대체 무엇이 곳간에 차있다고 이런 식들인가. 참으로 보기에 안쓰럽고 고통스럽다.

 

글쓴이 심용환은, 작가이며,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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