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 논쟁이 서글프다.
은사 논쟁이 서글프다.
  • 김영웅
  • 승인 2017.12.07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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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사람과 상처 준 사람 모두에게 회복되는 은혜가 임하길
영화 남한산성
영화 남한산성 ⓒ남한산성

특수한 상황에 일반적인 잣대를 들이댈 땐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그 상황에 처한 사람을 마녀로 몰아 불에 처형하거나, 처형하자는 데 아무 생각 없이 동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잣대는 무수히 많은 특수한 상황들이 종결된 후 그것들이 가진 패턴을 파악한, 경험적이고 통계적인 하나의 제안에 불과하다. 결코 모든 일을 해결 할 수 있는 진리의 만능열쇠가 아니다.

안타깝게도 우린 그것이 만능열쇠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생각하지 않으면 그 조류에 휩쓸려갈 수밖에 없다. 참고로, 가만히 정지해 있을 때만 속도를 못 느낀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시속 300 킬로미터로 직선 코스를 달리는 조용한 KTX 안에서 창문을 가린 채 옆 사람과 오징어 뜯으며 노닥거릴 때도 당신은 속도를 못 느낀다. 심지어 당신이 가만히 있다고 생각할 때조차도 당신이 서 있는 이 지구라는 둥근 물체는 당신이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돌고 있다. 마찬가지다. 당신이 생각 없이 사는, 그 멍청한 조류에 휩쓸려갈 때조차도 당신은 아마 당신이 가장 안정적인 중심을 잡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니다. 당신은 급한 속도로 휩쓸려가고 있다.

어릴 적에는 자신의 직간접적인 경험을 주무기로 하여 인생을 통달한 듯한 사람이 정말 부러웠다. 어려운 일에 부닥쳤을 때, 그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면 언제나 해답을 즉시 들려주었다. 그 해답대로 하면, 일은 그럭저럭 풀려나가곤 했다. , 어쩜 그렇게 말은 잘하는지. 그리 늙지 않은 나이임에도 본인보다 나이 많은 분들에게조차 해답을 척척 내놓았다. 사람을 울게도 만들고 웃게도 만들고, 나무랐다가도 금새 격려하여 힘을 북돋아주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보단 그분을 찾아가서 조언을 듣고 빨리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나았다. 방언과 예언도 다 필요 없었다. 그분의 경험이면 모든 게 끝난 문제였다. 점집 가는 복채도 필요 없이 그냥 교회 가서 그분에게 물어보면 되는 것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지금 난 그분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참 어리석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자신이 듣고 싶은 것을 듣길 원하는 법이다. 그 사람은 그런 심리를 잘 파악하고 있었고, 그것을 자신의 '상담'에 적극 활용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문제가 직접 해결되지 않아도 듣고 싶은 답을 들었다면 대부분은 그냥 넘어갔다. 절대 그분을 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그분이 상담이나 문제해결의 은사가 있었다고 말하기보다는, 굳이 은사를 하나 말해보라고 한다면, 자기의 시간을 내서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고 그 사람들의 비위를 맞춰줬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타인을 위한 행동이었다기 보단 자신의 자랑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만 말이다. 결과적으로 그 사람은 어쨌거나 상담을 해 준 꼴이 되었고, 상담 받은 사람들은 어쨌거나 적어도 기분이라도 좋아졌었다. 돈도 내지 않고 말이다. 그리고 교회에서 그런 일들 (상담)이 일어났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분이 예언의 은사라든지 상담의 은사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뭣도 잘 모르는 나는 그런가 보다 했다.

요즘 은사에 대해서 말이 많다. 어떤 책 때문에 토론에 불이 붙은 것이다. 상황은 대충 큰 양대 산맥으로 나눠져 있는 듯한 양상이고, 둘 사이의 골짜기는 깊기만 한 것 같다. 언뜻 보니 친구가 적이 되고, 적이 친구가 되는 케이스도 왕왕 있는 것 같다. 페이스북이라는 사이버 공간의 비애다. 참고로 난 아직 그 책을 읽지 않았고, 요즘엔 통 바빠서 대부분의 포스팅들을 읽지도 못했다. 몇몇 글들을 내 시간이 잘 맞았을 때 읽어 보았을 뿐이다. 그래서 이 글은 순전히 은사에 대한 내 경험과 생각에 대해서다. 이 글은 괜히 우회적으로 고급스럽게 누군가를 까는 글이 아님을 적시한다. 상황이 첨예한 시기라 이렇게 내가 스스로를 변호한다. 슬프다.

노력해서 가질 수 없는 신비한 능력을 가져, 은사를 가지지 못한 자에게 영웅시 되는 은사자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의 미천한 신학적/신앙적 지식으로는, 그런 은사자는 차라리 은사를 받지 않는 것이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결과론적으론 주술을 외우는 마법사나 점쟁이와 똑같기 때문이다. 모세만 지팡이를 뱀으로 변신시킬 줄 알았던 게 아니다. 이집트의 요술사도 할 줄 알았다. 또한 그들은 물을 피로 변하게 할 줄도 알았다. 그러나 모세가 했든 이집트의 요술사가 했든 상관없이 그런 기적은 바로의 마음이 더욱 강퍅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냐고 말한다면, 글쎄, 할 말 없다.

신비함을 겸비해야만 은사가 있는 건 아니다. 남들 할 줄 모르는 능력을 지녔다고 자랑할 것 없다. 남들 얘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도 은사다. 그것은 은혜 받은 자가 은혜를 나누는 모습의 연장선에 있으며,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호와의 공의를 행하는 모습의 단편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위에 언급했던 인생 달관한 듯했고 약장수 같았던 그분도 자기 시간을 들여서 남의 얘기를 들어줄 줄 알았다.

그러나 우린 남의 얘기를 들어주길 잘 하는, 성품 좋은 사람을 은사자로 여기며 신통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는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르나 현실과는 동떨어진 얘기다. 우리가 은사라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 뭔가 신비하고 신통하게 보이는 것들과, 그래서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대단하게 보이게 만드는 것들이다. 왜일까? 누군가는 그것이 성경에 적혀 있는 현상이라거나 바울이 말한 설명이라고 이유를 댈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왜 그런 설명을 들으면 아론의 송아지가 생각날까? 문자적인 은사의 종류에 진정한 은사의 의미와 목적을 모두 구겨 넣으려니 모든 게 부서지는 느낌이다. 부질없이 느껴진다. 마치 할례와 율법이 바울이 말한 칭의를 모두 충족시켜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랄까. 하나님나라와 복음에 유익하지 않다면 할례든 율법이든 은사든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심지어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는 것도 칭의와 한 몸인 성화 과정이 보여지지 않는 한 오히려 하나님나라 복음에 해가 될 텐데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21세기의 컨텍스트에 맞는 은사는 진정한 소통과 공감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인 것 같다. 인공지능의 급속한 발달로 현존하는 수많은 일자리가 위협을 받는 시대,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인해 고도로 편리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인간 냄새 나는 공간이 그만큼 줄어들어 가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나 이메일 등의 인터넷 시대에 소통의 부재가 뭔 말이냐 싶기도 하겠지만, 그런 것들이 전혀 없던 시절을 경험한 나는 소통의 부재를 강하게 느낀다. 특히 이번 사건으로 인해 한 무리인 듯싶었던 사람들이 편이 갈리는 현상을 똑바로 목도한 사람으로서, 사이버 공간에서의 소통에서는 진실됨이 턱없이 부족하며, 그래서 인간미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부대끼더라도 시간을 내고 공간을 마련하여 직접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는 것, 그래서 서로를 알아가는 것. 그러면서 공감하며 소통하는 것. 나는 그런 곳에서 일상 속에 임한 가장 가깝고도 먼 하나님나라를 찾는다. 이런 곳엔 굳이 예언과 방언 같은 은사도 필요 없을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자발적인 믿음의 순종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곳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현장이리라 믿는다.

은사자가 대단해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뭔가가 불안하거나 불만족스럽다는 사인이지, 그 은사로 인한 신비한 능력 (이 능력으로 자신의 노력과 인내, 성실한 땀을 면제받아 뭔가를 크게 한 번 이뤄보려고 한다면)으로 신분상승을 하거나 로또에 당첨되듯 대박을 터뜨리라는 하나님의 사인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성경에 기록된 1세기의 은사자들이 21세기인 지금도 있다는 사실을 우린 어쩌면 서글프게 여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난 은사중지론자도 아니고 은사지속론자도 아니지만, 이번 은사 논쟁은 날 서글프게 만든다. 상처받은 사람과 상처 준 사람 모두에게 회복되는 은혜가 임하길 소원한다.

 

글쓴이 김영웅박사는, 하나님나라에 뿌리를 두고, 문학/철학/신학 분야에서 읽고/쓰고/묵상하고/나누고/배우는 것을 좋아하며, 분자생물학/마우스유전학을 기반으로 혈액암을 연구하는 가난한 선비/과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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