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 예수쟁이에겐 신비보다 일상이다
어른이 된 예수쟁이에겐 신비보다 일상이다
  • 최주훈
  • 승인 2017.12.06 23: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탄의 메시지는 신비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

 

“산타클로스는 없다”며 놀리던 교회 누나들 때문에 순수했던 내 동심은 산산조각 났다. 그 후로 성탄절은 그저 휴일, 아니면 교회 행사 때문에 바쁘고 귀찮은 날이었을 뿐이다. 거기엔 루돌프도 없고, 천사 나팔소리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런 동화 같은 12월은 그때부터 끝났다. 그렇게 건조하던 성탄을 여러번 지나 이제 어른이 되어 다시 맞는다. 그런데 어른에게 찾아온 성탄은 신비보다 더 중요한 게 숨겨 있다며 속삭이며 다가온다. 그렇다면, 신비가 사라진 성탄은 우리에게 어떤 가치가 있을까?

보통 예수 믿는 이유를 보면, 하늘에서 천사들의 찬송이 울려 퍼지며 아기 예수가 탄생하는 것처럼 신비한 일이 생기기를 바라기도 한다. 가난한 사람은 갑자기 부자 되기를 바라고, 이전에 없던 능력, 재물, 행운이 찾아오길 소원한다. 어떤 사람은 방언, 치유, 미래를 보는 환상 같은 신비한 능력 받는 것을 신앙의 목표로 삼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신비한 장소, 신비한 능력 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길 소원하는 사람들이 적잖다. 그런 사람들은 만나면 왠지 대단해 보인다.

그러나 성탄의 메시지는 그런 신비한 것들에 별 관심 없어 보인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성탄의 메시지는 신비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 한 가운데 찾아왔다. 예수님의 부모는 요셉과 마리아이다. 그들은 아주 평범하다 못해 여관방 하나 구할 수 없을 정도로 권력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돈도 없고 빽도 없어 이른 나이에 조혼해야 할 만큼, 없는 집안 출신, 14살의 소녀가 바로 마리아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힘없고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다.

장소는 또 어떤가? 베들레헴을 생각해 보자. 세계의 수도 로마, 성도 예루살렘, 항구 도시 가이사랴, 욥바, 아름다운 갈릴리 해변 의 디베리아스도 있는데, 하필이면 이 작은 마을 베들레헴이다. 오죽하면 미가 선지자가 주전 650년경에 예언하기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가장 작다!”고 했을까? 이스라엘 땅의 평범한 서민마을로 지금도 팔레스틴 통치아래서 인구수는 내가 사는 용산구 후암동 보다 적고, 가난하고, 평범한 마을일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작고 가난한 마을을 선택하여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다.

어디 그것뿐이랴? 아기 예수 탄생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사람이 누구인가? 지식인이나 교계지도자, 사회 지도층이 아니었다. 성경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목자와 동방박사이다. 유대인은 선민이다. 선민으로서 지켜야할 최저선은 우리가 다 알듯 안식일 준수이다. 이 법은 그들에게 최고의 법인 동시에 가장 기본이기에 지키지 못하면 죄인이고, 지옥에 갈 자로 낙인찍혔다. 목자도 유대인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직업군에 속해 있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 준수를 하기 위해 고용한 가난한 유대인 하층민들이 바로 목자들이다.

자기들이 고용해서 안식일을 지킬 수 없도록 원천봉쇄 해 놓고선 고용주가 피고용인을 향해 죄인이라고 부르는 우스운 꼴이 바로 이런 경우다. 어쨌튼 유대인들은 목자들을 죄인으로 분류할 정도로 누구하나 관심을 갖지 않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관심 받지 못하고 소외된 직업군을 선택해서 성탄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셨다.

동방박사는 어떤가? 이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다. 그것도 유식한 ‘박사’라는 뜻이 아니다. ‘박사들’이라고 번역하는 원문은 ‘마고이’라고 되어 있는데, 요즘으로 말하면 ‘점쟁이들’이란 뜻이다. 다시 말해 ‘동방박사’는 동쪽나라 출신 용한 외국 점쟁이라는 번역이 더 쉽고 정확하지 않을까? 외국인 출신 용한 점쟁이가 동방박사다. 유대인들 생각에 외국인은 구원의 반열에서 이미 제외된 자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유대 경계선을 넘어 온 세상에 하나님 아들의 소식을 전하셨고 심지어 점쟁이에게도 이 소식을 전하셨다. 이쯤 되면 거룩과 속된 것의 구별이 모호해진다. 우리는 이제껏 성속의 구분선을 그려가며 좋은 신앙 나쁜 신앙을 논해 왔지만 최소한 성탄의 메시지는 우리가 그려대는 구분선과 담벼락을 지워버린다. 그것도 하나님 자신이, 말씀을 통해서.

무슨 말일까? 성탄의 신비는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며, 우리가 구별하고 차별하는 모든 이들의 삶의 자리까지 미치는 소식이란 뜻이다. 이렇듯 하나님은 특별한 것, 신비한 것, 우리가 그어놓은 경계선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상 한 가운데로 밀치고 들어오신다. 성탄의 복음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우리가 매사를 구분하듯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따로 따로 구별되지 않는다. 가끔 보면, 거룩한 일 따로, 평범한 일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을 본다. 그래서 교회일 따로, 사생활 따로, 따로국밥 인생을 사는 사람이 많다. 광화문과 교회가 따로 떨어진게 아니다.

한국교회가 예수신앙의 힘을 잃어버리고 가나안 성도가 급속히 늘어난 이유가 여기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주일엔 거룩한 성도로, 나머지 6일은 악독한 직장상사로, 욕심 많은 욕쟁이 아줌마로, 세상과 교회 사이를 오가며 복면을 썻다 벗었다 하며 사는 게 지금 우리 모습인지도 모른다. 신비가 사라진 12월, 다시 성탄을 기다린다. 교회 누나들 덕분에 산타클로스는 사라졌지만, 어른이 된 나는 더 중요한 일상의 가치를 찾았다. 어른이 된 예수쟁이에겐 신비보다 일상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