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에 대해 ‘작정하고 쓴 책’이지, ‘기도론’ 책이 아니다.
기도에 대해 ‘작정하고 쓴 책’이지, ‘기도론’ 책이 아니다.
  • 정현욱
  • 승인 2017.12.02 12: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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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한, 지렁이의 기도, 새물결플러스, 2017년
김요한, 지렁이의 기도, 새물결플러스, 2017년
김요한, 지렁이의 기도, 새물결플러스, 2017년

처음 3일 동안은 하루 온종일 머리가 아팠다. ... 저녁에 나는 이것을 고쳐달라고 기도하였다. 목요일 아침에 내 두통은 사라졌다.”(존 웨슬리의 기도. 1746.7.6.)

기도 참으로 어려운 주제입니다. 기도에 관한 수십 권의 책을 읽고, 날마다 기도의 자리에 있어도 기도는 결단코 쉽지 않은 주제입니다. 오래전 리처드 포스터의 <기도>를 읽고 다양한 기도의 형태를 발견하고 기도의 풍성함에 놀란 적이 있습니다. 소나무 뿌리를 뽑는 것이 진정한 기도라고 배워온 저로서 리처드 포스터의 기도는 기이할 만큼 놀라웠습니다. 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생각해보니 리처드 포스터의 기도는 너무 이론적이라는 생각에 닿았습니다. 그것은 기도의 다양한 형태를 이론적으로 정립한 것이지 진정한 기도라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로 다양한 기도의 책들을 접했지만 기도는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오늘 저는 또 한 권의 기도 책을 접하고 단박에 읽어 내려갔습니다. 처음 이 책을 보고 그다지 읽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기도 책은 거기서 거기라는 선입관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읽기 시작했고, 비판과 옹호의 글을 쏟아냈습니다. 저도 양쪽의 입장에서 쓴 글을 찾아가며 읽어 내려갔습니다.

비판자들의 특징은 대체로 은사 중지론의 입장을 견지하기 때문에 기도의 다양한 응답을 제시하고, 성령의 음성을 자주 언급하는 저자의 주장에 반감을 가지고 있음이 감지됩니다. 보다 온건한 비판자들은 다양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점에서 약점이 있으며, 역부족이라고 평가합니다. 이국진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대감으로 받아 들고 단숨에 읽은 이 책은 아쉽게도 그런 치료제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는 치명적이고 위험한 독소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기도에 관한 이론을 성경의 가르침에 세우기보다는 자신의 경험에 크게 의존하여 세웠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성경에서 발견한 가르침보다는 실제적인 경험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 더 열광하고 환호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기도에 관한 가장 정확한 가르침은 오직 성경뿐(sola scriptura)이다. 성경 외에 다른 어떤 추가적인 계시나 권위적인 주장을 덧붙이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더 나아가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하고 있습니다. 저도 역시 그 부분에서 약간 염려가 됩니다. 그러나 무작정 그렇게 비판하기에는 모순이 적지 않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기도에 대해 작정하고 쓴 책이지, 신학적 지식을 추구하는기도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가볍게 읽을 수 있는 평범한 책은 아닙니다. 저는 이 책이 가진 몇 가지의 특징들을 주제별로 정리한 다음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지를 제시해 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순전히 저의 개인적인 판단임을 알려 드립니다.

 

1. 은사는 중지되었는가?

아마 이 책에서 가장 화두가 되는 부분은 바로 은사론입니다. 개혁주의 관점에서 은사는 중지되었습니다. 장로교단에 속한 목회자들은 저의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알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고민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과연 은사는 중지되었는가 하는가입니다. 저는 B. B. 워필드(B. B. Warfield)<기독교 기적론>을 읽어 보았기 때문에 기독교 안에서 기적은 이미 중단되었다고 믿습니다. 계시와 은사 중지론은 개혁주의 노선에서 옹호하는 계시관입니다. 그러나 그 기적이 무엇인지 다시금 질문한다면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워필드는 그의 책에서 성경에 더 할 수 있는 기적은 없지만 말미에 그럼에도 열린 마음으로 기적이 완전히 일어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책에서 김요한 목사는 방언과 방언 통역에 대한 실례를 몇 번을 걸쳐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은사 중지설을 주장하는 개혁적의 성령론과 맞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는 지루하고 다양한 신학적 논쟁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신학적 논쟁을 하는 것은 옳지 않아 보입니다. 문제는 김요한 목사가 언급한 방언과 방언 통역이 사실이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거짓이며, 꾸며낸 것이라면 김요한은 목사는 거짓 선지자의 부류에 넣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거짓말쟁이기 때문입니다.

방언과 방언 통변이 가장 실감 나게 기록된 곳은 13오직 사랑하게 하소서부분입니다. 방언 통변 은사가 있는 Y사모님께 들은 이야기로 소개합니다.(203) 방언 통변을 해보고 싶은 두 장로님이 지리산 자락에 가서 겪은 일입니다. 한 장로님은 통변 하기 전 자기 자랑을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한 장로님은 랄랄라만 나오고 더 이상 진척이 없어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방언 기도를 시작하자 통변을 하게 됩니다. 통변의 내용은 자기 자랑하던 장로님은 하나님이 책망하시고, 투박한 방언을 하던 장로님께는 내가 너를 참으로 기뻐한단다’(204)의 통변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시며, ‘우리의 입술의 기교 혹은 혓바닥 놀림에 현혹되는 분이 아니라’(204)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사실인 가입니다. 이것은 Y 사모님과 두 장로님께 물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방언과 방언 통변 은사를 중지된 것이 아니라고 과감하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이 부분이 사단의 역사니 귀신의 영을 받은 것이니 하는 주장은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만약 그분들이 이 책을 읽고 아니라고 한다면 김요한 목사는 사기꾼 목사가 맞습니다. 그러나 만약 사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충분히 그 부분에 대해 인정하는 것이 신사적이고 신앙적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단 한 번도 방언이나 방언 통변이 중지되었다고 말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지금 몬타누스주의나 루터 시대 뮌쩌(Thomas Muntzer)와 함께한 예언자들을 상상할지 모르지만, 그 부분은 논외로 하겠습니다. 저는 은사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는 해석과 표현의 문제이지 그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2.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시는가?

두 번째 고민해야 할 부분은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고 계시는가?’입니다. 이것은 은사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양상이 조금 다릅니다. 지혜롭지 못한 일반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말해 버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성령께서 음성으로 들려주셨다고 말합니다. 김요한 목사는 후자에 속합니다.

그날 대화 중에 내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불쑥 이렇게 말했다.”(114)

그 순간 성령께서 내게 이런 말씀을 주셨다.”(117)

그 순간 성령께서 내 마음에 감동을 주셨다.”(191)

그런데 기도하려고 무릎만 꿇으면 성령께서 주시는 첫마디가 내가 네게 돈을 줄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였다.”(235)

벌써 네 곳을 인용했으니 더 이상 하지 않아도 김요한 목사가 어떤 방식으로 말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정말 일어날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김요한 목사는 정말 사실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적어도 김요한 목사가 마음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일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을 직접적으로 비판했던 바른믿음 정이철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언기도라는 것은 없습니다. 기도하면서 예언을 받았던 구약의 선지자들과 특별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계시가 주어지는 과정 즉, 성경이 기록되는 과정에서 쓰임을 받은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이 완성된 이후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면서 예언을 받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초월하여 하나님과 직통으로 통하는 사람을 직통 계시자라고 하는데,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단이라는 사실은 건전한 기본상식입니다. 김요한 목사가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직통으로 통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예언기도를 한다면 김요한 목사는 직통 계시 이단자입니다.”(정이철 목사, 바른믿음에서 가져옴)

여기서 정이철 목사는 계시를 성경을 기록하기 위해 사도들과 사도적 제자들, 즉 성경 기록자들에게 임시적으로 허락하신 것으로 한정시키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정이철 목사의 주장 역시 개혁주의가 표방하는 계시론입니다. 성경이 기록된 후 더 이상 계시는 존재하지 않으며,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단자로 못 박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약 정경론성경 염감설등의 성서학을 파고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 논쟁은 어떤 면에서 무가치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김요한 목사는 성경을 기록하기 위한 계시의 의미로서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런 오해는 김요한의 목사의 표현 방법의 문제로 보입니다. 즉 누구나 마음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듣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령의 음성으로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깨달아졌다는 표현도 사용합니다. 저도 종종 그런 음성을 듣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말씀하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읽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읽음이 아님 들음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면 속에서 끊임없이 양심의 소리를 듣습니다. 종종 그것을 성령의 음성으로 표현합니다. 여기서 잠깐 헤르만 바빙크의 말을 들어 보겠습니다.

그것들(계시의 방편으로서 매개(媒介)) 모두는 하나님이 은혜로 인간에게 자신을 낮추고 인간에게 자신을 맞춘다는 생각에 기초한다. 그리고 그것들 모두의 방식은 하나님이 자신의 임재를 느끼게 하며, 자신의 음성을 듣게 하며, 자신의 사역을 볼 수 있게 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현현(顯現), 말씀, 행위를 통해 인간 자신에게 계시했다.”(헤르만 바빙크 <교의학 1, 525-6)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바빙크는 자연으로, ‘복과 심판으로, ‘사람의 마음과 양심 가운데에서도, 심지어는 우상숭배조차도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나타난다고 말합니다.(426) 하나님은 언제나 계시합니다. 하지만 그 계시가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곳에서 왔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지극히 모호합니다. 김요한 목사가 언급한 예들은 대부분 사실로 보이며, 현실 속에서 실현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반감을 일으키는 부분은 표현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겹 따옴표로 표시하여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강조와 배타적 속성으로 구별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저는 여기서 김요한 목사의 표현을 한국적 표현법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저는 여기서 이 책 속에서 언급하고 있는 몇 가지 기도에 대한 이야기들을 어떤 관점으로 읽어야 할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기도의 지정의(知情意)

3. 기도의 지(): 기도는 지성 훈련입니다.

김요한 목사는 10장에서 홍혜선의 예를 들며 잘못된 예언 때문에 많은 사람의 사생활이 무너지고 가정이 파탄 났으며, 또한 이 땅에서 개신교가 사람들의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되었’(167)다고 말합니다. 일반 교인뿐 아니라 목사들까지 거짓 예언에 속아 넘어가는 이유가 반 지성주의에 있다고 말합니다. ‘부실한 지성을 갖고 있다면 기도 역시 그만큼 왜곡될 가능성이 높아’(169) 질 것입니다. 우리는 신학과 기도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신학의 깊이와 영성의 깊이는 정확하게 정비례할 수는 없으나 대체로 비례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되고, 아는 만큼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다양한 기도에 관한 신학적 지식을 전해 줍니다. 특별히 삼위일체론적 기도를 주장하는데 이것은 올바른 기도를 위한 전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기도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 성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며, 주 예수의 영이신 성령의 중보와 말할 수 없는 탄식 기도의 도움을 만끽한다.”(150)

3장에서 기도를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친교로 정의합니다. 초월적 성부 하나님은 성육신 성자 예수님을 통해 자신을 계시합니다.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됩니다. 김요한 목사는 이곳에서 다마스쿠스(Damascus)의 요한이 주장했던 페리코레시스적 순환을 강조합니다. 일체보다 삼위를 강조한 동방 신학은 삼위가 페리코레시스적 순환, 즉 삼위가 내주하고 서로에게 침투함으로 신적인 춤 속에서 하나를 이룬다고 보았습니다. 삼위일체론적 기도는 타인을 독점하지 않고 공유함으로 친밀함을 누릴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4. 기도의 정(): 기도는 정서적 관계입니다.

기도에 대한 수많은 정의가 있습니다. 결론은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입니다. 이 부분은 3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강조됩니다. 저자는 기도의 영광과 특권을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사귐의 기도에 달려 있’(73)다고 말하며 이렇게 주장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유비적으로 참여하여, 하나님과 사랑의 환대와 친교를 맛보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신적 비밀을 배울 수 있다.”(73)

또한 4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함에서는 아버지’ ‘아빠라는 호칭 속에 담긴 그리스도인의 특권과 친밀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저자는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소개하면서 기쁨’ ‘행복’ ‘쾌락등의 단어를 거의 구사하지 않습니다. 좀 더 풍성한 서정적인 언어로 하나님의 친밀이 주는 기쁨을 표현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5. 기도의 의(): 기도는 영적 훈련입니다.

어느 날 기도를 잘하고 싶은 집사님이 찾아오셔서 어떻게 하면 기도를 잘할 수 있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 집사님에 의하면 단체 기도를 할 때는 한 시간도 하는데 불을 끄고 개인 기도를 시작하면 5분도 버티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기도하고 싶은 비결을 알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먼저 5분만 하시고 그냥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다음날은 1분만 더 버티십시오. 그러면 6분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조금씩 기도의 시간을 늘려 보십시오. 그렇게 하다 보면 삼십 분이 되고 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기도는 엉덩이로 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언어학자 사이토 다카시(孝·齊藤)<원고지 10장을 쓰는 힘>(루비박스, 2005년)에서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먼저 원고 열 장 쓰는 힘부터 기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매일 꾸준히 쓰는 연습을 하다 보면 잘 쓰게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어떤 신령한 힘에 의해 이루어지는 대단한 것처럼 여기지만 기도도 훈련입니다. 날마다 운동하는 사람이 몸매가 좋고 지구력이 좋은 것처럼, 기도 역시 일상의 삶에서 꾸준히 하는 것’(332)입니다. 저자는 끊임없이 기도를 강조합니다. 이러한 기도 강조는 절대 지나치지 않습니다. 매일의 기도, 일상의 기도, 특별한 기도의 시간을 갖는 것 등 기도는 일단 해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나가면서 : 나는 이 책을 어떻게 읽었는가?

저는 이제 이 책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를 마치려고 합니다. 앞선 주제들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은사 중지론에 대한 이야기는 난해한 문제입니다. 은사 연속론을 믿든, 은사 중지론을 믿든 상관없이 지금 현재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예언이라고 말하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많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예언이 될 수도 있고,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김요한 목사는 이런 부분에서 있어서 한국적 표현법을 통해 신학적이 아닌 통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개핀이나 워필드 등의 성령론이나 기적론을 유심히 읽어보면 이러한 일반적 현상에 대한 부분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냥 무시하는 것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는 자신이 확신하는 신학적 범주 안에서 결정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말씀에 대한 부분에서도 여전히 동일하다고 봅니다. 표현 상에 있어서 경계선을 넘어 보이는 부분들이 보이지만, 저는 그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예화 속에 나타난 인물들이 지금 실존하고 있으며 책을 읽고 거짓이라고 반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는 이 책을 은사론적으로만 읽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먼저 이 책은 기도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이론들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이 15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썼기 때문에 문장이나 내용이 명료하고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부분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다시 이 책을 낸다면 좀 더 체계적으로 다듬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즉 삼위일체론적 기도가 무엇인지 몇 군데 흩어져 있지만 명료하게 인식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생각나는 대로 써 내려간 탓에 모호하게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논리적 결함이나 지적 빈약함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필요한 부분에서는 다른 책들을 참고하여 논지를 보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 방법으로 읽기를 권합니다.

 

첫째는 기도에 대한 신학적 지식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저자는 신학 책을 전문적으로 펴내는 출판사 대표입니다. 이름만 대표가 아니 자신이 직접 교정을 보는, 즉 읽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이 접근하기 힘든 책을 글자 하나 단어 하나 씹어 먹듯 읽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술술 써 내려간 책이라 할지라도 읽어보면 신학적 지식이 탄탄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이 책을 읽는다면 저자가 말하는 다양한 기도에 대한 신학적 지식을 배울 수 있습니다.

 

둘째는 기도의 세계가 얼마나 다양한지 배울 수 있습니다.

어떤 분과 대화 중에 <지렁이의 기도>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그분의 생각이 궁금해서 기도 나니 어떻던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분은 대뜸 저는 솔직히 이 책 읽고 약간 주눅이 들었어요.’라고 답했습니다. 그분의 이야기의 요지는 이것이었습니다. <지렁이의 기도>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엄청난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나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가?’였습니다. 당시에는 제가 그 책을 읽지 않아서 그 의미를 정확하게 몰랐습니다. 어제 그 책을 완독 하고 나서 받은 저의 느낌도 그분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의역해보면, 왜 하나님은 김요한 목사의 기도를 잘도 들어주시고, 보여 주시고, 들려주시는데 나에게는 침묵하시는 걸까?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몇 가지 생각정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지렁이의 기도>만 그런 것이 아니고 성경을 읽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자주 합니다. 출애굽기를 읽으면 놀라운 기적들이 있습니다. 바다가 열리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립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이런 일이 없습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하늘에서 불을 내립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없습니다. 복음서를 읽어 보십시오. 기적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런데 왜 우리가 삶은 아직도 배고픔과 상실을 겪는 것일까요? 왜 저의 아들은 기도하고 또 기도해도 여전히 아픈 것일까요? 자주 금식하고 하루에 두 시간 이상을 매일 기도하는데 왜 저에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은 대체로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입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지금이 현실이 너무나 크고 힘들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이 크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김요한 목사에게는 하나님께서 모든 기도에 응답했을까요?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을까요? 아니라고 봅니다. 축약된 문장의 행간 속에서 응답이 있기 전까지의 소외와 고뇌,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서글픔이 있습니다. 단지 급하게 써진 결론으로 인해 독자들은 읽지 못하는 것이죠. 이것은 저자인 김요한 목사에게도 서술 방식에 있어서 충분히 공을 들이지 못한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에 대해 충분히 지면을 할애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것은 저자에게 탓할 일은 아닙니자. 저자는 저자 자신의 서술방식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다만,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분이 많이 아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책이 기도에 관련된 모든 책이 아님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많은 책들도 있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이렇게도 역사하시고 있구나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성경은 기적만 있는 것이 아니죠. 출애굽기도 있지만 예레미야 애가도 있고, 욥기도 있습니다. 거절당하고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으로 일관하는 책들도 많습니다. 우리가 과도하게 기적에 유혹되어 왜 나에게만 이런 고난이 올까?’ 아니면 하나님은 왜 나게만 침묵하실까?’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다양한 삶과 은사를 주셨습니다. 아프고 힘든 고난의 삶의 연속이라면 그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며 그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저도 매일 아침 눈 뜨는 것이 아프고 힘이 듭니다. 저녁만 되면 오늘 또 하루를 보냈구나. 내일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나님은 왜 나에게 처절한 아픔을 허락하실까? 걱정하고 고민합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신학 책을 전문으로 내는 출판사의 사장으로서 너무나 한국적인 표현으로 일관된 기도의 예시들이 약간 격이 떨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언어 선별과 글의 체계 자체가 다른 여타 새물결출판사의 책들과 비교됩니다. 그리고 너무 급하게 출판한 탓인지 논지가 불분명해서 의아한 부분도 조금씩 보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저자의 개인적인 성향에서 나온 것 일수도 있습니다.

결론을 내리자면, 기도에 대한 탄탄한 신학적 지식을 제공하고 있고, 일상의 간증들이 버무려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냥 읽는 것만으로 기도에 대한 신학적 지식도 얻을 수 있고, 더 깊은 기도의 세계로 이끌어 간다는 점에서 좋은 책입니다. 다만, 읽을 때 자신의 신학관으로 인해 불편할 수 있고, 응답되지 않는 기도에 대한 부분이 약해 고난 가운데 있는 독자들에게는 약간의 소외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이 책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해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것으로 김요한 목사의 <지렁이의 기도>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마치겠습니다. 이 글은 책 자체에 대한 서평이기보다 이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고민해 본 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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