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의 기도', 배울 것이 많은 책
'지렁이의 기도', 배울 것이 많은 책
  • 민현필
  • 승인 2017.12.02 12: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다름을 무조건 틀림으로 규정하지 말아야
김요한, 지렁이의 기도, 새물결플러스, 2017년
김요한, 지렁이의 기도, 새물결플러스, 2017년

어가며

<지렁이의 기도>를 저는 참 잘 읽었습니다. 배울게 많은 책입니다. 두 번 읽었습니다. 만약 누군가 은사중지론을 명분으로 이 책의 가치를 부정하거나 평가절하 한다면 그것은 공정한 비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분명 일상적인 기도체험과는 결이 다른 기도의 세계를 경험해 오신 분인 것은 맞지만, 방언이나 예언과 같은 은사적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논지의 핵심은 아니라고 봅니다. 목욕물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리는 어리석음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 구지 저의 생각을 간단히 나누고자 합니다.

 

책의 전체적인 흐름

제가 볼 때 교파나 교단을 초월하여 독자들이 이 책에서 좀 더 눈여겨 보아야할 지점은 기도에 관한 삼위일체 신론적, 구원론적, 주석적 근거들과 그 논의들을 바탕으로 기도의 세계를 웅장하게 펼쳐내려고 했다는 점, 그 동안 한국교회 안에 약간은 무용담처럼 전해 내려오는 나무뿌리 뽑는 신앙('물론 귀한 점도 있지만')의 저변에 흐르는 인간적 간절함과 열심으로 균형을 잃었던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로 향하도록 이끌고 있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답되지 않고 거절된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기도들, 심지어 고통의 문제 앞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는 신앙의 현실을 어떠한 신앙적 태도와 관점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를 다양한 실증적 사례들과 함께 따뜻하고 지혜로운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가장 독창적이면서도 인상적으로 읽혔던 부분은 기도에 관한 윤리학적 성찰이 담겨 있었다는 점입니다.

 

저자가 말하는 기도란

저자의 주된 논지를 따라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이렇습니다. 저자는 기도의 궁극적 수원지이자 최종 목적지를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묘사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상호침투와 내주, 상호환대의 페리코레시스적 사랑의 친교를 누리고 계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된 인간은 기도를 통해 이 하나님의 존재방식에 유비적으로참여하도록 초대받았으며, 하나님과의 사랑의 친교와 환대를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생명에 참여하는 가장 훌륭한 방정식이라는 것이죠. 이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신적 비밀을 배우게 되는데, 저자는 이것이야말로 신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과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한 걸음 더 : 삼위일체론적 틀 속에서 본 기도와 기도의 윤리학

기도를 이렇게 삼위일체론의 틀 속에서 이해할 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는 결론은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을 지향하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이웃과의 관계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여, 그분의 형상됨을 회복하여 지식에까지 새로워진 우리 신자들의 특징이니까요. 때문에 나, 내 가족의 안위만을 위하기 쉽상인 우리 기도 생활의 가족주의적 한계성은 점차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고통당하는 이웃을 끌어안는 기도,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기도로 진행되어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에게 기도는 하나님의 신적 비밀과 마음을 배우는 가장 심오한 공부를 의미합니다(50, 57). 이렇게 그분의 마음과 임재가 그의 성전 된 교회를 통하여 고통당하는 세상 사람들을 품고, 땅 끝까지 회복되어 나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기도 공부의 목적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틀 속에서 저자는 간혹 은사적 체험(예언이나 방언)과 같은 개인적인 사례들을 열거하지만, 이는 각자의 신학적 입장과 교파적 성향에 따라 얼마든지 취사선택 할 수 있는 주관적 사례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저자가 제시하는 기도의 의미와 목적에 과한 신학적 논증들은 분명히 보편성을 갖는 것이라고 봅니다.

 

기도의 음지 : 고통 중에 숨어계시는 하나님

이렇게 저자가 그리는 기도의 세계는 분명 우리의 일상을 환히 따뜻하게 비춰주는 양지의 체험입니다. 즉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하고 그분 안에 거하며, 그분의 임재와 영광을 땅 끝까지 회복해 나갑니다. 그러나 저자는 섬세하게도 기도 생활의 음지로 우리를 또다시 초대합니다. , 상실과 고통으로 인해 도무지 기도할 수 없는 사람들을 등장시키는 겁니다. 도무지 기도가 나오지 않는 사람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시며 마치 숨어 계시 것만 같은’ ‘그분의 역설적 임재’(논자가 재해석한 표현)에 대해서 논의합니다. 대표적으로 저자는 박완서와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를 예로 드는데, 특히 월터스토프는 아들을 교통사고로 떠나보내고 나서 1년을 방황하게 됩니다. 마음의 폭풍이 잠잠해질 무렵 어느 날 니콜라스는 아주 단순하고도 심오한 깨달음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고통을 닮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321).

저자에 의하면 니콜라스나 박완서는 모두 끔찍한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곁으로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또 김병년 목사의 사례를 언급하는데, 사모님이 겪으셔야 했던 두 번의 끔찍한 고통과 아픔은 말할 수 없이 참담하 것이었지만 그를 통해 김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더욱 깊이, 더욱 빈번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길을 가다가, 잠을 자다가, 울다가, 웃다가, 욕을 하다가, 끙끙대다가, 심지어 짜증을 내는 중에도...나는 아픔과 상실, 즐거움과 고통이 뒤엉킨 일상을 살아가면서 더 깊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한다“(바람 불어도 좋아, 40; 본서 323쪽에서 재인용)

이렇게 저자가 우리에게 기도의 양지와 음지를 모두 다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영광 받기에 합당하시고, 우리의 기도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시는 마리오네트 인형이 아니라는 의미 아닐까요? 더 나아가 저는 저자의 이런 기술 방식 속에서 한국교회를 향한 깊은 한숨과 눈물을 보았습니다. 구지 열거하지 않아도 그간 한국교회의 미성숙한 기도 신학은 교회 내, 외적으로 자성과 성찰의 목소리들이 높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삶과 윤리가 빠진 기도는 미신이요 주문일 뿐’(308)이라고 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저자는 은혜는 윤리를 내포하며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섬김’(306)이라고 말합니다.

각설하고, 이 책은 국내외 저자들을 통틀어 기도에 관한 어떤 책에서도 볼 수 없었던 탁월한, 그러면서도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에 부합하는 논증이었다고 봅니다. ‘기표’(signifier)기의’(signified)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은사적 체험이라는 기표를 사용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듣는 것이 신학하는 사람들의 기본 자세라고 봅니다. 불필요한 논쟁이 또 일어나는 것을 보니 안타깝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분들 중에서 은사중지론적 입장을 견지하시는 분들은 해묵은 비판보다는(전문적이지 못한 썰전은 무의미한 endless talk이라 생각함) 개혁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이 책보다 더 탁월하고 웅장한, 그러면서도 인격적이신 성령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무게감 있는 책을 써 주시면 어떨까요.

 

나가며

모든 책에 다 동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기본 상식이니까요. 다 동의가 되는 책은 구지 돈주고 사서 읽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신영복 선생의 말처럼 공부는 도끼로 하는 것이라잖아요. 아마존에 보니까, 개신교 목사겸 교수로 재직하다가 카톨릭으로 개종한 이후 카톨릭 신학자가 된 스콧 한(Scott Hahn)이 출간한 어떤 핫한 책에 개신교 목사가 그의 책을 꼼꼼히 읽고서 별 3개를 줬는데, 개신교 목사임에도 공감가는 연구에 대해서는 상당히 호평을 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주해적 근거를 들어 비판하는 부분을 보고서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의 정중한 서평에 대해 경의를 표했는데, 그분의 서평 태도에 감명을 받은 한 네티즌이 이런 댓글을 달았더군요.

이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정중하고 예의바른) 시민적 교양을 갖춘 토론이 너무 좋네요. 이런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실질적인 임재를 보고 있다고 믿습니다
"And I do love the civility of the discussion that I have read here. In this I believe we DO see the Lord's Actual Presence.“

The Lord’s Actual presence! 코람데오를 즐겨 말하는 개혁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실질적 임재방식에 대해서 둔감해서는 곤란하겠지요. 이 책 속에는 분명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요소들이 분명 있습니다(신학적 입장에 따라서). 벌써부터 SNS에서는 이 책을 두고 와글와글 하는 소리들이 들립니다. 그러나 저는 이 책 속에 담긴 은사주의적 요소보다, 그것을 비평하는 방식 속에서 더 큰 불안감을 느낍니다. 다름을 무조건 틀림으로 규정하기보다, 자신의 이견을 어떻게 표현하고 전달할 것이냐에 좀 더 유념하는 신념 있는 시민교양’(convicted civility)이 한국교회 안에 꽃피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욕심일까요.

 

 

글쓴이 민현필 목사는, 경기도 군포시에 자리한 산울교회 부목사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