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방언은 언제 시작되었나?
한국교회 방언은 언제 시작되었나?
  • 옥성득
  • 승인 2017.12.01 13: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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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성득의 새로쓰는 한국교회사

1907년 전후 대부흥 운동에서는 방언이 없었다.

일부 사가들이 게일의 Korea in Transition (1909), p. 216을 인용하여 방언이 있었다고 주장하나, 본문의 문학적 표현을 오독한 결과이다. 본문을 보자. 평양 부흥 소식이 전해지자 만주에서 기독교인들이 평양에 왔다. 중국인 상인들로부터 변화된 한국인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전해들은 후, 길선주 목사와 다른 지도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함께 기도했다.

They prayed, the Chinese in their unintelligible monosyllables, and the Koreans in their world-forgotten language of antiquity.
그들은 기도했다. 중국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의 단음절어로 기도하고, 한국인들은 세상이 잊어버린 고대 언어로 기도했다.

곧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어로 기도했고, 한국인들은 평양의 고대어인 평양 사투리 한국어로 기도했다는 뜻이다. 다른 선교사들의 글에도 방언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사실 당시 선교사나 길선주 등 한국인 교회 지도자들 중에 방언을 체험한 자는 없었다.

반면 대부흥운동 당시 신유의 은사나 축귀의 은사를 받은 이들은 있었다. 김익두는 1903-06년 신학교 재학 때 벌써 신유의 은사를 받아 기도로 병을 고쳤다. 따라서 번하이젤 목사 같은 선교사들은 미국에서 은사중지론자로 교육을 받고 그렇게 가르치다가, 대부흥을 겪은 후 은사지속론자로 변했다또한 한국인들은 이무렵 금식기도와 산 기도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1920년 전후 초기 김익두 부흥운동에서는 신유의 은사, 즉 안수 기도로 병이 낫는 강력한 성령의 이적들이 많이 나타났으나, 방언은 없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의 산물인 김익두 목사는 치유 기적은 피땀 흘린 기도의 힘과 병자 본인의 도덕성이 결합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1912월 달성 현풍교회 집회 때 걸인 박수진의 턱은 김 목사가 3일간 기도한 후 정상으로 돌아왔으나, 박수진은 이듬 해 죽었다. 1920425 - 51일의 대구 남성정교회 부흥회 때에는 치병자가 수 백 명에 이르렀는데, 그 중에 기생 김산애는 소변불통의 중병에 걸렸다가 나았으나 1년 후 늙은 기생의 환갑연에서 가무를 한 후 병이 재발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여러 명이 병이 나은 후 주일을 지키지 않아 병이 재발한 경우가 보도되었다. 결국 기적적으로 병이 나았다고 한 이들의 상당수가 다시 병에 걸렸는데, 김익두 목사 지지자(은사지속론자)들은 이를 병자의 신앙이나 도덕성 탓으로 돌렸다.

 

방언은 1930년대 초기 이용도 목사의 부흥 집회 때 통성기도 중에 가끔 발생했다.

1931년 겨울 평양 명촌교회에서 이용도 목사가 인도한 부흥회가 열렸을 때, 참석한 邊宗浩가 직접 보고 들은 바에 따르면, "밤 예배를 마친 후 일동 통성기도를 하는데 큰 소리로 외치는 기도 소리 중에 무슨 소리를 하는지 그 의미를 모를 기도소리가 여러 곳에서 들려옴을 듣고"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모임 후 변종호는 유력 신앙가인 친우에게 그 사실을 말하니 자신도 방언을 경험한 적이 있고 이용도 목사의 집회에서는 가끔 그런 일이 있다고 말했다.

변종호, 李龍道 牧師 硏究 四十年 (券一), 신생관, 1973, 65-66
변종호, 李龍道 牧師 硏究 四十年 (券一), 신생관, 1973, 65-66

변종호는 그해 연말에 산정현교회 부흥 집회에서 통성기도 때 다시 부인반에서 역시 "울음 섞인 열정적인 기도를 높은 소리로 외치는 기도 속에는 의미 모를 외침"을 상당히 많이 들을 수 있었다1933년 봄 이용도 목사가 해주에서 최후 공 집회를 인도한 후 교회 유지와 청년들이 이 목사를 불러놓고 치고 죽이겠다고 위협한 이유도 "통성기도 시간에 많은 여성도들이 의미 모를 광언(狂言)으로 교회를 문란케 하고 예배를 소란케" 했기 때문이었다변종호는 이 사실을 40년 만에 이 책에 다음과 같이 공개했다.

필자가 아는 한 한국교회 방언은 1931년 이용도 목사의 부흥회에서 시작되었다. 1907년 대부흥은 죄에 대한 철저한 통회자복 운동이었다. 회개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와 중생을 체험한 이들은 성경을 더욱 묵상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면서, 이웃과 화해하고, 양심전을 돌려주고, 가족을 사랑하는 삶의 변화와 기독교 윤리 운동을 일으켰다. 영적 체험 현상이 강한 무교는 흔히 도덕성이나 사회적 책무감을 별로 발전시켜 주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해방 이후 한국 교회 '심령대부흥회'나 기도원 집회들도 동일한 경우가 많았다. 반면 한국교회의 초기 대부흥은 회개의 운동이었고 신자의 윤리적 삶에 변화를 일으켰다. 1930년대 이용도 목사의 방언은 교회에 소란과 분열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아쉬운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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