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의 기도'가 가진 힘은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는 것
'지렁이의 기도'가 가진 힘은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는 것
  • 유영성
  • 승인 2017.11.30 02: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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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한, 지렁이의 기도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실한 여정, 새물결플러스, 2017년
김요한, 지렁이의 기도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실한 여정, 새물결플러스, 2017년
김요한, 지렁이의 기도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실한 여정, 새물결플러스, 2017년

저자 김요한 대표님과 학연 상 선후배 관계인 이 모 목사님께서 쓰신 비평을 보게 되었다. 우선 두 분은 서로 매우 존중하는 입장인데 자칫 비평하신 목사님의 날카로움을 오해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서고, 이에 대한 우리 대표님의 반응 역시 혹시라도 지나친 자기 합리화나 주장으로 비쳐질까 내심 걱정이 된다.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두 분이 서로의 신학적, 신앙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무척 존중하고 계시다는 점이 치열한 공방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독교 안에서는 존경스러운 모습이 아닐까 한다. 귀감이 된다.

다만, 이 모 목사님께서 비평하신 내용이 그 날카로움에 비하여 너무 지엽적인 문장을 인용한 점과 목사님의 개인적인 신학적 입장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제시하신 점은 공감하기가 어렵다. 합동 보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내게 은사 체험이란 것은 별천지였다. 방언이란 것을 하는 사람은 보았으나 직접 해보지 않았고 입신이니 통변이니 하는 것들도 내게는 먼 데 있는 산과 같았다. 하지만 그런 게 없어도 내 신앙이 연약하거나 잘못되었다고 여길 이유는 없었다. 적어도 내가 배운 보수 신학에는 철저한 신앙고백을 통한 오직 성경, 오직 예수, 오직 교회에 대한 뚜렷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게 절실하게 고민스러운 신앙적 갈등은 이런 신앙고백에도 불구하고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이나 느껴지는 예수님, 내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감격을 선사해주시는 성령의 체험 등을 이런 신학이 제대로 공급해주지 못하는 데에 있었다. 이것은 마치 물이 뜨거운 지 찬 지 솥에 손을 넣어보지도 않고 "뜨겁다!"고 외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뜨거운 줄은 알겠는데 내게 그것은 확증이 아니라 확신이었을 뿐이었다. 과연 이를 진정한 신앙이라 할 수 있을까? 기도가 무엇인지, 성경이 무엇인지, 교회와 성도와 전도와 성숙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공부했지만, 또 명확하게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절망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내게 다가왔던 많은 은사자들은 신비로운 현상에만 집착하는 그 정도 수준이었을 뿐이다. 방언을 하며 보여 지는 모습들, 통변한다는 모습들, 치유라는 것에 통한 이상한 광란적 행동들 모두가 내게는 끓는 솥에 손을 넣어 확인하기를 꺼려하게 만드는 징그러운 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내게도 주께서는 체험이란 것을 허락하셨다.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내가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내 안에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와 확신이 생겼다. 그리고 그동안 이해되지 않고 의심스러웠던 여러가지 것들이 모두 이해되고 확신되었다. 이것은 루터나 칼빈의 경험이 아니었고 웨슬리의 경험도 아니었다. 순전히 부흥회의 어느 저녁 날 채플실에서 말할 수 없는 감격 속에 나를 찾아오신 그 분의 손길을 느꼈을 때였다. 그렇게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은사를 사모했으나 찾아오지 않았던 확신이 그 체험을 통해 내게 주어졌던 것이다. 체험이란 것은 매우 개인적인 것이고 상대적이다. 물이 뜨겁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실제로 뜨거운 것은 진실의 입장에서는 동일하지만 그것을 확인하거나 체험한 사람과 체험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이 설명하는 방식은 각각 다르다. 솥에 손을 넣은 사람은 "뜨겁네!"라고 하겠지만 손을 넣지 않은 사람은 "뜨겁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 차이는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뜨겁다는 진실 하나를 놓고 설명의 방식이 다르다고 하여 진실이 바뀌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은사를 반대하는 분들의 입장은 단호하다. 그 이유는 은사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은사의 남용과 오용을 통해 나타나는 죄의 경향성,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성경의 진리를 왜곡시키는 현상들 때문이다. 어느 목사님이나 신학자가 은사 자체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없다고 한다면 사랑도 은사요 기도도 은사요 거룩도 은사인 것을 모조리 부정해야 하는 자기오류에 빠지고 만다. 중요한 것은 은사 자체를 거부하는 데에 있는 게 아니라 은사의 사용과 그 결과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성경의 진리를 왜곡시키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다.

내가 만나고 모시는 김요한 대표님의 은사는 일명 우리가 비판하기 좋아했던 신비주의적이고 과도하게 광란적인 그런 괴상한 은사의 남용이 아니었다. <지렁이의 기도>를 비판하신 그 목사님께서 구구절절이 지적하셨던 그것, 즉 직통계시란 것이 그리 쉽게 내동댕이쳐져야 할만큼 괴상하고 남용되며 자기만족적이냐면 결코 그렇지 않다. 나도 냉정하다면 굉장히 냉정한 사람이고 이 나이 먹도록 사실과 신비의 경계를 구분할 정도의 안목은 갖추었다. 손바닥을 보면 병이 낫는다는 남미의 어떤 은사자를 보았고 눈만 감으면 뭐가 다 보인다고 하여 사람들로부터 두려움과 동경을 동시에 받는 은사자도 보았다. 그제 나를 만나러 와서 대표님의 기도를 받고 돌아간 모 페친은 그런 면에서 이상한 은사자들에 대한 굉장한 거부감을 가진 분이었다. 하지만 그분이 혹시 상상하셨을지도 모를 그런 괴상한 은사의 발현은 전혀 없었다.

어디 밀실에 들어가 남들이 알지 못하는 그런 신비스런 행동으로 그분에게 예언을 하는 게 아니었다. 대화를 통해 그가 모르고 있던 사실들을 생각나게 해주었고 그로써 그의 마음에 응어리졌던 오랜 어둠의 먹구름을 걷어내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내가 바로 옆에서, 그 현장에서 지켜본 대표님의 은사의 모습이었다. 그런 방식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며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는 모습이야말로 내가 경험하는 김요한 대표의 은사의 본질이었다. 위 이 모 목사님의 비판에 따르면 <지렁이의 기도> 책은 온통 개인의 은사 체험을 줄줄이 엮어놓은 신비주의 서적이 되고 만다. 무엇이 보인다는 얘기는 우리가 쉽게 폄하할 수 있고 비판할 수 있는 그런 류의 신비주의적 은사가 아니다. 사람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이 바탕이 되어 그를 관찰할 때 하나님께서 대표님에게 주시는 어떤 영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다만, 그것이 달리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이 없는 한은 마치 우리가 흔히 비판하기 쉬운 그런 은사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드러나는 것으로 비판하려면 한도 끝도 없는 게 은사의 본질이다. 통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보편성에 기대어 대충 끌어다 맞추면 맞아 떨어지고 아니면 그만이 아니냐는 그런 비판은 참으로 무책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일반 교회에서 은사를 거부하는 목사님들도 이런 무당식 처방을 얼마든지 하고 있다. 이혼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집사님을 보고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겁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당식 조언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래서 해결되면 목사님 말씀대로 된 것이고 해결이 안 되면 그건 집사님 책임인 것이 우리들 일반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그런 경우, 대표님은 그 이혼의 문제에 깊이 도사리고 있는 어떤 이면의 원인을 대화를 하면서 드러내 보여준다는 데에 차이점이 있다. 두루뭉수리하게 넘겨짚듯 하며 처방을 내리는 사람들이야말로 개혁주의를 한다는, '오직 성경'을 주창하는 분들의 모습이 아닌가? 걸핏하면 성경구절 내걸고 약국에서 처방전 보고 약 지어주듯 하는 것 말이다.

사실상,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없는, 즉 자신에게 없는 영적인 능력을 성경의 힘을 빌어 말하고 있는 게 보수신학의 진면목인지도 모른다. 그런 신학이 만들어낸 한국교회가 지금의 교회들이고 그 곪은 상처들이 서서히 터져 나오고 있다. 그에 비하면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든 그를 만나려고 달려와 그의 옷깃을 만진 한 죄인의 모습은 우리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그 때 나타난 능력은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에게서 나왔다. 말씀이 곧 예수님이기 때문이라는 후기의 신학적 해석은 옹색하기까지 하다. 성령의 능력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기 신학이 최선이고 그 외의 것은 판단의 도마 위에 올려진 생선회처럼 여기고 만다. 어떤 식의 비평이나 불평이나 왜곡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가진 힘 하나는 변하지 않는다. 이 책을 읽고 도저히 기도하고 싶어 견딜 수 없다며 회사를 찾아온 내 페이스북 친구인 그분의 경우처럼, 책을 읽으니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긴 하는데 도저히 길을 모르겠다는 그의 당황하는 영혼을 대표님은 하나 씩 하나 씩 문제의 근원을 지적해 위로와 권면을 해주셨고 그는 눈물을 쏟았다.

나는 묻고 싶다. 어떤 정교한 신학이, 완벽한 조직신학이, 또는 성령론이나 교회론이 사람이 가진 이런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절실함을 그리 잘 해결해주고 있는지를 말이다! 많이 배우고 능력이 있고 학위가 있는 목사님이라도 한 가지 꼭 알아두시면 좋을 것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고 있는 양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길을 지나가는 방법론을 설명해주는 목자가 아니라 양들을 해치려고 달려드는 늑대들을 막아주는 목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가 가진 신학이나 논리나 체제는 이제 그 빛이 바랬고 수명을 다해 간다. 사람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자기들 보다 훨씬 뭘 모르는 신학자들이 말하는 사변이 아니다. 자기들과 함께 울어주고 웃어주는 동반자이면서도 자기들을 지켜주는 목자다. 거기에 한국 교회는 희망이 있다. <지렁이의 기도>가 가진 힘은 여기에 있다.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책의 진정한 힘이다. 그 안에 들어 있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들 몇 가지를 엮어 날선 지성을 드러내는 것에 심히 안타까움을 느낀다

 

글쓴이 유영성은, 새물결아카데미 기획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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