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상정과 역지사지로 이슬람 선교하기
인지상정과 역지사지로 이슬람 선교하기
  • 정한욱
  • 승인 2017.11.29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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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문의 '중동선교의 시작과 끝을 묻다'(대장간, 2017), '우리는 왜 이슬람을 혐오할까?' (선율, 2017)
김동문, 중동 선교의 시작과 끝을 묻다-도발적인 이슬람 선교 읽기, 대장간, 2017년
김동문, 중동 선교의 시작과 끝을 묻다-도발적인 이슬람 선교 읽기, 대장간, 2017년

한국외국어대학 아랍어과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목사이자 선교사로 1990년 이후로 여러 아랍 이슬람 지역에서 지내며 그들과 이웃해 살아가고 있는 저자는 최근 한국 보수 기독교를 휩쓸고 있는 “이슬람포비아”의 광풍에 대해 우려하면서, 이슬람에 대해 공격적이고 적대적인 주장들로 채워진 배제와 차별의 태도가 과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이슬람 선교에 얽힌 우리의 관점과 태도를 되짚어 가면서 이슬람 세계와 무슬림의 삶에 대해 우리가 버려야 할 관점과 가져야 할 태도를 지적함으로서, 혐오와 배제의 마음을 버리고 포용과 환대 그리고 인격적 복음 나눔으로 무슬림을 마주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중동선교의 시작과 끝을 묻다』가 주로 이슬람 선교라는 관점에서 씌어진 책이라면 『우리는 왜 이슬람을 혐오할까?』는 무슬림에 대한 혐오와 배제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깊이 공감되고 새겨들어야 할 내용이 많아 저자의 목소리를 빌어 내용을 정리하기로 한다.

무슬림은 누구인가    무슬림이 된다는 것은 개인의 선택에 의해 특정한 신념이나 신앙의 체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무슬림 부모의 자녀로 태어나 무슬림이라는 ‘사회적 · 법적 신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행위에 무관심한 명목상의 무슬림에서부터 정기적으로 사원에 출석하는 ‘종교적’인 무슬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아랍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은 보수적이고 반서구적인 기성세대 무슬림에서 상대적으로 서구화된 자유롭고 유연한 젊은 세대 무슬림까지, 이슬람 세계 안에는 다양한 ‘무슬림들’이 있을 뿐 하나의 범주로 고정할 수 있는 전형적인 ‘무슬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통계적으로는 전 세계의 무슬림 인구가 계속 증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종교행위에 참여하는 ‘종교적’ 무슬림은 특히 젊은 층일수록 점차 감소하는 추세에 있으며, 한 통계에 의하면 무슬림 인구의 5~10%만이 정기적인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고 한다. 다수의 무슬림이 종교가 아닌 삶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종교로서의 이슬람을 잘 몰라도 무슬림을 아는 데 큰 지장이 없는 경우가 많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기독교인들의 시각은 아직도 지나치게 종교 중심적이고 목적(선교) 지향적인 상태로 고정되어 있다.

이슬람 세계    이슬람 세계는 하나가 아니며 통일된 운명공동체나 정치 · 종교공동체로서의 이슬람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통념과 달리 이슬람의 포교는 주로 '칼'이나(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꾸란) 국가나 종교단체가 파견한 이슬람 선교사가 아닌 자발적인 이주자들의 이슬람 소개 활동과 민간 독지가들의 재정지원에 의해 이루어져 왔으며, 꾸란이 이슬람화를 위한 전략으로 활발하게 번역되고 있다는 주장과 달리 역사적으로 볼 때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이슬람 이해와 선교를 위해 꾸란을 적극적으로 번역해왔다. ‘이슬람’ 국가에서도 기독교뿐 아니라 종교로서의 이슬람은 통제의 대상이며, 어떠한 이슬람 국가도 알 카에다나 IS 같이 반정부적인 이슬람극단주의 폭력단체를 지지하지 않는다. 명예살인이나 여성할례 혹은 일부다처와 같은 악습들이 이슬람권에서 빈번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직 이슬람권에서만 이런 악습이 행해지는 것은 아니며 모든 이슬람국가가 이런 일들을 허용하고 있지도 않다. 무슬림은 그리스도를 메시야가 아닌 선지자로만 인정하지만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로 존중하고 받아들이며, 이슬람 세계가 갖는 서구세계 혹은 기독교 문명권에 대한 적대감은 상당 부분 서구의 식민지 침탈과 착취, 이스라엘에 대한 일방적 편애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동문, 우리는 왜 이슬람을 혐오할까? 가짜뉴스, 문명충돌, 이슬람포비아의 허상을 벗기다, 선율, 2017년
김동문, 우리는 왜 이슬람을 혐오할까? 가짜뉴스, 문명충돌, 이슬람포비아의 허상을 벗기다, 선율, 2017년

반이슬람을 넘어 환대와 포용으로   한국 내에 본격적으로 반이슬람 정서가 퍼지기 시작한 것은 2008년 전후부터이며, 이 시기 이후 SNS를 통해 주기적으로 퍼지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가짜뉴스 혹은 괴담은 명확한 근거나 출처를 밝히지 않은 거짓 정보를 이용하여 교묘한 짜깁기로 사실을 왜곡함으로서 예외 없이 이슬람에 대한 증오나 혐오를 조장하고 있다. 한국 내에 40만 무슬림이 거주하고 있다거나 무슬림들이 한국을 이슬람화하고자 몰려들고 있다는 괴담과는 달리, 한국 내 무슬림 인구는 약 16만 정도로 추정되며 무슬림 이주자의 증가세는 전체 외국인 이주자 증가세의 2/3 정도에 불과하다. 다문화 시대를 맞아하여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게 된 무슬림들은 잠재적인 테러리스트이거나 이슬람 성전(聖戰)을 수행하는 전사가 아닌 경제적 이유로 한국을 찾아 열심히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이며, 그들을 ‘종교’의 틀만으로가 아닌 머나 먼 타국에 찾아와 전혀 다른 문화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분투하는 통합적인 '인격체로' 이해하면서 포용하고 환대하기 위한 노력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선교, 그리고 선교사로 살아가기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선교적 삶으로 부름받았으며, 이런 선교적 삶을 수행하는 자리 중 하나가 선교사의 삶이다. 포괄적 부르심 안에서 다양한 직분을 갖고 사회정의와 세계선교를 위한 제자로서 총체적 선교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하나님은 자신들의 일상을 열심히 살아가던 이들의 일상에 찾아오셔서 그들을 선교라는 새로운 일상으로 부르시는 분이시며, 선교란 결국 지루한 일상을 누리며 살아가는 평범함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선교사를 훈련하는 과정은 제자화나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규격화되고 획일화된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는 방식인 인격적인 방식으로 ‘나다움’과 ‘선교사다움’을 함께 지니는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선교사란 선교지의 문화와 자신의 문화 사이에서 방황하는 문화적 유목민이요 경계인이며, 완전히 적응할 수 없음을 알고 맞춰가며 살아가는 어색한 동거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선교사가 현지인처럼 산다는 것은 위장된 동화가 아닌 내부자의 시선으로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며, ‘땅 밟기(prayer’s walk)’란 그 땅 주민들의 일상을 품고 사는 삶 자체이자 그들의 삶의 애환 한복판에 서서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도다.

한국교회 선교의 문제들   한국교회 선교운동의 대표적 문제는 무지(현지인을 볼 때 종교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며 단지 예수 안 믿는 불신자라는 시선으로만 바라보는 것), 무모(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단체 혹은 그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선교의 방법이나 지식 경험 훈련을 무시하고 무모하게 돌진하는 것), 무례(현지인들을 단지 예수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조건 무시하거나 비웃는 경향)의 소위 3無 현상이다. 이런 문제를 가진 사람들은 정복주의와 우월의식을 바탕으로 상대의 종교를 바꾸는 데만 집중할 뿐, 예수 믿지 않는 이들이 나보다 더 인격적이고 절대자와 이웃을 더 사랑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며, 예수 잘 믿는다는 이들에 의해 피해를 당하는 예수 안 믿는 나라나 개인들의 고통에도 주목하지 않는다. 또한 복음=번영이라는 사고방식에 젖은 채 나보다 힘없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만 선교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거나, 자신이 섬긴다는 그 땅과 그 사람들에 대해 앞장서서 배제와 혐오를 선동하기도 한다. 아랍권 선교사나 현지 기독교인들 중에는 무슬림과 공존할 뿐 깊이 교류하며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도 많으며, 따라서 현지 기독교인이나 선교사와 같은 소위 ‘이슬람 전문가’의 입에서 나오는 정보와 해석이라고 해서 합리적 의심 없이 무조건 옳다고 받아들이지는 말아야 한다.

이슬람 선교, 어떻게?    이슬람 국가 58개국은 복음의 불모지요 넘어야 할 타겟이 아니라 복음이 발생했고 한때 꽃을 피웠으며 현재도 복음의 그루터기가 남아있는 지역으로 이해해야 하며, 우리가 처음이 아니고 하나님이 거기 계셨고 계시며 계실 것과 나보다 앞서서 허다한 주님의 사람들이 있었고 있으며 있을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선교는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인격체 안에서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일부 세대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복음전파의 종착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수많은 무슬림들이 선교사들을 만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꿈이나 환상 기적과 같은 다양한 루트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역사가 늘어가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에 의존해서만 선교하지 않으시고, 복음은 스스로를 변증해 왔으며,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아랍 땅에서 결코 멈춘 적이 없다. 자신의 선입견에 사로잡혀 증오와 혐오를 퍼나르는 대신, 날마다 이슬람 지역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업데이트된 특종 뉴스로 전하는 특파원이 되자. 그리고 자신이 지금 품거나 섬기는 민족이 한국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한국에서 그들을 만나고 마음을 헤아리고 환대를 베풀어 주도록 하자. 활발히 선교하는 한국교회가 이슬람 지역에는 가지도 보내지도 않았기에 하나님께서 이슬람 선교를 위한 좋은 기회를 주기 위해 그 땅 백성을 우리에게 불러내 주신 것이다.

개인적으로, 국제실명구호단체인 비전케어의 일원으로 지난 10여년간 여러 이슬람국가들을 포함한 세계의 여러 나라를 방문해 다양한 종교와 문화 아래서 살아가는 수많은 현지인들을 접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나와 다른 종교를 믿으며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너무 신기했고, 가난하고 열악한 현지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도와주러 온 우리 팀을 힘들게 하는 현지인들을 보면서 우월감과 분노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품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더 많은 나라를 방문할수록 결국 어느 곳에서든 사람 사는 것은 기본적으로 다 비슷하다는 생각이 강해졌고, 내가 그들을 돕기 이전에 현지인들이 먼저 그들의 나라에서 자신들을 도울 수 있도록 허락하고 환대를 베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마도 저자가 이슬람을 이해하고 위한 두 가지 키워드로 제시한 “사람은 다 똑같다는 인지상정(人之常情)과 입장 바꿔 생각하자는 역지사지(易地思之)”가 바로 그간의 내 경험을 가장 잘 표현한 두 단어일 것이다. 무슬림들을 포함해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해 왜곡된 정보와 부정적 편견을 바탕으로 배제와 혐오를 발산하는 대신, 인지상정과 역지사지의 마음을 품고 그들을 내 이웃으로 환대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분들에게 받은 환대를 갚으며 그리스도의 제자요 증인으로 살아가는 길이 아니겠는가!

 

글쓴이 정한욱 원장은, 우리안과 원장으로 일터에서 복음을 품고 살아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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