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고통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을 자극하는 책
타자의 고통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을 자극하는 책
  • 정한욱
  • 승인 2019.05.07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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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싱어, 더 나은 세상 - 우리 미래를 가치 있게 만드는 83가지 질문, 예문 아카이브,
피터 싱어, 더 나은 세상 - 우리 미래를 가치 있게 만드는 83가지 질문, 예문 아카이브,

『더 나은 세상』은 동물해방운동의 효시가 된 『동물 해방』이나 자발적 기부의 필요성을 주장한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등의 저서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세계적인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가 젠더, 국제정치, 생명, 기부, 과학기술 등 다양한 영역에서 논란이 되는 윤리적 주제들에 대해 <프로젝트신디게이트>라는 매체에 기고했던 짧은 칼럼들을 모은 책이다.

옮긴이는 각각의 주제를 깊이 다룬 싱어 교수의 책들은 국내에 많이 소개되어 있지만, 현재 논란이 되는 거의 모든 윤리적 이슈에 대한 그의 견해를 들을 수 있는 이 책이야말로 싱어 교수의 '종합선물세트'와 같다고 평가한다. 따라서 이 책은 “피터 싱어라는 세계적 석학의 철학과 이론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훌륭한 입문서이자 요약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몇 가지 조사 결과를 토대로 인간은 언어나 수리 능력처럼 옳고 그름을 직관적으로 뒷받침하는 도덕 능력을 물려받으며, 이러한 능력은 인류의 선조가 사회적 영장류로서, 그리고 이전 세대가 물려준 유산의 일부로서 살았던 수많은 세월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렇게 오랜 세월을 거치며 진화해 온 인간의 ‘도덕적 직관’이나 이에 근거한 ‘본능적 혐오’가 오늘날의 인류가 처한 도덕적 딜레마에 대해서도 항상 올바른 대답을 들려주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동물의 권리, 낙태, 안락사 국제 원조 등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들로 가득한 오늘날의 세상에서 우리가 윤리적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원천은 더 이상 ‘도덕적 직관’이나 '종교적 도그마'가 아니라 ‘이성의 능력’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저자는 “도덕적 판단의 타당성은 검증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개인의 감정이나 태도의 분출에 불과하다”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견해에 반대하여 신중한 사고와 성찰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객관적 윤리’의 진실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1+1=2가 참이라고 이해하는 것처럼 ① 미래의 고통을 피하려는 동기와 ② 다른 사람이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할 동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며, 이야말로 저자가 주장하는 ‘윤리적 객관주의’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윤리란 단순히 개인이 규범을 지키는 일에만 국한되어서는 안되며, 세계 곳곳에서 불행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행할 수 있는 선 뿐 아니라, 인류의 미래 세대와 인류를 넘어선 동물에게까지 확장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렇게 타자의 고통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하는 싱어의 윤리학은 생존에 필수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미래 세대나 동물까지를 포함한 타자가 고통을 겪지 않아야 할 권리를 침해할 수 없으며, 생존을 위해 타자에게 해를 가해야 하는 상황이 되더라도 그들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신념에 따라 그는 인간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지 않으면서 높은 지능을 가진 사회적 포유류인 고래를 고통스러운 죽음으로 몰아가는 고래잡이에 반대하며, 식용으로 동물을 사육하는 경우에도 사육이나 도축 과정에서 그들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사치를 누릴 여유가 있으면서도 소득의 일부를 가난한 이들과 나누지 않는 부자에게는 기부를 통해 막을 수 있는 죽음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부자들이 소득의 최소 1%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윤리적 직관'이나 '종교적 도그마'가 아닌 '합리적 이성'이 윤리적 판단의 기준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는 몇몇 논란이 되는 윤리적 문제에 대해 '공리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싱어는 소생 가능성이 전혀 없는 환자의 무의미한 생명 연장 치료를 위해 제한된 공적 자금으로 운용되는 의료보험 시스템이 소생 가능성이 높은 환자 여럿을 살릴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의료비를 부담해야 할 의무는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무런 개선도 기대할 수 없고 극심한 고통을 덜어줄 방법도 없는 심각한 결함을 가진 신생아의 경우 적극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생명을 끝내는 것이 '윤리적' 행위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또한 동성애나 근친상간에 대해서는 특정한 형태의 성행위가 당사자들에게 만족감을 주는 반면 다른 이들에게는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면, 우리 선조들의 진화적 생존에 기여했던 '감정적 혐오감'을 근거로 범죄 여부를 판단하는 접근방식을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해야 하는지 질문하기도 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윤리적 명령이라고 확신하는 성경의 일부 '문자'는,

혹시 싱어가 주장한 바 인류 진화의 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내재화된

'윤리적 직관'과 '본능적 혐오감'을 종교의 이름으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지는 않은가?.

이렇듯 일체의 윤리적, 문화적, 종교적 전제를 배제한 채 철저히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과' 합리적 이성'에만 근거하여 일관되게 공리주의의 원칙을 적용하는 피터 싱어의 결론은 때로 당황스러울 정도로 파격적이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신봉하는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기독교 윤리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조자 그렇게 파격적으로 들리는 싱어의 주장만큼 일관성과 설득력, 그리고 적실성을 갖추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그들이 하나님의 윤리적 명령이라고 확신하는 성경의 일부 '문자'는, 혹시 싱어가 주장한 바 인류 진화의 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내재화된 '윤리적 직관'과 '본능적 혐오감'을 종교의 이름으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지는 않은가? 과연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성경과 예수의 정신은 "동성애자, 우상숭배자, 가나안 사람은 반드시 반드시 죽이라"는 성경의 '문자'인가, "종교의 자유는 인간(이나 동물)의 고통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멈춘다"는 이 책의 주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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