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넉넉히
“그러나” 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넉넉히
  • 최은
  • 승인 2017.11.29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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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식 감독의 '로마서 8:37'(2017)
신연식 감독의 '로마서 8:37'(2017)
신연식 감독의 '로마서 8:37'(2017)

 

<로마서 8:37>이라는 영화가 개봉했습니다. 누가 봐도 기독교영화인 것도 모자라 성경 장절을 대놓고 제목으로 삼은 영화라니, 게다가 로마서라니, 이 두둑한 배짱과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요. 영화 <동주>(2016)<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2014)의 시나리오를 썼고 <동주>를 제작한 신연식 감독의 작품입니다. 연출작으로서는 <러시안 소설>(2012)<프랑스 영화처럼>(2014)에 이어 이번에는 한국의 성경을 텍스트로 삼았네요. 러시아 소설이 길고 느리고 복잡하고 인물도 많다면, 프랑스 영화는 난해하고 감각적이고 모호한데, 대한민국에서 다시 쓰는 성경은 어떨까요? 출발은 비교적 명료합니다.

 

그냥, 범죄자일 뿐입니다

영화 <로마서 8:37>은 교회가 맞은 위기로 시작합니다. 강요섭(서동갑)이 담임하는 부순교회는 전임 목사 박강길(김종구)20억 횡령과 배임, 정치개입 문제로 연일 시끄럽습니다. 후임인 강요섭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박목사 측은 은퇴장로들을 부추기며 교회 분열을 조장합니다. 요섭의 설교를 트집 잡아 이단시비를 벌이기도 하구요. 계속되는 시위와 공격에 부순교회는 TF팀을 만들어 적극 대응하기로 하는데, 이 일에 안기섭(이현호)이 고용됩니다. 옥탑방 동네 교회 전도사인 기섭은 요섭의 의붓 여동생과 결혼했고, 어릴 때부터 요섭을 존경하며 따라왔던 후배이기도 합니다.

교적부를 정리하고 미디어 대응팀까지 꾸려 싸움에 깊이 관여하던 중 기섭은 요섭의 성추행과 성폭력 폭로 파일을 듣게 되는데요. 이 일은 이제 존경하는 형님을 돕는 일이나 교회 분열을 넘어선 문제가 되어 기섭을 조여 옵니다. 결국 그는 청년부 후배 지민(이지민)을 포함한 성폭력 피해자들의 편에 서기로 하고, 여전히 하나님 뜻운운하는 요섭에게 일침을 날립니다. “그냥 범죄자예요, 형은!” 요섭이 뭐라고 답했을까요? “그래. 우리 모두 죄인이지.”

. 놀랄 일은 아닙니다.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지요. 범죄자 자신들의 입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자주 들어왔던 말인가요. “내가 대한민국 목사들 중 대통령이야!”라고,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내뱉는 박강길도 그렇게 말했어요. “목회자라고 완벽할 수 없지. 너네도 이 꼴 당할 수 있어.” 문제는 이런 분들이 늘 하나님의 법은 세속법과 별개로 작동한다고 믿는 거겠지요. 그 하나님의 법이 특히 당신의 종들에게는 세속법보다 백만 배 엄중할 수 있다는 점은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은 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한국교회에 큰 상처를 남겼고 아직도 도처에서 진행중인 목회자의 성범죄와 착복과 교계의 암투를 다루면서 하필 로마서 837절을 내세운 데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는 것을 먼저 고백해야겠습니다. 그렇게 또, 은혜로 덮자는 이야기인가 싶었겠지요. 사실 기섭이 딸과 함께 고양이의 장례를 치르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마음이 더 불편해집니다. 죽은 고양이에 대한 연민도 아니고(영화에서 아이가 너무 사랑해서 죽이게 된고양이는 한국교회와 맹목적 숭배의 대상이 된 목회자들, 따라서 결국 그들 모두의 상징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저들을 용서하소서도 아니고, “제가 잘못했습니다!”라니요. 그러니까 지각 있는 우리가 회개하면 되는 일일까요? 그들을 우상화한 우리가 결국 가장 잘못한 건가요?

하지만 찬찬히 곱씹어 보자면, 러시안 소설과 프랑스 영화가 그렇듯이, 한국의 로마서도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본디 상황속의 복음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지요.

 

이미지와 상징으로 영화가 말하는 것

인상적인 몇 장면을 떠올려 봅니다. 요섭의 충복 황목사(홍성춘)는 사건의 전말을 다 파악하고도 기섭의 분노와 열심을 나무랍니다. 그는 기섭을 불러놓고 사무실 창문의 블라인드를 내립니다. 이 때 창밖의 네온 십자가가 블라인드 뒤편으로 사라져요. 요섭을 지키려는 황목사 일당이 하는 일은 곧 십자가를 가리는 일이라는 영화의 명백한 선언입니다.

향초와 촛불과 불 이미지의 연계는 더 치밀합니다. 성폭행을 당하기 직전에 지민은 요섭에게 향초를 선물하는데요, 요섭은 이것을 현민에게 무심히 건네고 현민은 이 초를 자신의 제단에서 불태웁니다. 현민을 죽음으로 이끈 화재는 그가 세워놓은 여러 촛불 중 공교롭게도 지민의 향초로부터 옮겨 붙어 시작되었습니다. 지민이 그린 묵시적인 그림도 불 이미지입니다. 흰 옷의 여인 같은 형상을 검은 나뭇가지가 찌르고 있고 주변은 불로 에워싸여 있습니다. 과거 현민과 요섭이 아버지 강목사를 처음 만나는 장면과 현민의 기도처와 그의 희생, 요섭의 모친과 지민을 비롯한 여성들의 고통이 이 한 장의 그림 안에 모두 담겨있습니다. 불타는 집과 촛불을 태우는 행위는 인류 구원과 대속을 다룬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걸작 <희생>(1986)<노스텔지아>(1983)에서도 가장 중요한 모티프이기도 했지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로마서의 넉넉히 이김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현민이 입을 다문(입으로 범죄하지 않은)’ 중보자이며 불에 타 사망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대속입니다. 요섭을 불쌍히 여기지만 끝내 견딜 수 없었던 요섭의 부인은 성령의 다른 이름일 겁니다. 그렇다면 요섭은 자기 벌을 이미 받은 셈입니다.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유일한 죄, ‘성령을 소멸(자살)’ 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로마서 8:37>은 자신의 우상을 따르던 한 젊은이가 그 길을 벗어나 그리스도 편에 서기로 결단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요섭이 청년들과 허물없이 어울려 운동을 하는 과거 영상에서 요섭이 손짓을 합니다. “, 기섭아, 너 들어와.” 영상을 찍고 있는 기섭에게 한 말이지만 사실은 영적인 리더를 자처해온 범죄자들이 이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건네는 손짓입니다. 기섭은 거절했고, 이 손을 민망하고 분노하게 만들었지요. 반면, 완벽한 궁지에 몰린 요섭은 다시 한 번 그 손을 붙잡습니다. 잠깐 지나가는 이미지이지만, 사우나실 장면은 생각보다 강렬합니다. 반라로 땀을 흘리며 서 있는 요섭의 옆에 박강길이 수건을 뒤집어쓰고 앉아있어요. 말 한마디 없이 이 장면은 그들의 화해가 화합이 아닌 야합임을 폭로합니다. 남성성을 앞세운 조폭영화의 클리셰를 동원해서 말이지요.

이 영화는 얼핏 <아수라>(2016)의 기독교판인 듯도 하고, <곡성>(2016)과도 조금은 닮았습니다. 하지만 <아수라>처럼 출구 없는 절망을 폭력적으로 전시하지 않고, <곡성>처럼 그 때, 그리고 지금도, 전능하다는 신은 한 일이 뭐가 있느냐고 따지지 않죠. 오히려 자기 길로 가는 저들이 망한다 한들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이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나직이, 하지만 확신 가운데 말합니다.

마침 또 하나의 대형 참사가 들려오네요. 800억 비자금설의 명성이 일사분란하게 세습을 완료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군요. <로마서 8:37>이 전하는 이런 믿음조차 없다면, 종교개혁 500년이 부질없다는 탄식이 가득한 이 때에 우리가 무슨 힘으로 견딜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우리에게 중보자가 있다고 말하는 이 영화를 제가 두 손 붙들어 반기는 이유입니다. 오랫동안 회의적이었던, 한국적인 기독교 극영화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 이글은 월간 '복음과 상황'에도 실렸습니다.)

글쓴이 최은은, 영화평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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