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적폐' 사이에 선 십일조
'전통'과 '적폐' 사이에 선 십일조
  • 정우조
  • 승인 2017.11.29 01: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상원, 십일조가 알고 싶다 다시 배우는 십일조, 축복의 통로인가 다른 복음인가, 넥서스CROSS, 2017년
윤상원, 십일조가 알고 싶다 다시 배우는 십일조, 축복의 통로인가 다른 복음인가, 넥서스CROSS, 2017년
윤상원, 십일조가 알고 싶다 다시 배우는 십일조, 축복의 통로인가 다른 복음인가, 넥서스CROSS, 2017년

십일조를 알고 싶다면'

십일조'는 오늘날 개신교 내부에서 가장 많은 갈등과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화두 가운데 하나입니다. 구약 율법의 잔재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이 성취된 이후의 신약 시대에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또한 율법과 관계없이 모든 세대를 관통하여 시행되어야 하는 불변의 제도요 기독교 신앙의 기본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 두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며 서로를 '율법주의자' ‘믿음의 근본도 없는 자들이라 비난하고 있는 실정이지요. 동시에 교회 밖 사람들로부터는 '헌금'이란 명목으로 자행되는 '착취' 내지는 '수탈'의 대표적 사례로 인식되어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들고 전도의 문을 막아왔기에, 십일조 문제는 교회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 교회가 어쩌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중차대한 이슈라는 데 많은 교인과 신학자들은 공감하고 있고, 그런 만큼 온오프라인의 구분 없이 잦은 격론이 오가고 있습니다.

본서는 그러한 현실적 위기와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저자는 지역교회의 담임으로서 '십일조'를 둘러싼 갈등에 관해 어느 정도 납득 가능한 답변을 제시할 필요와 당위를 요구받는다고 고백합니다. 특별히 십일조를 극단적으로 오해하는(그것이 엄수주의든 폐지론이든) 사람들은 단순히 헌금의 영역에서 뿐 아니라 결국 하나님 인식의 전반에 걸쳐 왜곡을 경험하게 되므로, 건전한 보수 신학의 관점에서 나름의 해답을 제시하고 그것으로 신자들에게 유익을 끼치기 위해 이 책을 구상하고 쓰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저자인 윤상원 목사는 개혁주의를 토대로 보수적인 신학적 입장을 견지하는 지역교회 목회자(부안읍교회 담임)입니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일반적인 목회자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폭 넓은 사고와 유연성, 웬만한 전문신학자 못지않은 치밀하고 깊이 있는 해석과 학문적 성실함을 겸비한, 한 마디로 탁월한 목사라는 말이 어울리는 분입니다. 그래서인지 본서는 십일조라는 민감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최대한 객관적으로 접근하고 분석하고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또한 어려운 용어나 복잡한 신학적 개념을 끌어오거나 의지하지 않고, 철저하게 쉽고 평이한 언어와 논리적 끈끈함으로 논지를 전개해갑니다. 그런 면에서, 십일조가 알고 싶다는 일반 성도들도 편안하게 믿고 읽을 수 있는좋은 책인 것이죠.

십일조는 과연 기독교 신앙의 빛나는 전통이자 믿음의 척도일까요? 아니면 청산해야 할 율법주의의 잔재요 적폐에 불과할까요? 이에 대한 명쾌한 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십일조를 둘러싸고 있는 몇 가지 해석적 난제들을 돌파해야만 합니다. 특히 모세율법 제정 이전 역사에 등장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드린 십일조’, 너무 대놓고 과의 연관성을 강조하고 있는(이 무엇인지는 차치하고) 말라기의 십일조’, 그리고 마치 바리새인들의 십일조를 인정하고 지지하시는 듯한 주님의 말씀(마태복음 23:23)에 관해 명쾌한 해석을 내놓지 못하면, 지리하고 비효율적인 평행선 긋기만 반복될 것이 뻔합니다.

저자는 이러한 몇몇 화두들이 지닌 중요성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지난 세월 동안 한국 교회의 강단들이 왜곡해 온 십일조관련 본문들을 주의 깊고 치밀하게 주해하여 재해석하는 것으로 본서를 전개해 갑니다. 그저 하나님께 응당 드려야 할 몫이라거나 조금 발전해서 내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증거정도로 십일조의 당위를 설명하지 않고, 구약에 등장하는 십일조를 엄밀하게 세 가지의 종류로 구분하고, 그 신학적 의미를 면밀하게 추적해서 오늘날의 교회들이 계승하고 지켜야 할 십일조의 정신과 그 적용까지 제시한다는 점에서, 제목과 같이 십일조를 (제대로) 알고 싶은이들에게 무조건 추천할 만한 책인 셈입니다.

간략한 서평이라 본서의 내용에 대한 요약은 생략하겠습니다. 좋은 책이니 궁금한 분들께서는 직접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특히 십일조가 담지하고 있는 언약적제의적신정국가적 의미에 대한 정리와 세 가지 종류의 십일조가 각기 담당하고 있던 이스라엘의 복지 및 사회안전망으로서의 기능에 대한 내용 등은 모든 신자들이 꼭 알아두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본서가 주는 아쉬움

앞서 언급한 많은 장점들, 학문적 깊이와 또 그것을 쉽게 풀어 전달한 본서의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제가 느끼는 한 가지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서의 구성이나 내용 면에서의 아쉬움이라기보다는 저자의 결론에 다소 동의하기 힘든, 필자 개인의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저는 저자가 서 있는 보수적인 신학 전통을 존중합니다. 그리고 저자가 지역교회의 담임목사로서 지켜야 하는 목회적 균형감각이 중요하다는 점 역시 인정합니다. 그래서 본서의 결론이 십일조라는 명칭 자체를 폐기하기보다는 거기에 신약교회의 보다 확장된 적용점을 담아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이자 사회적 책임으로서 지속시켜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내려지는 것 역시, 여러 정황상 가장 합리적이고 타당한 결정이라는 것도 이해합니다.

그러나 언어가 존재를 규정한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특정한 개념이나 행위를 향해 어떤 이름을 사용할 때는 그것에 담긴 본질과는 별개로 그 이름으로 인해 형성될 이미지에 대해서도 숙고해보아야 한다고 저는 봅니다. 오랜 세월을 통해 만들어진 십일조라는 이름에 엮인 이미지는 분명 오늘날 긍정적인 모습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더 부각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이제는 십 분의 일이라는 율법주의적 기준과는 하등의 관계없는, 복음의 자유 가운데 누려야 할 신자의 의무를 십일조라는 이름 자체에 내포되어 있는 기준이 계속해서 거슬리며 그의 자유를 훼방할 여지 또한 존재하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는 십일조라는 이름 자체는 무의미하다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고, ‘십일조라는 이름보다는 신약에 등장하는 더욱 적절한 명칭, ‘연보라는 간명한 개념어로 통일하는 것이 오히려 적절하다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저자 또한 본서에서 그것을 지적하고 있으면서도 결국 그 이름을 버리기보단 고쳐 쓰자고 하는 대목이 아쉬운 이유입니다. 마치 한 발 더 급진적으로 내딛어야 하는 결정적 순간에 주저앉는 듯한 느낌, 그것이 본서에서 느끼는 유일한 아쉬움인 것이지요.

결론부에서 느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본서는 기독교 신앙의 뜨거운 감자라 할 수 있는 십일조에 관하여 성경 본문들을 근거로 치밀하게 분석하고 정확하게 관찰한 내용을 쉽게 전달해준다는 점에서, 신자의 삶에 유익을 주는 좋은 책입니다. 주변에 십일조에 대한 강요와 겁박 등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지인이 있거나나, 교회에서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비성서적인 십일조에 대한 거부감과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왜 부당한지에 대해 정확한 반박을 하지 못했던 분들께 추천해주고 싶습니다. 이 작은 책을 통해 한국 교회의 일그러진 십일조 관행들이 조금은 고쳐지는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나기를 희망해봅니다.

 

글쓴이 정우조 강도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측 대학교회에서 강도사로 섬기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