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웅의책과일상] 복음, 하나님의 능력.
[김영웅의책과일상] 복음, 하나님의 능력.
  • 김영웅
  • 승인 2017.11.27 08: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권연경, 로마서 산책 바울을 사로잡은 복음의 능력, 복있는사람, 2010년
권연경, 로마서 산책 바울을 사로잡은 복음의 능력, 복있는사람, 2010년
권연경, 로마서 산책 바울을 사로잡은 복음의 능력, 복있는사람, 2010년

세상에 수많은 로마서에 관한 책이 있음에도, 저자 권연경 교수는 거기에 또 하나를 추가했다. 바울의 복음을 더 분명하게 이해하려는 기본적인 이유 외에도, 저자는 이 책을 집필하게 된 이유를 현재 치우쳐진 교회의 모습에서 찾는다. 한 쪽으로 치우친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반대쪽의 치우침이 필요한 법이다. 이 책은 그러한 균형을 잡고자 하는 한 성경학자의 외침이다.

로마서가 바울 서신 중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다른 서신들과는 달리 복음을 가장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바울 서신들은 바울이 개척한 교회 내의 여러 문제들을 다루기 위한 것이었다면, 로마서는 그러한 '상황적 목회서신' 형식에서 벗어나 있다. 자신이 개척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기본적으로 자신과 무관한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바로 로마서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를 쓴 이유를 직접 밝힌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때문이라고 말이다. , 이방인의 사도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신의 사도적 사역 수행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 15장에 쓰여 있는 부분을 근거하여 저자는 로마서가 단지 복음을 설명하는 목적이 아닌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바울의 선교 계획의 후원을 받고자 로마 교회에 보냈던 조심스러운 선교 편지의 역할을 바로 로마서가 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 공동체가 자신의 선교를 위한 베이스캠프 역할을 해주리라 기대했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보다 자기 소개하는 부분을 길게 잡는다. 일면식도 없던 교회 성도들에게 후원을 요청하는 바울을 상상해 보면, 조심스럽고 전략적일 수밖에 없었던 바울의 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스스로 사도라고 칭하지만, 사도행전 1장에 나오는 객관적인 사도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바울은 자기소개에 '변호'의 의미까지도 담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확한 복음 제시만이 자신의 복음과 자신에게 얽힌 오해들을 해명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었다. 바울에게는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바울의 고충 덕분에 21세기에 사는 우리들도 로마서를 통해 바울 복음의 진수를 강렬하게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로마서를 읽는 관점에 대해서 쓴 소리를 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때 그곳'의 컨텍스트를 아랑곳하지 않고 로마서를 '지금 나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읽는 행위를 저자는 '해석학적 우상숭배'라고 칭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공부하면서도 우리 교회가 무력한 것은, 어쩌면 이러한 자기중심적 우상숭배와 관련된 것은 아닐까?"하고 말이다. 로마서를 넘어서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먼저 그 시대의 컨텍스트를 이해하고 저자의 의도와 목적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약과도 같은 거룩한 (? = 몽롱한 = 철저히 자기 안위적인 = 이기적인) 자아도취 성경읽기에서 결코 탈피할 수 없을 것이다.

로마서는 신학적이면서도 목회적인 논증이 주조를 이룬다. 문학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 어렵더라도 바울의 논증을 따라가야만 바울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이 최종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복음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거는 바로 '복음에 하나님의 의 (칭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나 고린도전서에서도 바울은 복음을 능력이라고 칭한다. 율법이 아닌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성령의 역사가 주어져서 의의 소망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며, 헬라의 그럴듯한 지혜조차도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지만, 십자가의 복음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여도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이 사용한 '능력'이라는 말은 예수의 부활을 가리키는 말로써, 바울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한마디로 '생명 창조의 능력'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질 역시 '생명 창조의 능력'이었다. 생식적으로 죽은 자신의 늙은 몸을 살려 이삭을 낳게 한 것이나, 죽은 이삭을 다시 살려 내는 것이나 공히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리스도인들의 믿음 사이의 연결고리 역시 한마디로 부활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믿을 때에 의롭다 함을 받았는데, 그 믿음은 곧 부활신앙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예수의 부활을 전제한다. 예수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의 죄가 청산되었다면, 예수의 부활하심을 통해 우린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

이방인의 사도답게 로마서에 흐르는 바울의 논증 전체는 유대인-헬라인의 관계로 채색되어 있다.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는 애기다.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그 어떤 사람도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 우린 무할례자일 때 믿고 의롭다 함을 입었던 아브라함을 절대로 잊어선 안 된다. 바울은 구원이 '모든 믿는 자'를 위한 것이라는 점을 지겹도록 반복, 강조한다. 이미 팽배했던 유대인들의 배타적 선민의식을 깨부수기 위함이었다. 구원은 율법의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함에 있다. 심판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아브라함의 후손됨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바울은 선민사상에 가득 찬 유대인들을 향해 날을 겨눈다. 구원받을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은 외면적 표지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 실천으로 뒷받침되는 내면적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다.

바울은 믿음과 행위를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엮는다. 사랑이 수고로, 소망이 인내로 나타나듯, 믿음은 행위로 그 면모를 드러낸다. 믿음은 믿음의 순종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결코 '행위 없이'라는 말과 연결될 수 없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지키지 않는 이들을 향한 바울의 대안은 율법의 폐기나 초월이 아니라 율법의 실천과 순종이었다. 이런 위선적인 유대인들의 문제점에 대해 참된 해결책으로 바울이 제시한 것은 바로 '마음의 할례'였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성령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 바울이 역설한 복음의 핵심이었다. 바른 믿음이란 결코 모든 행위를 제거한 것이 아니다. 믿음의 순종, 즉 믿음이야말로 참된 순종을 가능하게 해주는, 즉 참된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해답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신칭의' '행위 아닌 믿음'을 말해놓고, 이 믿음이 반드시 행위로 이어진다고 말하는 건 논리적 모순일 수 있다. 그러나 믿음과 행위가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바울이 배격한 율법의 행위란 행위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위의 부재를 폭로하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만이 칭의의 참된 해답인 이유는 바로 믿음으로만 성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에서 나는 성령으로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는 말은 바울의 관점을 정확하게 요약한다.

그리고 칭의의 관건이 된 믿음은 부활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부분이 아브라함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이 정확히 일치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이러한 일치를 DNA라고 명명하고 있으며, 그 이유로 우리 역시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역설한다. 부활이 없다면 칭의는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해 죽은 사람이다. 그래서 더 이상 죄로 하여금 우리를 다스리게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적 의미의 불가능성이지 현실적인 불가능성은 아니다. 우린 여전히 현실에서 죄를 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죽음'이라는 것은 윤리적 명령과 결합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믿음은 이러한 현실에서 끊임없이 신적 현실을 선택하는 결단인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하나님의 완벽한 계시였으나 바울은 진정한 해결책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율법은 죄를 인식하게 해주는 능력은 있으나 결코 그 죄 자체를 해결할 능력은 없기 때문이다. 율법은 죄에 대해 무기력한 존재다. 우리가 죄의 다스림 아래에 놓이게 되었던 것은 율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율법이 무기력하여 주범 된 죄의 공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믿음과 율법의 대립구조를 바울은 성령와 육체로 비유하기도 하는데, 육신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이다. 칭의라는 법정적 선포는 성화라는 도덕적 변화를 반드시 수반한다. 성화가 없는 칭의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성령이다. 복음의 핵심에는 성령으로 인하여 믿는 자들에게 세상에 없던 미래의 소망이 생겼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상속자 신분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홀로 모든 것을 우리와 상관없이 다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세밀한 부분까지 끊임없이 인도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에 순종하도록 결단하게 만드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하고, 허리띠를 졸라 매야 하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전시상황과도 같은 것이다. 성령의 인도와 역사는 결코 편하지 않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개념의 정의는 '육신의 자녀'에서 '약속의 자녀'로 재정의되었다. 민족적 혈통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이 이스라엘 정체성의 핵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 믿음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 구원은 공평하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정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이방인들이나, 복음에 불순종하여 이방인과 입장이 뒤바뀐 이스라엘이나 할 것 없이 모두 복음을 받았다고 해서 우쭐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두려움과 황송함을 느껴야 한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믿음의 순종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스라엘을 자르셨듯 이방인도 자르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도 아니고 이방인들만을 선택하신 것도 아니다. 구원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의 삶을 '살아 있는 제사'라고 표현한다. 제사로 드려지기 위해서는 거룩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거룩해야 한다. 그 유일한 통로는 성령이다. 우리가 드려야 마땅한 예배는 주일날 뿐 아니라 평일의 일상 가운데에도 거룩함으로 나타나져야 한다. 이것이 합당한 예배다. 바울은 우리에게 마음의 갱신을 요구하는데, 이 말은 한마디로 생각을, 가치관을 바꾸라는 것이다. 산 제사가 되어야 할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은 곧 끊임없이 성령의 인도에 귀 기울이며 순종함을 결단하고 실행에 옮기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삶일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을 따르는 것이다. 로마서를 여러 번 읽었었지만, 이번만큼 로마서를 깊게 이해해 본 적은 없었다. 번역 탓이기도 하겠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이야기였다. 아마도 이것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이 책, '로마서 산책'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성경학자인 권연경 교수의 친절하고도 예리한 주석적인 글이 로마서를, 나아가 바울의 복음을,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글쓴이 김영웅박사는, 하나님나라에 뿌리를 두고, 문학/철학/신학 분야에서 읽고/쓰고/묵상하고/나누고/배우는 것을 좋아하며, 분자생물학/마우스유전학을 기반으로 혈액암을 연구하는 가난한 선비/과학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