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기독교 역사 이야기
흥미로운 기독교 역사 이야기
  • 정한욱
  • 승인 2019.04.06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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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원,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홍성사
최종원,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홍성사
최종원,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홍성사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는 경희대와 버밍엄대학교에서 서양사를 공부하고 현재 벤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에 재직중인 역사학자 최종원 교수가 쓴 초대교회사 입문서다. 저자는 이 책의 서문에서 교회가 세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와 사명을 성찰하기 위해서는 세상과 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초대 기독교회의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그 시대가 이상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직면한 문제와 도전들 앞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 신학이 아닌 역사학의 눈으로 초대교회 형성기의 쟁점 및 배경을 살피고, 초대교회가 중세 및 종교개혁기에 어떻게 재해석되었는지 설명하며, 현재 한국교회가 서 있는 지점에서 초대교회사를 통해 고민하고 성찰해야 할 지점을 차분히 짚어 나간다. 저자는 교회가 출발부터 ‘체제 밖의 타자’를 지향하는 수도원 공동체였으며,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은 세상의 가치에 매몰되지 않은 더 숭고한 가치를 전하고 공평과 정의를 이루겠다는 다짐과 의지를 표명하는 말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탁월한 통찰로 가득 한 이 책의 내용을 장별로 요약하고 마지막에 개인적인 단상을 덧붙이도록 한다.   

 

교회의 시작점에 관한 논의 - 교회란 무엇인가   

현재 우리가 선 자리는 교회의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며, 신학적 관점의 차이로 다름을 타자화시키는 것이 극히 무지하고 무례한 행위다. 교회의 출발이 어디에서부터인지에 대해 크게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가톨릭교회는 예수의 성육신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시작된다고 본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인교회는 구원을 베풀 수 있는 신적 기관이고, 예배의 핵심은 사제가 물과 포도주를 예수의 피와 살로 만드는 성찬예식이며, 성례전을 집례하는 사제의 권위는 무한이 높아지게 된다. (2) 자유주의 신학의 견해에 따르면 예수는 교회를 세울 의도 없이 하나님이 제시한 율법을 뜻을 재해석하는 유대교 내의 개혁가였으나, 그의 사후 제자들이 인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교조화함으로서 교회가 발생했다. 또한 기독교와 유대교는 같은 범주에서 시작했으나 점진적 갈등의 과정을 거치다가 예루살렘 멸망과 얌니야 회의를 거치며 완전히 분리되었다. (3) 복음주의 프로테스탄트는 예수가 승천 후 보내신 성령으로 인해 교회가 시작되었으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일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성령이 함께함을 믿는 신자들의 모임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초대교회 당시 예수를 따르던 무리는 유대교의 한 분파 또는 이단으로 여겨졌지만,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이미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학적 관계는 청산되었다고 강조한다.

 

기독교가 급속하게 확산된 이유 - 초대교회의 형성 배경   

교회사의 중요한 배경이 되는 신구약 중간 및 신약 시대는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동방 지역이 헬라화되면서 동-서방의 문화가 마주쳐 융합하는 시기였다. 자신들의 종교는 보존했지만 언어와 문화의 헬라화를 수용한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히브리 성서의 헬라어 번역판인 ‘70인역 성서’의 존재는 유대 사상과 헬라 사상이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되었고, 이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유대 사상과 세계관을 수용하지만 까다로운 조건이 요구되는 유대교에는 입교하지 않는 이방인들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에게 유대인처럼 엄격한 율법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의미 있고 윤리적인 삶을 살도록 해주는 예수의 가르침은 훨씬 큰 수용력이 있었으며, 이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면서 기독교를 세계 종교화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활동하며 아람어를 사용하던 초대교회가 헬라 문화권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사전 정지작업이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며, 히브리의 메시아 사상에서 출발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헬라 철학과 로마법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사도바울이 선교 사역의 방향을 아시아 지역으로 바꾼 것은 그가 사역 초기부터 복음의 세계화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민족주의, 인종주의를 넘어 세계로 - 유대교와 기독교   

귀환 공동체에서 예루살렘 멸망 이제까지의 제2 성전기 유대교와 기원후 70년의 예루살렘 멸망 이후 바리새파 유대주의를 중심으로 재편된 후기 유대교는 자신들의 존립을 위협하는 거대한 도전으로 여겨진 헬레니즘에 대한 대응으로 유대적 성향을 강화해 나갔고, 그 이후 유대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폐쇄적이며 배타적인 민족주의자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반면 원시 유대교의 분파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으로 신앙의 핵심이 이동하면서 독자적인 종교로 서게 된 기독교는 유대종교의 인종주의와 혈통주의, 선민주의에서 벗어나고 배타성과 자기중심성을 극복함으로서 급격하게 성장하는 보편종교 혹은 세계종교가 될 수 있었다. 인종과 성별, 계급의 경계를 넘어선 새로운 인종이라 불렸던 초대교회와 달리 교세가 확장된 후 종교적 인종주의의 덫에 걸려 사회적 약자, 성소수자, 타종교등 타자에 대한 증오를 기반으로 삼는 것처럼 보이는 한국교회는, 교리를 정교하게 다듬거나 조직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가 가졌던 보편적인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 진정한 회복의 길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대안적 세계관과 가치관의 승리 - 초대교회의 성장과 박해    

AD 64년 네로 황제의 통치 때부터 로마에 의해 일어난 박해는 331년 기독교 공인 때까지 황제의 성향이나 정치적 상황에 따라 간헐적으로 이어졌으며, 초기에는 주로 교회의 재산 몰수와 성직자들에 대한 박해의 형태로, 기독교의 세력이 커진 후로는 사람이 아니라 성서와 기독교 서적 몰수의 형태로 나타났다. 종교를 사회 통합과 제국의 일체성 유지를 위한 기제로 여겼던 로마인들에게, 인종적 폐쇄성이 강했던 유대교와 달리 보편주의적 성향을 띠었고 황제숭배를 거부했으며 식인이나 무신론의 혐의를 받던 기독교는 사회의 일체성을 해치는 해로운 미신 중의 하나로 여겨졌다. 이러한 박해로 교회에는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와 살아서 진리를 입증한 변증가라는 새로운 부류의 그리스도인들을 출현했으며, 교회 내에 핍박을 견딘 사람들과 변절했다가 다시 회개하고 돌아오려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발생했다.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신앙적 영예가 순교라는 등식이 등장했고, 성도들의 죽음으로 인한 증거로 인해 역설적으로 교회가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 시대의 기독교가 정화되고 올바른 성장을 이루기 위해 역설적으로 박해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죄인을 구원하는 은총의 통로 - 라틴 교회    

라틴 교회는 헬라 교회의 뿌리로부터 나왔으며, 초대교회의 발전에는 동방의 언어와 문화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동방의 신학 사상과 견줄 만한 라틴 신학이 발전되기 시작했으며, 그 대표적 인물이 라틴어를 신학적 언어로 사용한 첫 번째 신학자인 테르툴리아누스였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테르툴리아누스의 말은 헬라 철학의 바탕 위에서 기독교 신학을 설명한 동방 신학을 거부하고, 로마법 체계와 사상을 빌려 신학적 사유와 변증을 전개하는 서방 신학의 독자적 자의식의 선포라 할 수 있다. 그는 세례를 통해 얻은 구원이 죄로 인해 상실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구원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제시했으며, 이는 수시로 범할 수밖에 없는 죄를 씻어내기 위해 교회가 제정한 일곱 성사에 참여함으로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가톨릭의 공로주의 신학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또한 테르툴리아누스는 삼위 하나님이 각자 독립성을 띤 법적 행위자이지만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 하나의 실체를 이루고 있다고 보았으며, 이는 서방신학이 신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역동적인 신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신비를 추구하는 신앙 - 동방교회   

동방교회야말로 신약이 처음 기록된 언어를 사용하고 그 문화권에 속해 있는 교회이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천 년간 존속하며 독자적인 문명을 이룩했다. 동방교회에서 ‘성사’를 의미하는 단어인 mysterion(신비)이 “풀 수도 수 없고 풀려고 할수록 진정한 진리와 멀어지는 것”이라는 의미라면(부정 신학, via negativa), 서방교회의 sacrament(비밀)는 “풀어 나가야 하고 풀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뉘앙스가 강하며, 이는 양 교회의 신학적 태도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서방교회가 ‘세례’를 구원과 직결된 법률적인 신분의 변화를 선포하는 행위로 이해하는 반면, 동방에서는 더 깊은 신비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의 시작으로 본다. 또한 서방신학에서 구원이 삼위의 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라면, 동방교회에서는 계층구조를 하나씩 밟고 올라가는 神化(heosis)의 과정과 동일시한다. 이렇게 로마법과 그리스 철학을 기초로 발달한 양 신학은 필리오케 논쟁이나 성상논쟁과 같은 여러 논쟁들을 거치며 점점 관계가 악화되다가 11세기에 공식적으로 결별했다. 구원을 결코 취소될 수 없는 물리적인 성취의 대상으로 보는 법정적 칭의 개념에 익숙한 개신교에게 구원을 미래에 성취될 현재 진행 중인 여정으로 보는 동방교회의 태도는 여러 가지 성찰할 지점을 제공한다.

 

근본을 추구하는 급진파들 - 초대교회의 이단 운동   

기독교 공인 후 일련의 분쟁들이 발생하면서 정통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규정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났다. 공식적으로는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로부터 초대교회의 일곱 차례의 공의회 동안 교회가 합의한 신학적 규범에 일치하는 입장이 정통이 되고 배척된 것은 이단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승자가 정통이 되고 패자가 이단이 되었다거나, ‘원 정통’이 언제나 확고부동하게 존재하고 있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정통신학’은 이단의 도전에 대하여 교회 공동체가 초대교회로부터 믿고 고백해 온 암묵적이고 함축적인 ‘진리’를 확인하고 명료화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정경을 정하고 신조를 만들며 교회의 직제를 제정함으로서 여러 이단들에 대처해 나갔으며, 이러한 제도화의 과정에는 보편성과 안전이라는 긍정적 함의 뿐 아니라 보수화와 고착화라는 문제도 수반되었다. 역사적으로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지키고 보편을 지향한 집단이 종교성의 명맥을 이어 온 반면,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분파화된 교회는 존속에 실패했다. 오늘날 교회는 정통과 이단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 다른 목소리들이 전해 주는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기울여야 하며, 자신이 직면하는 도전에 대해 교리적 정밀함이 아닌 교회다움의 본질인 거룩을 보여줌으로서 대응해 나가야 한다.

 

세속화에 맞선 사막의 영웅들 - 수도원 운동   

3세기 말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수도원 운동은 기성 제도 교회가 종교성을 상실하고 사회적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때 교회를 일깨우고 개혁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규모와 관성 때문에 변화와 어려운 기성교회와 달리, 수도원은 아래로부터 발생하는 강력한 영성과 운동성을 가지고 역동적으로 출발했다가 그 역동성이 상실되면 새로운 운동으로 대치되는 형태로 계속 이어져 왔다. 그들은 위로부터 부과된 종교가 가지고 올 위험이나 해악을 피하고자 자발적인 금욕의 삶을 선택했으며, 성 안토니우스나 시므온 같은 단독고행자들이 개인의 영성과 신비를 추구한 엘리트들이었다면, 타코미우스와 바실리우스로부터 시작된 공동수도회는 사제가 아닌 속인들에 의해 주도되는 실천적인 대중운동을 지향했다. 그 중 대표적인 서방 수도회인 베네딕투스 수도회는 순명 · 독신 · 청빈과 같은 기본적인 수도규칙을 확립했고, 교육과 학문을 통해 종교 엘리트들을 양성하고 서구문명을 전수했으며, 예수의 지상명령에 따라 서유럽의 기독교화에 크게 기여하는 등 서유럽 문명 및 기독교의 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또한 수도원의 폭발적인 생명력의 결과 생겨난 대학은 국가나 교회로부터 학문의 자유를 수호함으로써 다양한 학문의 진보를 촉진했을 뿐 아니라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개신교는 수도원을 폐지했지만 수도회가 해 왔던 교회와 사회에 대한 선지자적인 비판과 대안제시의 기능은 이어가야 한다.

 

국가와 교회의 관계의 전환점 - 기독교 공인   

초대교회 시대에 교회와 국가는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지 않았으며, 열세에 놓여 있던 교회는 현실에서 세속 군주의 지배권에 복종하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로마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던 기독교가 공인된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경험한 특별한 사건으로 갑작스럽게 결정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이미 박해로 근절이 불가능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을 뿐 아니라 쇠퇴한 로마의 행정체계를 대신할 만한 자격을 갖춘 사제들과 직제가 견고하게 마련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제국의 시각에서 볼 때 기독교는 로마를 새로운 가치 안에 하나로 묶기 위한 통치 이념이었다. 기독교의 공인 이후 일요일이 휴일로 지정되었고 교회 성직자들에게는 군복무와 세금 납부의 의무가 면제되었다. 또한 제국의 통치 이념인 기독교를 하나로 통일하고자 황제의 주도 하에 공의회가 개최되었고, 교회 법정을 제국의 사법 제도에 편입시킴으로서 교회의 분쟁에 제국의 사법권이 간섭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이렇듯 기독교의 공인은 대단한 특권이자 교회의 성장을 위한 절호의 기회였지만, 교회가 어용신학을 통해 국가권력의 시녀로 전락할 위험에 직면한 것이기도 했다. 교회와 국가, 종교와 세속 권력이 긴장 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때 종교는 항상 타락했으며, 교회는 국가의 이익을 넘어 인간 보편의 이익과 가치를 지향할 때만 진정한 존재 의미가 있다.

 

제국 교회 제국 신학의 탄생 - 니케아 공의회   

313년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불거진 아리우스파로 인한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325년과 381년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에서 공의회가 열렸다. 황제가 소집한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 문제가 다루어진 것은 기독교가 제국 종교(국가교회)가 되면서 신학논쟁이 정치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황제의 관심사는 신학적 주제가 아니고 기독교가 분열을 극복해 로마 제국의 견고한 통치 이념이 되는 것이었으며, 일단 교회 문제에 세속 권력이 관여하게 되자 제국이 처한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공의회의 결정 사항이 뒤바뀌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실제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의 유사본질(homoiousios)을 주장하는 아리우스파는 다수의 참석자들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되었으나, 황제는 나중에 측근이었던 유세비우스의 설득으로 친아리우스파로 돌아섰다. 그 후 아타나시우스와 갑바도기아의 세 교부들은 세속권력의 강력한 비호를 받던 아리우스파에 대항하여 소수였고 핍박받던 삼위일체 교리를 변증했으며, 그들의 주장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 확증되었다. 그들은 엄정한 논리나 권력의 도움이 아니라 세속과 타협하지 않는 고난과 영성을 추구하는 수도사적인 삶을 통해 아리우스주의와 싸웠으며, 이들이 살던 4세기는 ‘신학은 삶’이며 신에 대한 근본적인 앎은 ‘삶’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보는 ‘동방 신학의 황금기’로 불린다.  

 

다름이 틀림으로 - 교리의 확립과 교회의 분열   

‘예수는 하나님’이라는 명제가 확립된 니케아 공의회 이후에는, 하나의 인격 속에 두 본성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다루는 “그리스도의 양성론 논쟁”이 새롭게 대두하였다. 아폴리나리우스는 예수가 인간의 육체에 신의 영혼을 안고 있는 존재라고 주장했고, 유티케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어 하나의 새로운 본성이 생겨났다고 주장했으며(단성론), 네스토리우스는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느슨하게 ‘결합(conjugate)’하고 있다고 주장했다(양성론). 이에 대해 에베소 공의회와 칼케돈 공의회는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인정하면서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연합(union)'했다는 정통파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칼케돈 신조는 아폴리나리우스, 유티케스, 네스토리우스의 잘못된 부분을 부정함으로서 올바른 것만 남게 하는 “부정의 신학”의 결정체였으며,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은 채 남겨졌다.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양성론 기독교는 동방지역 선교에 큰 공을 세웠으며, 칼케돈 공의회의 결의를 거부한 단성론자들은 오리엔트 정교회(oriental orthodox church)로 자리잡았다. 현대에는 이 시기의 기독론 논쟁에 대해 정통과 이단의 문제라기보다 견해 차이에 따른 교회분열이거나 정치적 권력다툼의 결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초대교회의 뒤안길 - 아우구스티누스와 역사   

인간의 자유의지와 도덕적 삶을 위한 노력을 긍정한 펠라기우스에 반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의 타락과 원죄의 유전으로 인해 인간은 완전한 선에 도달할 수 없으며, 신의 은총과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인 성례전과 선행을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구원의 중재자인 교회와 사제 및 성례에 인간이 철저히 예속되는 중세 가톨릭 신학으로 이어졌으며, ‘오직 믿음’을 강조한 루터의 종교개혁 역시 당대의 인문주의자들이 재생시킨 인간의 존엄과 책임을 간과했다. 또한 그는 로마의 쇠퇴 원인이 기독교 때문이라는 공격에 대해 지상의 도성인 로마는 신의 도성과 동일시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이타적 사랑이 아닌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 작용하는 곳은 로마든 교회든 모두 지상의 도성일 뿐이라고 해명한다. 그리고 모든 세속 역사의 배후에는 자신의 섭리를 구현하려는 신의 의지가 존재하며, 로마의 쇠퇴와 멸망도 결국 구속사적 섭리의 결과였다고 강조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사상을 통합하여 서구 사상의 근간을 놓았고, 서구인들은 그의 목적론적 섭리사관을 통해 자신을 역사의 능동적인 주체로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전적 타락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극도로 부정적인 인간관을 형성했으며,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간주하는 그의 역사철학은 환원론과 비관론, 그리고 이원론으로 비판 받을 여지도 충분하다. 

 

에필로그 - 다시 낮은 곳으로 다시 환대와 포용으로   

초대교회는 당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갖고 있던 문화적 혈통적 인종주의를 극복하면서 이방인, 여성, 타자 등 대중 속으로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혼란했던 로마 제국 말기에는 체제의 대안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며, 교회에 가해지는 오해와 박해를 넘어 마침내 합법적 종교로 공인되는 유의미한 성취를 이룩했다. 또한 교회는 동방과 서방의 각각 다른 언어와 문화, 철학의 컨텍스트에서 독자적이고 다양한 사상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말미에 정통 신학이 확립되고 교회가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바른 신학을 정립한다는 명제하에 형성된 ‘진리’ 대 ‘비진리’라는 이분법은 교회로 하여금 지나치게 배타적이고 협소한 갖게 했으며, ‘정통’이 규정한 범주 안에 들지 못한 분파나 여성들을 물리적 제도적으로 차별하고 통제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그뿐 기독교 공인 이후 교회는 급속하게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으며 권력과 밀착하게 되었다. 결국 초대교회는 이민족의 침입으로 무너진 서로마와 함께 막을 내린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싹튼 다름에 대한 배제와 타자에 대한 편견 대문에 무너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장과 번영으로 비대해진 이후 타자를 관용하지 못하는 반사회적인 모습을 보이는 한국교회는 세미한 음성을 듣기 위해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 엎드려야 하며, 타자에 대한 배척을 넘어 포용의 자세를 회복해야 한다. 초대교회 역사는 이 길이 한국교회 회복의 길임을 웅변해 주고 있다.

 

개인적 단상

이 책은 흉악한 이단의 도전에 맞서는 위대한 교부들에 의해 어떻게 정통교리와 정통교회(서방 기독교)가 굳게 서가는지를 신학을 전공한 교회사가의 입장에서 서술한 “교리 중심의 정통 교회사”라기보다,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일반 역사가가 제국의 변방에서 발생한 미미한 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자리잡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당대의 정치 사회 문화와의 관련 속에서 플어 쓴 “흥미로운 기독교 역사 이야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그리스도의 양성론 논쟁이 전통과 이단의 문제라기보다 견해 차이나 권력다툼으로 볼 여지가 있다고 설명하거나, 전적 타락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부정적인 인간관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등, 기존의 서구 중심 · 교회 중심 · 서방 기독교 중심의 교회사에서 벗어나 좀 더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시각으로 초대 기독교 역사를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의 시야를 열어 준다.

이 책의 또다른 특징은 사실의 서술에 치중하는 일반 교회사 서술과 달리 역사적 사건의 해설이나 해석, 그리고 한국교회 상황에서의 적용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책의 목표는 ..... 인식과 의식의 지평을 넓혀 주는 것”이라는 저자의 믿음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는 E.H. 카의 명언을 떠오르게 하는 저자의 이러한 접근방식은 21세기의 한반도에 사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도대체 초대교회사가 왜 필요하며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 한국교회는 저자의 결론이자 초대교회의 역사가 현재의 우리에게 건네는 고언인 “초대교회가 열려 있고 보편성을 지향하는 공동체일 때는 성장했지만, ‘정통’과 ‘주류’의 게토에 갇혀 타자를 배척하기 시작하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는 일갈을 주의 깊게 경청해야 할 것이다. 역사를 무시하는 자들은 그 역사를 반복하는 저주에 빠진다는 격언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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