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환] 원수사랑
[이택환] 원수사랑
  • 이택환
  • 승인 2019.02.23 22: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택환 목사의 설교 - 누가복음 6:27~36
김동문
김동문

오늘 복음서 말씀은 흔히 평지설교라고 불립니다. 마태복음에 이와 비슷한 내용의 산상설교가 있지요. 두 설교는 큰 틀에 있어서 비슷하지만, 평지와 산이라는 점 외에도 내용이나, 강조점, 순서, 길이 등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누가복음 평지설교는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는데, 마태복음 산상설교는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를 근거로 누가 공동체에는 진짜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고, 마태 공동체에는 상대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보기도 합니다. 실제로 누가복음에는 ‘므나’(헬라의 화폐단위)의 비유가 나오는데, 마태복음에는 므나보다 60배나 더 많은 비슷한 내용의 ‘달란트’의 비유가 있습니다. 확실히 마태 공동체의 돈의 단위가 큽니다.

어떤 이들은 평지설교나 산상설교나 원래 예수님이 하신 하나의 설교였는데, 그것이 각각 누가와 마태 공동체에 맞게끔 변형되었다고 봅니다. 한편 다른 이들은 원래부터 서로 다른 설교였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이 매번 새로운 설교를 하신 것이 아니라, 비슷한 설교를 산에서도 하시고, 들에서도 하시고, 바닷가에서도 하셨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청중이 다르니까요. 우리는 그 중 어떤 한 가지만 절대 진리로 볼 수 없기에, 다양한 해석에 대해 마음을 열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논의들이 합리적인 근거를 통해 갑론을박하면서 신학이 발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원수사랑”이라고 한 것은, 원수라는 한 단어 안에 오늘 말씀에 나오는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다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곧, 너희를 미워하는 자, 저주하는 자, 뺨을 치는 자, 겉옷을 빼앗는 자, 무엇인가를 계속 요구하고 가져가는 자, 늘 대접받기를 원하는 자 등입니다. 1세기 유대 사회에서 그런 일을 행하는 원수는 어떤 특정한 일반인이라기보다, 아마도 유대를 지배했던 로마인, 또는 그들에게 부역했던 유대의 하수인, 곧 헤롯에서 세리까지 동족을 괴롭혔던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합니다(단, 헤롯은 에돔인). 그들에게 돌려주어야 할 몫이 있다면, 그동안 유대인들이 당한 것의 수십, 수백 배를 되갚아 주는 강력한 보복일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성경이 규정한 적절한 보복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습니다. 이를 ‘렉스 탈리오니스’, 흔히 ‘동해보복법’이라고 하는데, 누군가 해를 입으면 똑같은 만큼의 해를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마치 보복을 장려하는 규정처럼 보이지만, 실은 보복을 제한하는 장치였습니다. 인간에게는 해를 입으면 그 이상으로 갚아 주고자 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지요. 언젠가 자신의 아들이 술집 종업원에게 맞은 일을 보복하기 위해, 경호원 17명을 대동하고 그 술집 종업원을 청계산으로 데려가 무자비하게 폭행한 대기업 회장이 있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도 이런 악마적인 본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흥행하는 영화들마다 잔인한 보복을 다루는 장면이 매우 자주 나오지요.

AVRAMGR

1세기 유대인들이 로마인들과 그들의 부역자들을 향해 행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도 확실한 보복은 아마도 민중봉기였을 것입니다. 성공할 수 있다면 말이지요. 예수님도 어린 시절 그런 민중봉기의 현장을 목격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근처에는 당시 갈릴리의 행정을 총괄하는 세포리스(Sepphoris, 또는 Zippori)라는 도시가 있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이 십대 시절(주후 6년 경), 에제키야의 아들 유다가 세포리스 주변의 절망에 빠진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아 세포리스를 침공했습니다. 그러나 로마 황제가 시리아의 총독 바루스를 보내어 이 반란 세력을 응징했고, 그들을 처형하기 위해 세포리스 주변에 무려 2000개의 십자가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혹시 예수님의 부친 요셉이 이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을까요? 요셉이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분명 예수님 이웃들 중에 독립 운동에 가담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또 십자가 처형을 당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편 그 무렵 갈릴리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가 세포리스를 “갈릴리의 장식물”, “로마황제의 수도 도시”로 만들기 위해 대규모 토목 사업을 실시한 적이 있습니다. 혹자는 목수였던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이 세포리스 재건을 위한 강제 부역에 동원되었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김정형, 온돌왕자의 God-Talk).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예수님은 민중봉기를 통해 로마에 대한 원수를 갚는 일의 한계를 일찌기 터득했을지 모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길을 거부했던 유대인들은 1세기 내내 수많은 대로마 항쟁을 벌였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주모자들 모두가 십자가에 처형되었고, 주후 66년에 일으킨 유대 독립전쟁마저 70년, 로마 장군 티투스에게 패하고 마침내 비참한 마사다의 최후로 끝을 맺었지요. 그 후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얻기까지, 2000년 동안 유대는 세계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반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길을 간 기독교는 로마제국이 가했던 수많은 핍박을 다 이겨낸 끝에, 마침내 로마를 얻고 세계를 얻습니다.

 

오늘 원수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이런 유대의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지,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 적용되는 일반적인 규범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오늘 원수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이런 유대의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지,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 적용되는 일반적인 규범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자칫 그리스도인은 남에게 무조건 짓밟혀도 된다는 것으로 오해될 수도 있구요. 그래서 니체는 기독교를 노예근성을 가진 자에게나 적합한 종교로 보았던 것이지요. 그리스도인들은 불의 앞에서 겁쟁이가 되고, 불의를 방조해도 된다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랬기에 한국의 보수적인 기독교회가 과거 민주화 이전의 권위주의 정부 시절, 독재자들을 축복하고, 그들 편에서 함께 민중들을 억압해 온 면이 있었습니다. 악을 대적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용납하고, 불의에 항거하는 자들을 정죄했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분명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으셨고, 또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이 메시지는 당시 로마제국에 대한 유대의 그 어떤 무장폭력 혁명보다, 더욱 강력한 저항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인들은 유대를 식민지배 하면서 수탈하는 행위가 옳지 않다는 사실을 나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이 대로마 항쟁을 벌이면 벌일수록, 오히려 그 땅의 평화와 질서유지를 위해 무자비한 진압이 필요하다는 좋은 명분만 제공할 뿐이었지요. 따라서 그보다 압제자들을 선대하며, 축복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비폭력 항쟁을 벌이는 것이 정복자들을 스스로 부끄럽게 만드는 최선의 방식일 수 있었습니다.

압제자들을 위해 축복하고 기도하는 것이 결코 그들의 승승장구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진실로 정의롭고 평화를 사랑하는 자들이 되기를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지요. 원수에게 선행을 베푼 일과 관련하여 16세기 재세례파 더크 월렘스(Dirk Willems)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더크 월렘스는 1569년 어느 날 장로교의 혹독한 핍박을 피해 한 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강을 건너서 도망쳤습니다(당시 재세례파는 이단). 그런데 그를 쫓아오는 장로교도가 깨진 얼음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자, 더크가 되돌아가서 그를 건져냅니다. 하지만 물에서 올라온 장로교도는 감사하다는 말 대신, 더크 월렘스를 체포해서 화형장으로 보내지요.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 장로교가 재세례파에게 행한 가장 부끄러운 일 가운데 하나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비폭력 행동, 더 나아가 압제자들을 선대하는 것이 비록 즉각적으로 압자자의 마음을 변화 시키지 않는다 해도, 비폭력적 행동에 헌신하는 사람들에게는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마틴루터 킹 목사가 증거했듯이, 비폭력적 행동은 그들에게 새로운 자기 존경심을 갖게 하며, 자신들이 갖고 있는 줄 몰랐던 힘과 용기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마침내 상대방을 변화시키고, 역사를 바꾸게 되지요. 아직도 부족하지만 그 일이 미국 역사에서 실현된 바 있습니다. 미국의 제 44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탄생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활동이 미국의 흑인들만 도운 게 아니라, 사실상 모든 인류를 해방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한편 원수사랑은 단지 힘없는 자들이 힘 있는 자들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무 옵션의 논리가 아닙니다. 오늘 구약 창세기의 말씀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과거 요셉의 형들은 어린 요셉을 시기하여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요셉은 그로 인해 이집트의 노예가 되어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게 되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는 파라오 다음으로 권세를 지닌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 무렵 온 세상에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지자, 요셉의 형들이 곡식을 구하러 식량이 풍부한 이집트에 왔다가 요셉을 만납니다. 형들 앞에 절대 약자였던 과거와 달리 절대 강자가 된 요셉은, 그러나 형들이 저지른 악행을 보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음에도, 그들을 보복하지 않습니다.

창 45:5, 7)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6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으로 형들을 선대하고, 축복해 줍니다. 그러고 보면 원수사랑은 약자의 논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강자의 논리지요. 때로는 약자처럼 보일지라도,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강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가장 약한 자는 누구인가? 미워하는 자, 저주하는 자, 뺨을 치는 자, 겉옷을 빼앗는 자, 무엇인가를 요구하며 늘 가져가는 자, 대접하기보다 늘 대접받기를 원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힘 있는 자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장 약한 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다음과 같이 강조하십니다.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우리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들에게 인자해야 하는 이유가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분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자비로워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십니다. 더 나아가 은혜를 원수로 갚은 자들에게도 인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기를 원하시지요. 그러기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내어 주셨습니다(로마서 5:8).

특이하게 36절의 자비롭다는 헬라어가 ‘크레스토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헬라어로 ‘크리스토스’인 것과 유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곧 크리스토스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크레스토스, 자비로운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 우리가 그 일을 과연 얼마나 잘 감당해낼 수 있을까요?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하오니, 자비로운 주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