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웅의책과일상] 그림자가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꿈꾸며
[김영웅의책과일상] 그림자가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꿈꾸며
  • 김영웅
  • 승인 2019.0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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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百의 그림자, 민음사, 2017년
황정은, 百의 그림자, 민음사, 2017년

며칠 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편두통이 말끔히 사라진 오늘, 공교롭게도 날씨가 흐리다. 그림자 하나 생기지 않을 정도로 빛이 자취를 감췄다. 정오 즈음 되니 비도 추적추적 내린다. 모처럼 말끔한 머리로 맞이하는 간만의 흐린 하루. 밖을 나와 비 냄새를 맡으니 이내 마음이 차분해진다. 함께 젖어가는 기분도 나쁘지 않다. 의외로 안정감과 편안함까지 느껴진다.

N과 일대일 미팅 중이었다.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그녀가 응답하는 사이, 난 오피스를 둘러싸고 있는 커다랗고 투명한 창을 통해 밖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조용히 비가 오고 있었다. 순간 뜬금없이 엄마 품에 안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수 십 마리의 마우스를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하는, 어찌 보면 꽤 살벌한 (?), 미팅이었지만, 오늘 미팅이 내게는 그저 '따뜻한 비'의 기억으로 자리잡을 것 같은 느낌이다. 이 엉뚱한 순간이 난 참 좋았다. 기억에 남는다. 전화를 끊고, “Is it raining?” 하며 N이 물었다. 그제서야 비가 내리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러나 대답이 전혀 궁금하지 않은 듯 그녀의 눈은 잔뜩 쌓인 서류에 머무르며 무언가를 계속 뒤적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아까부터 내리는 비를 모를 수가 있지? 하고 생각하면서 난 영락없이 쫓기는 과학자의 현장에서 잠시 벗어나있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과학자이기 이전에 소소한 일상에 반응하고 있는, 인간인 나를 본 것이었다. 아, 이것이구나 싶었다. 문득 가슴이 따뜻해졌다.

우연찮게 오늘 집에서 들고나온 책이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였다. 얼마 전, 신형철의 추천 소설을 기회가 되는대로 읽어보려고 작정했는데, 이 책이 그 리스트 중 나에겐 두 번째 작품이었다. 어제 밤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겨우겨우 나를 다스려 중간 쯤에서 접고 잠을 청했다. 편두통에서 간신히 벗어난 참에, 괜한 객기를 부리다가 말짱 도루묵이 될 것 같아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아마 한 번에 다 읽어버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오늘 점심 시간, 나는 이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고 먹먹해진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마실 작정으로 내린 뜨거운 커피는 입도 대지 않은 채 책상 위에 차갑게 식어 있었다. 시간도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식은 커피를 죽 들이켰다. 작품해설을 쓴 신형철과 나도 똑같은 마음이었다. 뭔가를 써야 할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왠지 이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 같았다.

소설을 읽다 보면 마침내 거대한 암초와도 같은 서사를 알아채기 시작할 때가 있다. 그때의 숨막히는 느낌, 떨리는 가슴, 가쁜 호흡으로 소설 속으로 본격적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도 정말 매력적이지만 (이때는 시간이 책장 넘기는 것으로만 간다), 이 책처럼 거대 서사와는 거리가 먼, 오히려 아무런 특별함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서민의 일상을 조곤조곤 정직하고 사실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묘사하면서 인물의 내면과 외부상황을 진부하지 않고 긴장감 있게 풀어내며, 읽는 이로 하여금 충분한 공감을 불러일으켜서 거대 서사가 주지 못하는 큰 울림을 선사하는 방식도 놀라우리만큼 매혹적이었다. 보통 서사를 한바탕 읽어내고 나면, 비로소 긴장이 풀리면서 해소 단계에 접어들며, 가슴에는 커다란 주먹으로 한 방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반면, 잔잔한 묘사로 이루어진 책을 읽고 나면, 먹먹해지는 가슴으로 마지막 책장 덮기를 주저하게 되고, 급기야 아쉬운 듯 또 다시 훑어보게 된다. 이 책은 후자 스타일의 글쓰기에 있어서 정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황정은의 글은 뭔가 달랐다. 마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필체나 필력을 평가하는 것 자체가 무례하다는 기분이 들 정도다. 내 좁은 눈엔 '한 강' 작가도 보였고 '무라카미 하루키'도 보였으며 '주제 사라마구'도 보였다. 그러나 황정은 고유의 필체라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살면서 이런 작가를 만난다는 것,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특히 편두통의 그림자가 일어나 나를 떠났던 1월의 마지막 날, 이 책을 읽게 된 건 운명의 장난인 걸까.

이 책은 '은교'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여진 (그렇다고 은교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만도 없는 소설이다. 은교의 내러티브라기 보다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고 해석해야 옳을 것 같기 때문이다) 비교적 짧은 장편소설이다. 도심 한 가운데에 위치한, 40년 역사를 지닌, 오래된 전자상가의 철거가 이 소설의 시대적, 사회적 배경이다. 화자인 은교와 그녀의 애인 '무재'는 둘 다 전자상가에서 일한다. 은교는 조그만 수리실에서 접수와 심부름을 맡고 있고, 무재는 트랜스를 만드는 공방의 견습공이다. 두 사람 모두 주류 사회로 진출하기 위한 성공의 피라미드와는 거리가 먼, 어찌 보면 사회적 약자 층에 속하는, 소시민이다. 황정은 작가는 소수의 특별한 사람 (이를테면 금수저)의 눈이 아닌 은교와 무재라는, 99%의 서민들과 흙수저를 대변하는 두 평범한 소시민의 눈을 통해, 철거 상황에 처한 전자상가 안의 여러 인물들을 소개하면서 사회의 현실을 나지막하게 고발한다.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질 소중한 서민들의 일상이 곧 철거될 오래된 전자상가를 대변한다면, 공원을 만들기 위해 철거를 요구하고 실행하는 집단은 효율적인 경제와 '모두'를 위한답시고 휘두른 권력이 선두가 된 국가의 체제 (알고 보면 '모두'는 99%를 배제한 1%의 권력과 돈을 가진 자들을 의미할 것이다)를 대변한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 소설은 이 두 가지 세력의 피할 수 없는 사회적 대립을 강자가 아닌 약자의 입장에서 관찰하고 보고한 글인 셈이다. 또한 역사라는 것도 일반적으로 강자나 승자의 과거에 대한 해석임을 감안할 때, 이 책은 그 이면에 가려졌던 눈으로 기록된, 서글픈 한이 서린, 아픈 기록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코드가 담겨 있다고 난 생각한다. 이는 이 책이 나를 포함한 모든 독자의 가슴에 큰 울림을 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될 것이다.

제목에 등장한 한자에서도 알 수 있듯, '백의 그림자'에서의 백은 百, 일백 백자다 (白, 흰 백이 아니다). 즉, '백의 그림자'는 '하얀 그림자'가 아니라, '모두의 그림자'를 뜻하는 것이다. 사실 소설의 도입부에서 난 이 소설이 좀 공포스럽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었다. 은교가 비 내리는 숲 속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따라가는 장면이 이 소설의 시작인데, 이 장면에서 난 일종의 무서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림자가 일어나 스스로 움직이는 것은 혹시 '죽음'의 복선은 아닐까, 결국엔 은교가 죽는 걸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그림자가 일어나는 현상은 단순히 '죽음'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비록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는 익숙하기라도 한 듯 다 알고 있는 현상일뿐 아니라 각별히 조심스럽게 여기고 있었고, 일어난 그림자와 점점 더 자란 그림자를 따라가다가 죽음을 맞이한 경우도 있었지만,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림자가 일어나는 현상은 오히려 한 인간이 맞닥뜨린 한계를 스스로 체감하고 자포자기하고 싶은 순간, 혹은 끝내 견뎌온 삶의 마지막 끈을 놓아 버릴지 아닐지 결정해야 하는 기로, 정도로 해석하는 게 저자의 의도에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백의 그림자'라는 제목이 확 와 닿는다. 나도 절망 가운데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생은 상실과 고통의 연속이며 슬픔과 견뎌냄의 순환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책의 배경인 전자상가의 철거 상황을 놓고 볼 때, 삶의 터전을 옮겨야만 하는, 그래서 그것이 그 한 사람의 전부가 될 수도 있을 만큼 커다란 현실 앞에서 마치 당연하다는 듯 의례히 상실과 아픔을 겪어야만 하는, 사회적 약자의 눈으로 세상을 생각해 보면, '백의 그림자'에는 역시 흙수저이며 소시민인 나의 그림자도, 우리 모두의 그림자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 '을'들은, 비록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상황에 노출되었지만,

소설의 결말에서처럼 결국은 이겨내는 것이다.

소설의 결말에서 은교와 무재는 죽지 않는다. 정말 다행이다. 둘 다 그림자가 일어나는 현상을 경험했고, 그때 서로의 혼이 나간듯한 모습도 목격했다. 그러나 어쨌든 둘은 그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았고, 절망과 상실, 아픔과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삶을 선택했다. 참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난 결말을 읽고 나서야 긴장했던 몸을 풀 수 있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은 고장 난 차를 놓아두고, 혹시나 도움을 청할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해서 비탈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이었다. 난 그것을 아주 용기 있는 결단이었고, 희망을 상징한다고까지 해석하고 싶다. 어두워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죽음이 아닌 삶을, 절망이 아닌 희망을 선택하고, 용기를 내어 전진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그림자도 (우리를 따라오게 만드는 게 아니라) 우리를 따라올 수밖에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린 약자들이 자신의 그림자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적으로 뭔가 잘못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은교와 무재로 대표되는 우리 '을'들은, 비록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상황에 노출되었지만, 소설의 결말에서처럼 결국은 이겨내는 것이다. 작가가 책의 마지막에서 직접 말하듯, 나 역시 은교와 무재가 어두운 섬에 하루 동안 갇힌 꼴이 되었지만, 두 사람 모두 누군가 만나기를 소망한다. 건강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나 역시 내 그림자가 일어나는 상황이 주어졌을 때 (이런 상황 자체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그림자를 따라가지 말라는 무속과도 같은 가르침을 준수하고 말 것이 아니라, 그림자를 따라오게 만드는 결단과 행동을 할 수 있길 바래본다. 무재에게 은교가, 은교에게 무재가 있었듯, 그 어둠 속에서도 반드시 함께 할 동지와 손을 붙잡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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