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인이 가야 할 길
그리스도교인이 가야 할 길
  • 정한욱
  • 승인 2019.02.04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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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현, 종교신학 강의 다종교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인이 가야 할 길, 비아, 2017년
정재현, 종교신학 강의 다종교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인이 가야 할 길, 비아, 2017년
정재현, 종교신학 강의 다종교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인이 가야 할 길, 비아, 2017년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종교철학을 가르치는 저자는 서로 다른 종교들 사이의 관계야말로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가 씨름해야 할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며, 『종교신학 강의』는 여러 종교가 한데 얽혀 온갖 갈등과 충돌을 보이는 세상에서 근본적인 문제와 처방을 고민하고 모색하려는 시도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먼저 ‘다종교 상황’을 정직하게 분석하고, 이를 기초로 다종교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함께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한 후 개인적인 단상을 덧붙이도록 한다.

 

종교 간 관계분석을 위한 틀   

종교신학은 여러 종교가 공존하는 다종교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의 자기관계성과 타자관계성을 어떻게 엮을 것인가 하는 시대적 과제를 시행하는 신학의 한 분야다. 이러한 종교신학의 뼈대인 ‘종교 간 관계’의 기본 방식은 배타주의(복음주의) - 포괄주의 - 다원주의로 나뉠 수 있다. 배타주의는 하나를 붙잡는 것이고, 다원주의는 여럿을 살피는 것이며, 포괄주의는 여럿을 살피되 하나로 수렴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배타주의는 객관적이고 자존적인 ‘있음으로서의 신’에 초점을 맞추기에(실체주의, substantialism), 관계는 항상 부수적으로 취급된다. 또한 운명론적인 고중세의 역사 비관주의에서 악은 신의 결여 내지는 파괴이기에 무수한 다름들은 악으로 표상된다. ‘복음주의’라고도 불리는 이러한 배타주의의 핵심 주장은 ‘그리스도의 유일성’이다. 

포괄주의에서는 인간이 앎과 믿음의 주제로 등장하면서 ‘주-객 관계’와 ‘주관주의’가 등장한다. 근대의 역사 낙관주의는 악을 선의 완성을 향해 가는 상태나 단계로 보았으며, 악으로 표상되는 다름은 선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포함되는 것으로 표상된다. 이러한 ‘자아론적 선험주의’의 핵심 주장은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이다.

다원주의는 악과 선, 진리와 거짓이 혼재되어 있어 어느 한편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줄 수 없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지배적 태도로, 주체의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는 ‘타자’가 너로 다가와 나와 만나는 '상호주의' 혹은 ‘아여동격적 대화주의’(mutual dialogicalism)를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다원주의의 핵심 주장은 ‘신의 절대성’이다.배타주의(exclusivism)  

그리스도교는 기원후 4세기부터 15세기까지 유럽 전역을 장악한 지배종교였으며, 자신을 가리키기 위해 구태여 ‘종교’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근대에 접어들어 그리스도를 유일한 종교로 여기던 자들이 다른 문화와 종교를 만나게 되었으며, 이 만남에 대한 첫 번째 반응은 상대방을 적대하는 것이었다. 16~17세기까지 그리스도교의 주된 태도였던 배타주의(exclusivism)는 ‘다른’ 것은 ‘틀린’ 것이고, 옳고 그름의 기준은 ‘나와 같은가’이며, ‘옳은’ 종교인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것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복음주의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는『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세주인 것은 복음의 세계선포를 위한 본질적 기반과 증거다”라고 주장하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바탕으로 한 구속사역의 독특성을 강조하면서 나자렛 예수라는 역사적 특수성을 바로 인류를 위한 구세주라는 초역사적 보편성으로 연결하는 배타주의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입장은 필연적으로 관계를 배제한 채 차이를 내세우는 ‘무관계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입장은 자기의 특수성은 마땅히 보편성으로 나아가지만 타자의 특수성은 보편성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폭력적 논리일 수 있으며,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와 하느님의 구원을 엮는 것이 과연 ‘당연히 옳은 일인지’에 대한 질문을 유발한다. 또한 이 입장은 포괄주의나 다원주의 역시 복음에 대한 이해를 달리할 뿐 복음을 부정하는 입장이 아닐 수 있다는 것과, 세상에 누룩처럼 스며들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복음에 ‘주의’라는 테두리를 씌우고 이름붙이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에 대한 해명을 필요로 한다.

 

포괄주의(inclusivism)   

‘다름’과의 만남이 빈번해지고 ‘사회’와 ‘역사’의 세기를 통과하면서 ‘다름’이 꼭 ‘틀림’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18~19세기 근대 후기의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교를 기준으로 ‘다름’을 평가하여 서열을 메기는 포괄주의(inclusivism)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에 따르면 다른 종교들은 틀린 종교가 아닌 그리스도교보다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는 종교이기에, 배제가 아닌 포섭과 선교를 통해 그리스도교와 같은 높은 단계로 끌어올려야 할 대상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포괄주의는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은총이 익명으로나마 이미 깔려있다는 보편성에서 시작하여 구체적인 이름을 붙여 주는 특수성으로 가는 구조를 지닌다.

(1) 슈바이처는 ‘그리스도의 유일성’이 아닌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종교사적인 연구를 통해서는 그리스도교의 독창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지만 윤리-행위-실천적인 차원에서 우월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 에른스트 트뢸치는 ‘그리스도교가’ 아닌 ‘하나님’만이 절대적이고 이 땅에서의 신적인 삶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지만, 여러 종교 중 ‘최고의 타당성’을 가진 그리스도교는 다양한 종교들을 끌고 올라가는 사랑을 통해 통일성을 지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3) 칼 라너는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인 하느님의 은총은 그리스도교에 한정되지 않으며 다른 종교인들도 가시적인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을 받아들이기 전에 구원의 은총을 소유할 수 있지만, 이러한 은총의 익명성은 선교를 통해 가시적인 그리스도교에 소속됨으로서 입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입장은 다름을 배제하는 배타주의적 태도가 야기할 수밖에 없는 갈등과 충돌의 문제를 상당히 해소할 수 있는 주장임에 분명하지만, 타자를 자기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서 결국 나와 다른 타자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이자 타자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더욱 음습하고 교묘한 배타주의의 다른 형태일 수 있다는 의심을 받는다. 그러나 포괄주의는 특히 가톨릭 내에서 칼 라너의 영향으로 제2 바티칸 공의회 이후 한 시대를 풍미했고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다원주의(pluralism)

현대는 중세의 종교나 근대의 과학처럼 대다수 사람이 맹목적으로 지지하던 절대 진리의 기준이 사라지고 개인이 모든 것을 판단하고 선택해야 하는 시대이며, 현대의 ‘현실주의’는 선과 악의 공존 혹은 혼재를 말할뿐 아니라 한 개인 안에도 같음과 다름이 뒤섞여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시대에 등장한 다원주의(pluralism)역시 그리스도교 역시 ‘여러 종교 중 하나’, ‘하나의 종교’가 된 상황에서 하나의 종교가 다른 종교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다루며, 주체의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는 ‘타자’가 너로 다가와 나와 만나는 ‘아여동격적 대화주의’를 주요 태도로 가진다.

폴 니터는 우리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하느님을 특수한 형식 속에서만 실제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리스도의 전체성이 나사렛 예수에게만 국한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중심주의’와 ‘그리스도 중심주의’를 넘어 ‘신 중심주의’에 이르러야 하며,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성’에 대한 강조는 구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독특성과 종교의 절대성에 대한 주장을 부수고 ‘그리스도 밖/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사고에서 그리스도교인을 해방한다고 강조한다.

레너드 스위들러는 다른 종교인과의 만남이나 대화는 그 행위의 상대가 되는 타자와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 구성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전통과 문화를 지닌 종교인들은 인간의 공통 본성을 토대로 만나 대화함으로서 같은 것을 나누고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러한 과정을 수행함으로서 자신이 속한 종교 전통 안에서 신앙의 성숙과 발달을 기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서구 다원주의는 종교 간의 관계에 대해 괄목할 만한 전환을 이루었지만 동일성으로의 귀소본능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으며, 우아한 방식으로 통일적 다원주의를 말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자기만을 전체로 착각하는 오류에서 벗어나 자기가 부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자기라는 인간을 이루는 부분을 다룬 부분들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인간은 관계의 산물이며 인간의 삶 또한 관계로 엮여 있기에 자기란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무수한 타자들이 들락거리는 계속 움직이고 변화하는 ‘사건’이다.

 

‘자기동일성’에서 ‘구성적 상대성’으로

이러한 세 태도를 관통하는 근본 전제는 특정 이름을 갖는 종교들이 서로 확연하게 구별될 뿐 아니라 분리된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즉 하나의 이름이 하나의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한 이름의 종교뿐 아니라 한 이름의 종교인도 하나의 자기동일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레이문도 파니카에 따르면 자기동일성은 불변하는 실체를 그 내용으로 하는 ‘개체성’이 아니라 타자와의 상호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구성적 상대성’이며, 이러한 ‘구성적 상대성’과 이를 기반으로 하는 ‘다종교적 체험’이야말로 우리의 종교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방법이다.

파니카는 종교 간 관계 논의의 초점을 ‘종교’에서 ‘인간’으로 바꾸어 “인간의 종교적 뿌리”를 해부하고 조망한다. 우리는 타자를 만나기 전에 우선 자기를 구성하고 있는 성분, 구성적 상대성이 엮어내는 성분부터 분석해야 하며, ‘구성적 상대성’에 기반한 ‘다종교적 체험’은 신앙하는 나로 하여금 비현실적으로 주장되는 ‘신앙의 순수성’을 깨고 상대적으로 구성되어 온 자기 자신의 자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살아갈’ 수 있을 뿐인 신앙은 다종교적 체험으로 인하여 앎으로 깔끔하게 정리될 수 없을 만큼 모호하고 혼란스럽지만 이를 견뎌낼 수 있는 성숙을 요구하고 또 가능케 한다.

파니카의 종교간 만남을 위한 규칙 중 가장 주목할 만한 항목은 "우리는 개종이라는 도전에도 직면해야 한다"는 규칙이다. 개종 불가라는 틀에 묶인 채 기계적으로 자신이 소속된 종교에 투신하는 것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믿음’을 믿는 것일 수 있다. 의심과 회의가 신앙을 살아 움직이고 성숙하게 하는 것과 같이 개종 가능성은 믿음을 새롭게 선택하고 결단하게 한다. 이때 ‘개종(改宗)’이란 이전 것을 송두리째 갈아엎고 새로운 판을 짜는 자기동일적 정체성의 단순한 전환이 아니라, 언제나 기존의 신앙에 다른 것이 덧붙여지고 뒤섞이는 ‘가종(加宗)’의 방식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결론 

이러한 파니카의 주장은 “자기동일성에서 구성적 상대성으로의 전환” 또는 “벌거벗은 순수한 신앙에서 다종교적 체험에 의한 역동적인 신앙으로의 전환”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는 교리들의 비교를 중심으로 공통성을 추려내려는 통일적 다원주의를 거부하며, 구성적 상대성이 드러내주는 다종교적 체험에 뿌리를 둔 신앙의 역동성을 강조한다. 종교는 절대라는 이름으로 변함없이 같은 자리에 머무르는 우상일 수 없으며, 우상의 파괴는 우연, 실존, 상황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끊임없이 수행해 나가야 할 과제다. 종교 간 대화로 표현되는 다름과의 만남은 결국 우상 파괴를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대는 자기만 옳고 타자는 틀렸다고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자기가 같음으로만 이루어져 있고 타자는 다름으로만 똘똘 뭉쳐 있지 않음이 만천하에 드러난 시대다. 그러나 모든 ‘다름’이 다 ‘그름’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다름’이 다 ‘옳음’인 것도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우리 안에 있는 ‘다름’과 ‘그름’을 살핀 후 해야 할 일은, 우리 안에 있는 ‘다름’을 만나고 ‘그름’을 봄으로서 우리를 고쳐나가는 것이다. 다름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름을 고치면서 서로를 올곧게 벼려내는 기쁨을 얻는 것이야말로, 바로 다종교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야 할 참된 믿음의 길이다.

 

개인적 단상

1. 저자는 우리의 종교적 정체성이 형성되는 방식 자체가 ‘구성적 상대성’에 따른 ‘다종교적 체험’의 결과이기에, 어떠한 불순물도 섞이지 않는 ‘순수 복음’이란 애초부터 존재한 적도, 존재할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때 논란이 됐던 『목사의 딸』 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저자인 박애란 목사는 그 책에서 아버지인 한국 보수신학의 거두 박윤선 목사의 신앙이 남존여비와 충효사상, 그리고 군사부일체라는 유교의 가르침에 복음의 메시지를 혼합시킨 “유교적 칼빈주의”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내가 발견한 것은 그 후 이 책과 관련된 논란에 참여한 ‘보수 정통’ 신앙을 가졌다는 대부분의 목사들이 상처받은 한 '영혼'을 이해하고 보듬고 위로하려는 '선한 목자'라기보다, 君師父一體의 충정으로 '스승'을 지키려는 '유교적 칼빈주의'의 儒生들이더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각처에 암약하던 그렇게도 많은 ‘칼빈주의 유생’들의 존재야말로 우리의 종교적 정체성이 ‘구성적 상대성’에 따른 ‘다종교적 체험’의 결과라는 저자의 말을 극적으로 입증해주는 사례였다고 생각한다.

2. . 이 책을 읽으며 떠오른 두 번째 책은 김영민 선생의 『공부론』이다. 선생은 이 책에서 “참된 공부란 학같이 긴 다리로 물가를 노닐면서 물고기만 쪼아 먹는 영리한 사람의 것이라기보다는 물속에 몸을 너무 깊이 잠근 나머지 혹간 몸에 지느러미가 돋고 아기미가 생기기도 하는 현명한 인간의 몫이며 ..... 익사의 공포를 뚫고 범람하는 타자의 강물 속으로 몸을 던지며 피안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야말로 “개종 가능성”까지도 언급한 레이문도 파니카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생각이 아닐가? 

우리의 믿음은 인간의 사고와 경험을 무한히 초월하는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인가? 아니면 ‘정통’이라고 알려진 종교적 전통과 도그마를 믿는 우리 자신의 믿음을 믿는 믿음인가? 우리는 과연 주인에게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고 가끔씩 파내서 그 아름다움을 상찬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종인가? 아니면 손해의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장사하러 나가는 종인가? 만약 그 비유에서 장사하다 빈털터리가 된 종이 있었다면 어떤 처분을 받았을까? 나는 그 종이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종보다 덜 가혹한 대접을 받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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