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웅의책과일상]잊혀짐
[김영웅의책과일상]잊혀짐
  • 김영웅
  • 승인 2019.02.12 13: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크리스토프 바타유, '다다를 수 없는 나라' (원제: ANNAM)
크리스토프 바타유, '다다를 수 없는 나라'

신형철은 평론가다. 글쓰기를 집 짓기에 비유하는 그의 글은 정확하고 예리한 칼이 되어 읽는 이의 머리와 가슴 깊숙한 곳까지 찔러 진지하게 생각하고 깊이 공감하게 한다. 하지만 그의 좋은 글이 내게는 쉽게 읽히지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어려웠다. 독서량이 부족해서도, 독서 편식을 해서도, 또 분석적인 글읽기를 못해서도 아니었다. 매주 서점에 들를 때마다 신형철의 책을 집어 들고 한두 페이지를 정독해온 지도 벌써 여러 주다. 여전히 난 적응을 못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지 궁금했다. 그의 신간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끝에 보면, 그가 추천한 도서 목록이 나온다. 그가 직접 쓴 글 말고 그가 추천해 마지않는 글을 읽어보면, 내 문제를 푸는 어떤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작가가 아끼는 책이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기 마련이고, 그것들을 따라가다보면 신형철 글쓰기의 여러 프로토타입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난 주 중고서점에 들려 추천 리스트에 있는 모든 책을 검색했다. 운 좋게 두 권이 있었다. 이 책, 크리스토프 바타유의 '다다를 수 없는 나라'는 그 두 권 중 하나다.

일견에도 아주 짧은 소설이다. 전체 분량도 짧지만, 한 챕터의 길이는 물론 한 단락의 길이도 짧다. 무엇보다 저자가 사용하는 문장이 아주 짧다. 그래서 다른 책에 비해 여백이 많다. 그러나 이 책은 시가 아닌 소설이다. 단문으로 이루어진 단편소설. 과연 이런 제한된 형식 안에 무엇을 담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출판되어 수많은 찬사와 함께 상까지 받았다 하고, 수 천 권도 넘게 읽었을 신형철에게 선택 받은 소수의 추천 리스트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고 있었기에, 이 책은 분명 독특하고 고유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증거를 찾는 탐정이 된 기분으로 난 이 책을 읽었다.

소설은 '칸'이라는 이름을 가진, 일곱 살 나이의 베트남 황제가 프랑스 왕을 직접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농민 봉기로 말미암아 폐왕이 된 황제가 왕위를 되찾고 왕국을 구하기 위해 급히 아들을 프랑스로 보내어 원조를 요청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린 황제가 프랑스에 도착한 건 이미 9개월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배를 타고 험난한 길을 왔기에 사실 살아있다는 것만해도 운이 좋았던 셈이었다. 시기도 좋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 왕은 루이 16세, 때는 1787년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루이 16세는 물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까지 곧 처형될 운명에 놓였던, 즉 프랑스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루이 16세는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도 모르는 베트남을 도울 수가 없었다. 자국의 문제만으로도 버거웠던 것이다. 원조 요청이 거부되었지만 어린 베트남 황제는 그 상황의 진정한 핵심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폐렴으로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어린 황제가 죽기 전 늙은 주교와 우연찮은 만남이 있었다. 비록 그는 그 만남의 의미를 모른 채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 만남은 이 책의 본격적인 이야기의 발단이 되었다. 왕의 권한이 아닌 그 주교의 권한으로 베트남에 선교사들을 소수의 군인들과 함께 두 배에 태워 파송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도미니크 수사를 비롯한 작은 무리의 수도사들과 다섯 명의 수녀들이 선교사 명단에 포함되어있었다.

베트남에 다다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병으로 죽었다. 베트남에 간신히 도착하고 나서도 여러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죽음을 맞이한다. 프랑스에서도 마침내 대혁명이 일어났고 수도원도 혁명의 여파를 피할 수 없었다. 파송기록은 불타버렸다. 베트남에서 살아남은 자들조차 조국으로부터 그들의 존재 자체가 잊혀지게 되었던 것이다. 베트남에선 폐왕이 되었던 황제가 왕위를 되찾게 된다. 아들을 보냈음에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던, 그리고 아들을 죽게 놔두었던 프랑스에게 분을 품은 황제는 자기 나라에 선교사들이 들어와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곤 모조리 죽여버린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도미니크 수사와 카트린 수녀, 단 두 명이었다. 그들은 다른 지역으로 복음을 전하러 옮겼기에 운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야기는 벌써 결말에 이른다. 도미니크 수사와 카트린 수녀. 저자는 이 두 사람으로부터 수사와 수녀의 타이틀을 제거하는 작업을 한다. 대신 남자와 여자, 그리고 성직자가 아닌 인간이란 타이틀을 그들에게 상기시킨다. 그들은 미개한 나라에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목숨까지 걸고 머나먼 땅까지 온 선교사였다. 생명의 위협이 있었던 여러 상황을 거쳐오면서 그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선 복음을 전하려는 의지와 사명감은 약해져갔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의지와 함께 잊어왔거나 아님 애써 무시해왔던 인간성은 뒤늦게 발아하기 시작했다. 생명처럼 아꼈던 성서와 교리문답으로 보내는 시간은 하나의 거추장스런 옷처럼 여겨졌고, 그들에게 현재 주어진 베트남이라는 이방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낙을 느끼고 누리기 시작했다. 수사와 수녀의 복장은 버린 지 이미 오래였다. 베트남 사람들이 입는 옷을 입었고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선 그것마저도 번거로웠다. 비가 끊이지 않고 내리는 우기 한 가운데의 어느 날, 진흙이 흘러내리고 곧 무너질 수도 있는 움막 집에서 둘은 그동안 금기라고 여겼던 남녀 간의 사랑을 나누게 된다.

이 책은 프랑스 사람들이 그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머나먼 베트남이란 나라에서 그들이 잊혀져가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처음에는 베트남이 다다를 수 없는 나라였지만, 끝내 잊혀진 존재가 되었던 프랑스 선교사들에게는 오히려 자신들의 조국 프랑스가 다다를 수 없는 나라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이 책은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도미니크 수사와 카트린 수녀를 통해, 다다를 수 없는 나라에서 결국엔 죽어간 선교사들이 성직자 이전에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기독교인인 나의 눈엔 신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따져보고 싶은 부분이 충분히 있을법한 내용이지만, 아름다운 소설은 아름다운 소설로 놔두기로 하는 게 예의가 아닌가 싶다. 참고로 저자가 이 책을 썼을 땐 스물 한 살의 나이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은 그의 처녀작이다.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짧은 문장들로, 마치 무관심하고 냉정한 인상까지 풍기는 듯한 필체로, 이 모든 서사와 묘사를 다룬다. 이 책 전반에 걸쳐 느낄 수 있는 묘한 감동도 이 때문일 것이다. 커다란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다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루는 이 책에는 저자의 단문으로 된 필체가 오히려 아주 효과적이고 의외로 완벽한 궁합을 보여준다고 느꼈다. 짧다는 건 빈 공간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짧은 문장들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문장이 될 수밖에 없다. 글쓰기를 집 짓기에 비유하는 신형철이 이 책을 추천한 이유를 알 것만 같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 책을 평가했다. 이젠 나 역시 충분히 공감한다.

“이 소설의 번역자인 김화영 선생의 말씀. ‘책을 다 읽고, 그 후 몇 번이나 다시 읽고, 그리고 번역을 하고 마침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그 짧은 문장들 사이에서 배어나오는 기이한 적요함, 거의 희열에 가까울 만큼 해맑은 슬픔의 위력으로부터 완전히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이 소설은 읽은 지 십 년이 됐지만 나 역시 아직도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내 눈으로 읽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소설이다.”

이 책의 저자 크리스토프 바타유는 신형철이 그의 책에서 말했듯 ‘건축에 적합한 자재를 찾듯이, 문장은 쓰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라는 말을 충실하게 충족시키는 글쓰기를 해보인 것이었다. 짧지만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는 문장, 좋은 글을 쓰기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소중한 것을 배웠다. 단문의 미학을 느껴보고 싶다면, 난 이 책을 서슴없이 추천한다. 나도 여러 번 이 소설을 더 뒤적일 것 같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