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인간은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 Huuka Kim
  • 승인 2019.01.19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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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찌무라 간조, 구안록 참 평안을 얻기까지, 포이에마, 2016년
우찌무라 간조, 구안록 참 평안을 얻기까지, 포이에마, 2016년
우찌무라 간조, 구안록 참 평안을 얻기까지, 포이에마, 2016년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이자 사회 사상가의 한 사람인 우치무라 간조. 그는 메이지유신 100주년을 맞아 ‘일본 근대화의 발전에 기여한 20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우리나라의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최태용 등은 그의 무교회주의에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그의 대표저서 중 하나인 참 평안을 얻기까지라는 부제목을 가진 <구안록>은 일본판 “천로역정”으로 참 평안을 찾아가는 필생의 여행기를 읽는 것 같다.

인간은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마도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내 안의 욕망은 죄의 열매를 맺는다. 죄를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죄가 주는 고통의 멍에는 결코 벗어나기 쉬운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안다. 죄로부터의 자유. 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해결된다는 기독교적 명제는 비단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죄에 대한 처절한 몸부림이 없는 자에게는 결코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올 수 없는 명제라는 것을 우리는 삶으로 깨닫는다.

솔직한 고백이지만 나는 우치무라 간조처럼 죄에서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해 본적이 없다. 언제였을까?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이었을까? 무엇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엄마가 하시는 제과점에서 빵 값을 슬쩍한 적이 있다. 그 죄책감은 나를 몇일 밤 악몽으로 몰고 갔고 내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께는 차마 말을 못해서 처음으로 성당을 찾아가 신부님을 붙들고 그들의 고해성사라는 것을 했던 것 같다. 그래도 고통스러웠다. 다시 집 앞에 있는 성결교회를 찾았고 얼마나 울면서 기도했던지 그 교회 목사님께서 대신 돈을 갚아 줄까? 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괴로워했다. 간조에 비하면 참으로 유치할 수 밖에 없는 죄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러니 죄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은 사역자가 되어서도 해 본적이 없다는 것. 어쩌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치무라 간조가 참 평안을 찾기 위해 어떻게 걸어갔는지, 그의 내면이 어떻게 변화되어 갔는지 그 여정의 과정을 알고자 한다면 <구안록>의 목차에 따라 그와 함께 걸어 가보면 된다. 먼저 그는 인생의 욕정에 대한 '비탄'에 잠긴다. 그 후에 예수님을 만나 진리와 선을 깨닫게 되고 죄와 악에서 멀어지고자 한다. 그러나 '마음의 분리'가 일어나 그의 선한 의도와는 다르게 죄의 본성이 그를 괴롭힌다. 그는 죄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 가지 '속죄'의 방법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부흥회' '학문' '자연'을 '연구'하면서 우주의 질서와 법칙에 자신을 동화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그것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이번에는 '자선사업'을 통해서 자신의 품성을 단련시킴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얻고자 하지만, 선한 행위와 선한 마음의 순서가 바뀐 것은 위선임을 알고 괴로워한다. 이제는 최후의 수단으로 '신학연구'를 해서 진리와 구원을 얻고자 '신학교'에 입학한다. 처음에는 신학을 통해 마음이 유쾌해졌지만, 배움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성령을 모독하는 죄에 가까워지는 위협감을 느낀다.

우리는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여기에서 간조의 속죄이론을 알 수 있다. 죄는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는 것, 속죄'에는 반드시 대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완전무결하신 예수님이 대신 죄를 지고 죽으심으로써 그 속죄력에 의지해 우리가 죄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구원과 평안을 얻은 자에게 남은 '최종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는 아직 불완전하며 성화의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기도하는 길 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우치무라 간조의 <구안록>은 죄의 무감(無感)한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런 구도자를 찾아볼 길이 있을까? 과거에 지은 죄. 지금 짓는 죄. 미래에 지을 죄까지 십자가의 피가 해결했다는 값싼 은혜는 더더욱 죄에 무감각한 그리스도인들을 양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죄에 대한 치열한 전쟁이 필요하다. 몸부림이 필요하다. 나로부터 말이다.

  “죄를 죄라고 여기지 않았을 때는 죄를 지어도 크게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죄가 나쁘다는 것, 무서운 것임을 알고 죄의 죄 됨을 안 후에는 죄를 범하면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 이렇듯 죄의 특성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면서도 정작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피할 아무런 힘도 주지 않는 것이다.” - p. 23

“세상에 자기 죄를 깨달은 기독교 신자처럼 곤궁한 자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죄에 대해 무감한 기독교 신자처럼 강한 자도 없을 것이다. 전자는 전전긍긍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후자는 대담무쌍하여 무엇이든 다 한다. ..... 나는 죄를 범하는 죄인이자 동시에 죄를 범하도록 강요당하는 자다. 나는 하나님과 다투는 자이자 동시에 하나님과 다투지 않을 수 없는 자다.” - p. 26

“그러나 신학생들이 주장하는 정결함과 덕에 비해 그들의 사상이 비루하고 품성이 고결하지 못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 p. 69

“사람의 의지를 움직이는 것은 무미건조하고 차가운 학문적 이론이 아니라 신선하고 온화한 감정이다. 강단에서의 교훈이 아니라 애정에서 우러나오는 감화다.” - p. 89

“기독교가 말하는 신앙은 지적 승인이 아니라 심령의 승이다. 심령은 도덕적 선악은 판별하지만 사실의 진위를 감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영혼을 구원하는 신앙은 도덕적이지 지식적이 아니다.” - p. 118

“신앙의 기초는 진실이다. 진실 없이는 신앙도 없다. 신앙의 반대는 거짓이요 허망이요 무정이요 불친절이요 허식이요 빈 소리요 불충이요 불효요 불의요 권모요 술수다 신앙에도 반도덕적 의미가 꼬리표처럼 따라붙게 된 것은 사람의 마음이 경박해짐에 따라 정직이 미련한 것으로 무시당하고 학문이 세속에 아첨하는 도구가 되면서부터다.” - p. 122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연결될 때 가능하다. 그러므로 복음적 기독교가 확신하고 또 어떤 이유에도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은 구원에 절대 필요조건이며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없고 또 하나님에게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 신앙이야말로 기독교의 기초다.” - p. 132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최고의 목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를 깊이 생각하고 그를 깊이 배우면 배울수록 그만큼 그리스도를 더 닮게 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내게는 그리스도와 같이 될 수 없는 결정적 원인이 있다. 그 어떤 감화력으로도 제거할 수 없는 죄가 내 안에 박혀 있다. 먼저 이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없다.” - pp. 171~172

“나는 평안을 얻는 길을 알았다. 그러나 길을 안다고 반드시 그 길에 들어선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나를 죄에서 구원한다. 그러나 신앙 또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 p.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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