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웅의책과일상] 정확하고 아름다운 필체로 순수함을 담아낼 때.
[김영웅의책과일상] 정확하고 아름다운 필체로 순수함을 담아낼 때.
  • 김영웅
  • 승인 2019.01.12 12: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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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뮐러, 독일인의 사랑
막스 뮐러, 독일인의 사랑, 문예출판사

지난 주말도 가족과 함께 중고 서점에 들려 많은 책들에 둘러싸인 채 한 시간 정도 책을 읽었다. 이런 생활도 벌써 수 개월째 지속하고 있으니, 어느덧 우리 가족의 일상으로 자리를 잡은 셈이다. 난 일상에 흩어진 행복의 조각을 찾는 듯한 심정으로 매주 이 시간을 기다린다. 늘 여러 책을 뒤적거리지만, 서점에 들어서서 항상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새로 들어온 책 코너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다. 매주마다 새로운 책이 눈에 띄는데, 저번 주는 아주 오래된 고전 하나가 내 관심을 끌었다.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 중학생 시절, 어머니 덕에 문학을 알게 되어 한동안 고전문학에 빠져있을 무렵 접했던 책 중 하나였다. 아주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한 기분으로 이 책을 손에 잡은 순간 내 마음은 금새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때의 감수성이 단박에 되살아나는 기분을 느꼈다.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기억은 주인공 여자가 아주 쇠약해서 결국엔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 뿐이었다. 얼굴에 여드름이 나던 시절, 사랑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애송이였던 내게 이 책이 남긴 흔적인 것이다. 하지만 약 25년이 지난 지금, 한 여자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했던 한 중년 남성으로서, 곧 사춘기가 시작될 아들을 키우고 있는 마흔이 넘은 한 아버지로서, 그리고 세상살이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나름대로의 높고 낮은 곳을 경험해본 한 인간으로서 난 이 책을 다시 읽어냈다. 줄거리 위주로 소설을 읽어내던 어린 시절을 지나 어느새 어른이 되어버린 난 소설을 읽을 때면 작가의 필체를 통해 작가의 내면을 느껴보려 노력한다. 줄거리야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또 잊어버릴 테지만, 필체에 흐르는 작가의 마음을 공감한다면 그 작가의 혼을 조금이라도 흡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여덟 꼭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두 과거에 대한 회상이다. 아주 어릴 적 유년시절부터 성인이 된 이후까지 시간 순으로 구성된 일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이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이야기의 진행과정에서 반전 하나 일어나지 않는다.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남자가 소년일 때부터 사랑해온,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는 부잣집 소녀가 있다. 성인이 되고 타지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그녀를 자신의 자아처럼 여길 정도로 그는 그녀를 늘 마음 속에 담아두었다. 어느 날, 고향으로 돌아와 그녀와 재회를 하게 된다. 둘은 떨어져 지낸 시간이 무색할 만큼 서로를 인지했고, 사랑을 확인한다. 그러나 여느 소설이나 드라마 속에 나오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이미 심장병을 앓고 있다는 설정이 되어 있었고 늘 침대에 머물렀기 때문에 그녀의 죽음은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주인공 남자의 사랑을 끝내 받아들이지만, 그 순간이 둘 사이의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줄거리만 보자면 형편없는 소설이라 치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이 한국인의 사랑을 받은 고전문학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던 이유는 결코 단순한 줄거리에 있지 않을 것이다. 마흔이 넘어 글 읽고 쓰는 일에 관심이 많아진 내 눈에는 보였다. 그것은 작가의 필체에 있었다. 어쩜 이리도 적재적소에 필요한 단어와 문장으로 한 단락 한 단락을 써냈을까 싶을 정도로 작가의 필체는 정확했고 또 아름다웠다.

신형철이 그의 신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나도 글짓기는 집 짓기와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가 언급한 글짓기의 준칙 중 두 번째, "정확한 문장을 찾을 것"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책이 바로 이 책,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이라 생각한다. 신형철의 '건축에 적합한 자재를 찾듯이, 문장은 쓰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라는 말, '특정한 인식을 가감 없이 실어 나르는 단 하나의 문장이 있다'는 말, 그리고 '그런 문장은 한번 쓰이면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다'는 말을 이 책은 모두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독일인의 사랑'이 말하고자 했던 사랑은 소유하지 않고,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줄수록 풍성해지고 맑아지는 사랑일 것이다. 자신의 죽어감을 언제나 자각하고 있기에 주인공 남자의 사랑 고백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녀의 마음이 내게 전달되었을 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운명을 받아들이듯 사랑을 받아주고 인정해달라는 남자의 순수한 마음이 전달되었을 때도, 결국 그 마음을 받아들이고 서로 하나가 되었던 그 짧은 순간에 흘렀던 풍부한 감수성이 전달되었을 때도, 비록 결말을 충분히 예측한 이야기 전개였음에도 불구하고, 난 어린아이처럼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헤르만 헤세의 '게르트루트'가 떠올랐고,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의 여러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모두 남녀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지만, 그 장면들이 이리도 강렬히 기억에 남는 이유는 아마도 그 사랑의 순수함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결국 저자의 유려한 필체도 진정성 어린 순수함을 담아낼수 있었기에 비로소 독자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것이다.

공감을 자아내면서도 진정성 있고, 순수함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정확한 집을 짓듯 적당한 단어와 문장으로 쓰여진 책. 살면서 이런 책을 만나게 되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나도 언젠간 이렇게 누군가에게 행운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글을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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