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환] 주가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이택환] 주가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 이택환
  • 승인 2018.12.11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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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목사의 설교 - 말 2:17-3:5

유대인이 사용하는 히브리 성경과 우리 기독교인의 구약성경은 순서가 좀 다릅니다. 창세기로 시작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성경은 맨 끝이 역대기입니다. 역대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다가,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해방 조서를 내리는 것으로 끝납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신약 성경이 없기에, 그들에게는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 아직까지 메시아가 오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 구약성경은 창세기에서 시작해서 말라기로 끝납니다. 그 다음에 곧바로 신약성경 마태복음이 이어지지요. 마태복음은 시작부터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소개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성경에서 말라기의 위치는 어디일까요? 메시아라는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입니다. 흔히 해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고 하죠? 그런데 그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해 뜨기 직전은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상태가 아니라, 멀리서 동터오는 여명으로 인해, 뭔가 보일락 말락 할 때입니다. 그보다는 해 뜨기 직전이 가장 춥다고 하지요. 마찬가지로 말라기 시대는 구약에서 가장 추운 때였지만, 동시에 곧 떠오를 태양이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여명으로 가장 희망적인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으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추운 때가 바벨론 포로기일 것 같습니다. 그 때는 나라도 없고, 성전도 없었지요. 하지만 말라기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에 돌아와, 나라도 되찾고 성전도 건축했습니다. 무엇보다 자유가 있었기에 여러모로 포로시절보다는 행복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과거 자유가 억압받던 70년대 유신 시대가 힘들까요? 아니면 그 때보다 소득도 높고 자유도 많은 요즘이 더 힘들까요? 객관적으로야 유신시대가 힘들겠지만, 꼭 그렇진 않습니다. 적어도 그 때는 헬조선이라는 말은 없었지요. 마찬가지로 IMF 때보다 요즘이 어렵다고들 하는데, 전혀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말라기 시대는 매우 암담한 시대였습니다.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페르시아 총독에게 계속 세금을 내야 했고(1:8), 오랜 가뭄과 병충해까지 겹쳐, 백성들의 삶이 고통스러웠습니다(3:11). 포로생활을 할 때에는 에스겔의 메시지와 이사야의 설교를 통해, 세상의 중심이 될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과, 이방의 빛이 될 이스라엘이 땅 끝까지 하나님의 구원을 전할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포로에서 해방되었다고는 하나, 에스겔과 이사야가 외쳤던 비전은 전혀 실현되지 않았고, 여전히 이스라엘은 포로와 다를 바 없는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백성들은 더욱 실망과 낙담, 냉소와 불신에 빠졌습니다.

소망이 사라지면 한 시도 견디기 어려운 게 인간입니다.

그렇습니다. 소망이 있으면 인내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힘든 일도 참고 견뎌낼 수 있지요. 그러나 소망이 사라지면 한 시도 견디기 어려운 게 인간입니다. 29:18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했는데, 묵시는 하나님의 비전, , 소망입니다. 사람들이 방자히 행한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벌거벗고 다닌다, 곧 타락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소망 없는 백성이 타락해서 망한다는 것인데, 바로 말라기 시대가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나타나는 특징 두 가지가 종교의 타락과 정의의 실종입니다. 2:17절이 이 두 가지 모습을 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2:17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먼저 17절 앞부분이 종교의 타락을 말합니다. 여호와를 괴롭게 하는 자들은 당시 타락한 제사장들인데, 말라기서는 성경 중에 제사장들을 가장 강력히 비난하는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말라기는 1장 처음부터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라고 제사장들을 향한 날선 비판을 합니다. 제사장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했습니까? 더러운 떡을 하나님의 제단에 드렸고, 불결한 제물로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1:7-8). 그들의 제사에는 정성이 없었고, 좋은 제물은 다 빼돌리고 훔친 것, 흠이 있는 것을 속여 하나님께 드렸습니다(1:13-14).

오죽했으면 하나님이 내가 그것을 달갑게 받겠느냐? 그런 헛된 예배를 드릴 바에는 차라리 성전 문을 닫으라고까지 하셨습니다(1:10). 그런 제사장들에게 하나님은 2장에서 계속해서 저주를 퍼부으시는데, 그 저주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2:2-3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2:2...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3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다른 사람들도 아닌 제사장들이 왜 그토록 타락하게 되었을까요? 그들 역시 소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포로 시절 에스겔은 예루살렘에 거룩한 성전이 재건될 것과, 그 성전으로부터 온 세상을 살리는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래서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이 힘을 합쳐 성전을 지었지요.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포로 시절, 이사야는 이제 하나님이 속히 오신다, 그가 온 세상에 흩어진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고, 시온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 온 세상이 우러러보게 하실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와 나라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해방된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시절보다 나을 것이 없는 처지가 지속되자. “이게 에스겔과 이사야가 그토록 꿈꾸었던 하나님 나라였다는 말인가?” 당장 제사장들부터 회의와 낙담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질문을 해도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 말씀에서 더 이상 소망을 찾지 못하자, 슬슬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결국 오랜 시간 소망 가운데 참고, 인내해야 하는 하나님 나라가 아닌, 당장 눈앞에 잘 먹고 잘 사는 세상 나라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에 정의가 실종되었습니다. 제사장들부터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제물을 속이고 빼돌립니다. 제사장들의 불의한 삶은 그들이 전하는 왜곡된 메시지를 통해 그대로 전달되었습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사실상 정의의 하나님은 없다!”였습니다(2:17b). 말라기서가 이렇게 심각한 종교의 타락을 다루는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교회가 말라기서를 단순히 십일조 잘 내면 복 받는다는 책으로 사용하는 것은 말라기서에 대한 심각한 모욕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에도 비자금과 불법으로 유명한 유명목사들의 메시지 역시, 본질적으로 정의의 하나님은 없다!”라고 외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말라기서에는 당시 정의가 실종된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형제들에게 거짓을 행하고, 이방과 통혼합니다(2:10-11). 단지 외국인과 결혼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백성이 우상숭배 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이혼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품꾼의 삯을 떼어먹어 억울하게 하고,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학대했습니다(3:5). 당시 이스라엘 사회가 얼마나 가치관이 전도된 사회였는지, 교만한 자가 복되다,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한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사용되었고(3:15), 악을 행하는 자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2:17).

이런 이스라엘 사회를 향해 말라기 선지자가 외쳤던 메시지는 이제 곧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러 오신다!”였습니다. 그런데 3장 1절은, 그분이 오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사자를 미리 보내실 것을 말합니다. 신약성경은 그 사자가 바로 세례요한이라고 증거합니다.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Lovis Corinth, Salome(1900)
Lovis Corinth(1858~1925), Salome(1900)

세례요한은 이스라엘에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하나님은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3:7-9)

그 때 수많은 백성들이 세례요한에게 나아와 자신의 죄를 실토하고, 세례를 받고, 곧 오실 하나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예루살렘 성전 당국자들은 회개하기를 거부했지요이에, 세례요한 뒤에 오신 주님은 오셔서 성전을 심판하셨습니다. 2절과 3절의 금을 연단하는 불, 옷을 희게 하는 잿물이 그 심판의 혹독함을 상징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성전에 친히 오셔서 타락한 제사장들을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오셔서 성전을 정화하셨지요(11:15-17).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옛 성전을 폐하시고, 당신께서 친히 새로운 성전, 순결한 희생제물,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 기존의 성전예배를 완전히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4:24).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배는 사회와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배는 사회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불의한 예배가 불의한 사회를 만들고, 의로운 예배가 의로운 사회를 만듭니다. 타락한 예배는 타락한 사회를 만들고, 순결한 예배는 순결한 사회를 만듭니다. 그래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은 먼저 불의한 성전을 심판하심으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오늘날 불의한 교회가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것보다, 자신의 성공을 목표로 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거기서는 목회세습이 하나님의 뜻되고, 성직과 학위도 돈으로 사는 게 상식입니다. 성적으로 타락한 목회자도 다윗처럼 존경받습니다.

교회 안에서 정의를 말하면, 종북 좌파가 되고, ...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말하면, 지옥 불에 떨어질 사탄의 자식들이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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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교회 안에서 정의를 말하면, 종북 좌파가 되고, 가난한 자들을 옹호하면, 부자의 재산을 탐하는 게으름뱅이가 됩니다.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말하면, 지옥 불에 떨어질 사탄의 자식들이 되지요. 그럼에도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괴롭혀드렸는가 우리야말로 하나님에게 기쁨이 된다라고 말합니다. 2,400년 전 말라기 시대가 아니라, 21세기 한국교회의 실상이 그러합니다. 말라기 시대는 아직 주님이 오시기 전이라 그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주님이 오신 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때, 한국 교회가 받게 될 심판이 결코 적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소망하는 대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장차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소망한 교회들, 그래서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먼 세상 나라의 타락한 삶을 살았던 교회들을 먼저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아니 이 땅의 모든 교회가 그 두려운 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오직 하나님과 그의 나라만을 소망하는 의로운 예배를 드리는, 참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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