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은 잠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고독은 잠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 김영웅
  • 승인 2017.11.19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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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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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은 잠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나를 떠나는 여행. , 이 여행은 길지 않아야 하고, 또한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독의 의미는 곧 방황이 되기 때문이다. 잠시 나를 떠나 다시 날 찾는 것, 여기에 고독의 참된 의미가 있다.

고독은 우릴 낯선 곳으로 인도하기도 하지만, 때론 익숙함으로도 우릴 이끈다. 언젠가 머리를 통하지 않고도 벌컥 알게 되었던 그 느낌, 그 냄새, 그 감촉. 과거의 나와의 데자뷰. 심리학자들은 이 현상을 과거의 상처나 그에 대한 치유, 아니면 욕구의 불만족 등으로 설명을 하겠지만, 이것 역시 생물학자인 난 자가항상성의 일환으로 본다. 구체적인 원인은 모르지만, 내 몸이, 내 마음이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것이 치유를 목적으로 하든, 그저 추억에 잠겨보는 것이든, 괜히 혼자 있고 싶은 것이든 상관없다.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알지 않고도 우린 고독으로부터의 유익을 충분히 누릴 수 있다.

아이를 재우고 아내도 잠든 밤 늦은 시간, 보통 난 적어도 한 시간이라도 책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며 글도 쓰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나름 고독으로 떠나는 시간이다. 난 이 시간이 참 좋다. 읽어나가는 책에 따라 묵상이나 기도, 그리고 글의 방향과 흐름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또 항상 그런 것도 아니다. 종종 뜬금없는 생각이 날 찾아온다. 물론 이렇게 저렇게 그 생각이 떠오른 이유를 추론하여 가장 해답스러운 답을 밝혀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은 과감히 떨쳐버린다. 그냥 받아들인다. 그 날은 그 생각이 내게 필요했던 것이다.

오늘은 뚱딴지같이 내가 과거에 경험했던 아주 익숙한 불안함이 날 찾아왔다. 그 생각과 조우한 나는 말한다. "? 클리블랜드?" 그렇다. 클리블랜드에 있었을 때, 24시간 날 감싸고 있었던, 눈에 보이지 않고 숨으로 들이쉬지 않아도 늘 내 안과 밖에 존재했던 그 불안함. 그것이 순식간에 날 감쌌다. 그렇다고 불안해진 건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도 빠른 속도로 그 때 그 장소에서와 똑같은 기분이 휩싸일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어려움이 빠져 그 한 가운데에 있을 때, 마지막으로 잡고 있던 풀 뿌리까지도 뽑혔을 때, 우린 절망이란 녀석과 하나가 된다. 어쨌거나 그 시절도 지나가는 법이며, 다 지난 후에는 그 때를 회고하며 남의 얘기하듯 웃으면서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모든 시간은 정지된 것처럼 느껴지며 죽음이란 녀석의 냄새까지도 맡게 된다. 그럴 땐 그 어떤 사람의 말도 들리지 않는 법이다. 아무리 지혜로운 말이라도, 아무리 가슴을 울리는 말이라도, 다 소용이 없다. 그야말로 위기인 것이다.

난 이 순간을 인간의 한계를 만나는 시간이라 부른다. 내가 만난, 대화가 통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그 시점을 모두 지나왔다는 것이다. 다들 그 시기를 각자만의 방법으로 견뎌내며 단련되어졌다. 그 진정한 한계에 봉착한 순간은, 곧 인간인 우리들 안에는 그 한계를 넘어설만한 아무런 희망이 없음을 발견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즉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기 살을 파먹으며 파멸에 이를 뿐이다. 용기 내서 도움을 요청하고 받아들이는 것, 비로소 겸손함을 보일 순간이다. 비로소 긴 고독의 여행을 마치고 새로운 나를 발견할 시간이다.

 

글쓴이 김영웅박사는, 하나님나라에 뿌리를 두고, 문학/철학/신학 분야에서 읽고/쓰고/묵상하고/나누고/배우는 것을 좋아하며, 분자생물학/마우스유전학을 기반으로 혈액암을 연구하는 가난한 선비/과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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