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환] 정의와 공의를 이 땅에
[이택환] 정의와 공의를 이 땅에
  • 이택환
  • 승인 2018.12.02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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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목사의 설교 - 렘 33:14-16
Antonio Puccinelli, “The Jews in Babylonian captivity”(1851)
Antonio Puccinelli, “The Jews in Babylonian captivity”(1851)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인 오늘 설교 본문은 구약의 말씀 예레미야서입니다. 예레미야서는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단 52장으로 깁니다. 이사야서 66장보다는 짧지만, 예레미야의 내용이 더 많아서, 페이지 수는 96쪽으로 87쪽짜리 이사야보다 9쪽이 더 깁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은 장수를 가진 시편(150)보다도 내용이 더 많지 않을까 했는데, 거의 비슷한 것 같아요. 시편은 총 단어 수가 42,682, 예레미야서는 42,654개인데, 단어 수 스물여덟 개 차이만으로는 저도 어느 쪽이 더 긴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긴 책이라도 일관된 스토리가 있으면 재미가 있지요. 그런데 예레미야서에는 그런 스토리가 없습니다. 연대도 뒤죽박죽입니다. 같은 예언서인 이사야서의 경우는 제1 이사야(1-39. 바벨론 포로 전), 2 이사야(40~55, 바벨론 포로기), 3 이사야(56~66, 바벨론 포로 후), 연대 구분이 명확하지요. 그런데 예레미야서는 책 앞부분에 예레미야 후반부 내용이 있는가 하면, 뒷부분에 초기 역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읽다 보면 이 부분이 언제 적 이야기인지 종종 미로에 들어선 느낌입니다.

예레미야서가 그렇게 복잡하게 구성된 이유에 대해 학자들은 당시 유대 왕 여호야김이 예레미야서를 칼로 찢어서 화롯불에 태워버린 것(36)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예레미야서를 읽을 때 어려움을 겪는다면, 예레미야의 삶은 그보다 수천 배 더 힘들고 어려웠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호야김이 예레미야서 두루마리를 칼로 찢어 불에 태웠다는 것은 예레미야를 그렇게 했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수많은 선지자 가운데 예레미야처럼 왕과 귀족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 심지어 고향 일가친척들에게까지 미움받았던 선지자가 드뭅니다.

오죽했으면 예레미야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말할 때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되었나이다(20:8).” 심지어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라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라면.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가!” 예레미야는 그렇게 일찍이 욥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할 정도로 힘겨운 삶을 살았습니다(20:14, 20).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선지자들처럼 듣기 좋은 평강의 메시지가 아닌, 늘 듣기 싫은 파멸과 멸망의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입니다.

평강을 전하는 자들의 논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시기로 약속하신 다윗언약과, 하나님의 집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는 한, 누구도 유다를 해할 수 없다는 성전 신학에 기초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다윗언약에도 이스라엘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매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실 것이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삼하 7:14), 그리고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도, 이스라엘에 정의와 공의가 살아 있을 때에나 해당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지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평강 주실 때가 아니라, 오히려 심판하실 때라는 것이었지요.

 

오늘 예레미야 33장의 배경은 32장과 같습니다. 그때가 어떤 때였는지 321~2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1 유다의 시드기야 왕 열 번째 해...2 그 때에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혔으니

바로 유다가 멸망하기 1년 전인 주전 588년인데, 이미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에게, 유다의 멸망과 왕이 바벨론에 끌려가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예언했다가(32:2-5), 미움을 사서, 왕의 시위대의 뜰에 있는 감옥에 갇힌 상태였습니다. 그 후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유다가 멸망했기에, 유다 역사상 가장 절망적일 때가 그때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암울한 시절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습니다. 당시 예레미야의 사촌 한 사람이 큰 어려움에 빠져 자기 밭을 팔아야 할 처지였는데,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그 밭을 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사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보다 유다의 멸망을 크게 외친 자가 예레미야였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곧 망하는데 밭을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만약 예레미야가 그 밭을 산다면, 유다가 멸망할 것이라는 그의 예언을 스스로 부정하는 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기꺼이 돈을 치르고 그 밭을 삽니다.

자신의 예언을 부정해서가 아닙니다. 그가 유다의 멸망을 예언한 것은, 영원한 멸망이 아니라, 유다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그리고 바벨론 포로로 그것이 실현되겠지만, 유다는 머지않아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미 이전부터, 유다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70년 뒤에 풀려날 것을 예언해왔습니다. (25:11-12, 29:10). 그러므로 그가 친척의 밭을 구입한 것은 예언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명히 드러낸 것이었지요. , “유다는 망해서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반드시 되돌아온다!”

그리고 이 사건 후에도 투옥 중인 예레미야에게 유다의 멸망, 바벨론 포로 및 포로 귀환과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 차례 임했습니다(32;26, 36, 42, 33:1, 10, 12).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가 여전히 시위대의 뜰 안에 갇혀 있고, 예루살렘 또한 바벨론 군대에 포위되어 있을 때,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이었습니다. 14~16,

“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일러 준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15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16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

오늘 말씀이 특별한 것은 지금까지 예레미야가 예언한 파멸과 멸망의 예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멸망도, 바벨론 포로가 된다는 말도 없습니다. 대신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하나님의 선한 말씀이 성취된다는 것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15절에 나오는 다윗언약의 실현이었습니다. ,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사,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현한다는 것, 그 결과 유다가 구원을 얻고, 예루살렘이 여호와는 우리의 공의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Gebhard Fugel(1863-1939), "바벨론 강가에서"(19
Gebhard Fugel(1863-1939), "바벨론 강가에서"(1920)

이 예언이 시드기야 왕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후, 시드기야가 예레미야를 불러 그의 조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시드기야는 예레미야가 예언한, “다윗에게서 날 의로운 가지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첫째, 그가 실제로 다윗의 가지, 즉 다윗의 자손, 유다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레미야가, “다윗에게서 난 그 가지가 정의와 공의를 실행함으로, 유다가 구원받고 예루살렘이 여호와는 우리의 공의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고 했는데, 시드기야의 이름이 바로 여호와 (우리의) 공의를 의미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의 건의를 전향적으로 받아들여, 소위 시드기야 개혁을 단행합니다(34:8-10). 그가 하나님 앞에 계약을 맺고, 유대인 노비들의 자유와 해방을 선포합니다. 그러자 왕의 노비는 물론 고관대작들의 노비들이 하루아침에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나라가 풍전등화에 처한 상황에서, 시드기야가 일종의 희년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애굽의 지원군이 유다를 도우러 올라옵니다(34:21, 37:5). 그러자 위협을 느낀 바벨론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포위를 풀고 군대를 퇴각시킵니다.

 

예루살렘에 모처럼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시드기야는 쾌재를 불렀고, 바벨론 느부갓네살이라도 결코 예루살렘을 함락시킬 수는 없다는 확신을 그가 그때 하게 된 것 같습니다. 누가 유다를 구원하는가? 시드기야! 누가 예루살렘에 안전을 가져오는가? 시드기야! ? 시드기야가 바로 하나님의 정의”, “여호와 우리의 공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착각 속에 그는 즉시 자신의 개혁을 번복하고, 얼마 전에 풀어주었던 노비들을 다시 붙잡아 들였습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것이지요. 그는 눈앞에서 바벨론이 물러가자, 곧바로 노예들의 경제적 가치를 포기할 수 없어서, 희년을 취소하고 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의 평화는 바벨론의 일시적인 퇴각으로 주어진 잠정적 평화에 불과했는데, 시드기야는 자신이 만들어낸 영원한 평화로 착각했던 것이지요. 결국, 몇 개월 뒤 바벨론 느브갓네살이 다시 자신의 모든 군대를 이끌고 와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하여 마침내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시드기야는 도주하다 붙잡혀 두 눈을 뽑힌 채, 수많은 유대인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왕궁은 불타고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졌습니다. 성전도 불타고, 성전 안의 보물들과 금은 그릇들은 모두 바벨론 사람들이 가져갔습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가 예언한 다윗에게서 나올 한 공의로운 가지는 과연 누구일까요? 적어도 시드기야처럼 백성들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조작하는 자가 아닐 것입니다. 그 결과 자신도 망하고 그에게 속한 자들까지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하는 자도 아닐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불행한 역사 가운데, 나라가 큰 위기 있을 때면, 항상 예레미야가 예언한 인물, 즉 메시아의 출현을 고대했습니다. 바벨론 포로 귀환 후에는 포로 귀환을 이끌었던 스룹바벨이 메시아가 아닐까 싶었는데 아니었습니다. 포로 귀환 후에도 그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갔기 때문입니다.

이후 유다가 그리스의 압제 가운데 신음할 때는, 유다의 독립을 이끈 유다 마카베오를 그들이 메시아로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은 단지 하스모니안이라고 하는 타락한 왕조에 불과했습니다. 이후 로마가 유대를 지배할 때, 사람들은 혹시 헤롯? 아니면 세례요한? 또는 대로마항쟁을 벌였던 유다, 드다, 시몬 바 기오라, 바 코크바 등 수많은 인물을 메시아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물론 그들을 따르던 자들 대부분이 처참하게 죽었고, 항상 그렇게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나사렛 예수를 예레미야가 말한 다윗의 후손, 곧 메시아로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께서 일찍이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그 언약을 성취하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왔다는 점, 동시에 그분 스스로 불의하고 낡은 성전을 대체할 영원한 새 성전이 되셨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하나님 나라 백성(새 이스라엘)으로 삼으셨다고 믿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구원이라고 말하지요.

또한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약속하신 바를 신실하게 이루시는 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이 땅에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 백성 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분의 부활을 통해, 이미 드러난 하나님의 정의와 그분의 공의를 널리 선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삶 속에서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있습니다.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되, 십자가와 부활의 방식으로 실현해야 한다는 것인데, 혼자서는 쉽지 않고 우리가 모두 함께 풀어가야 할 과제입니다. 주여, 이 땅에 하나님의 의를 드러낼 온 세상의 교회공동체와 함께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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