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빠진 컵의 이야기
이 빠진 컵의 이야기
  • Huuka Kim
  • 승인 2018.11.21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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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uka Kim
Huuka Kim

우리가 애착을 느끼는 대상은 사람이나 동물에 한정되지 않는다. 작은 컵 하나. 책갈피 사이의 네 잎 클로버. 낡은 구두 굽. 다 해어진 가방. 그것들에 저마다 시간과 공간의 이야기가 영글어 있다. 커피를 내려 마시려 잔을 들었을 때 찻잔 입술에 떨어져 나간 부분이 보였다. 순간 버려야 하나. 커피를 다른 잔에 옮겨 담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괜찮아요."  어디선가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린듯하다. 내려다보니 컵 안 가득 담긴 커피는 안정감 있게 고른 수증기를 내보내고 있다. 자기 역할은 아직 다하고 있다. 그다음은 마시는 사람의 몫. 줄리아 로버츠처럼 큰 입을 가진 나이지만 조심만 하면 잘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이 컵은 새물결플러스에서 '지렁이기도' 책을 출간하면서 제공한 컵인듯하다. 꽤 논란을 일으켰던 책. 이렇든 저렇든 자신의 기도 생활에 대하여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면 책으로서의 몫은 다한 셈 아닐까? 사실 난 그 책보다 컵이 좋았지만. 컵이 제법 두껍게 만들어져서 (같은 용량의 스**잔은 이것보다 얇고 키가 작다) 오랫동안 따뜻함이 유지되었고, 제법 넉넉한 양의 커피를 즐기는 나를 만족시켰다.

하늘이 흐리다. 천고마비.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그 가을이건만 높고 파란 가을하늘은 기대하기가 어렵다. 그런데도 초록 물 빠진 나무에 든 붉은 물은 환경은 변해도 가을의 그 몫은 하고 있다. 이 빠진 컵. 아직은 자신의 몫은 할 수 있지만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존재. 하지만 실하게 감당할 수 있다고 외치는 것은 자신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다들 이 빠진 컵 사용하면 안된다고 말할지도. 이 빠진 컵이 어쩐지 나랑 닮았다. 그래서 조금 슬픈 까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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