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대화 나누기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대화 나누기
  • 정한욱
  • 승인 2018.11.23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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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바야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 여름언덕, 2008년
피에르 바야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 여름언덕, 2008년
피에르 바야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 여름언덕, 2008년

파리 8대학 교수이자 정신분석가로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는 저자는 자신이 자주 펼쳐보지도 않은 책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독서를 신성시하고 어떤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 책을 ‘제대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에서 ‘비독서의 경험’을 나누거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란 상당히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독자가 텍스트를 만나는 경험은 ‘독서’와 ‘비독서’로 날카롭게 양분되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 명확하고 동질적이기보다 기억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왜곡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불분명한 과정이다. 따라서 우리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심지어 그 책을 통독하지 않거나 아예 펼쳐보지도 않는 것이 그 책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 더 바람직한 경우도 있다. 

저자는 이 책의 1부에서 비독서의 주요 유형에 대해 살피고 2부에서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어쩔 수 없이 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 대해 다루며, 3부에서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해야 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간결한 조언들을 건넨다. 그리고 이 책이 비독서로 인한 문제에 봉착한 사람들이 문제를 잘 풀 수 있도록 돕는 한편, 독서 활동에 관해 깊이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를 소망한다. 이 짧지만 통찰력 넘치는 책을 간단히 요약하고 단상을 덧붙이기로 한다.

 

비독서의 방식들

책을 전혀 읽지 않는 경우 아무리 많이 책을 읽는 독자라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책의 극히 일부분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독서란 곧 비독서이며 책을 전혀 읽지 않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책과 맺는 주된 관계다. 교양을 쌓았다는 것은 특정한 책을 읽었다는 것이 아니라 책들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총체적 시각”을 가지는 것이다. 그 책의 내용을 정확히 모른다 할지라도 그 책이 다른 책과 관계 맺는 방식은 알고 있다는 뜻이다. ‘비독서’란 독서의 부재가 아니라 수많은 책들 속에서 침몰당하지 않기 위해 그 책들과 체계적으로 관계를 맺고자 하는 하나의 진정한 활동일 수 있다.

책을 대충 훓어보는 경우 “총체적 시각”이라는 관념은 집단 도서관 안에서 책이 놓인 상황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책 전체 내용에서 각각의 단락이 처한 상황과도 관계된다. 교양이 있다는 것은 어떤 책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신속히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을 대충 훓어보는 것은 오히려 세부 사실에 빠져 길을 잃게 될 위험을 피하면서 책을 제 것으로 소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다. 어떤 책 한권이 아니라 모든 책이 중요하다. 어떤 한 책 한 권에만 지나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총체적 시각과 그 책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줄 폭넓은 구성을 잃게 할 위험성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책 이야기를 귀동냥한 경우 어떤 책에 담긴 내용에 대해 그 책을 읽지 않고도 명확한 관념을 형성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은 바로 다른 사람들이 그 책에 대해 쓴 것을 읽거나 그 책에 대해 하는 말을 듣는 것이다. 우리가 책에 대해 나누는 담론은 사실 대부분 그 책에 대한 기존의 다른 담론과 관계가 있다. 우리는 흔히 독서를 시작하자마자 영원히 가정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진짜 책은 멀리 치워버리고 바로 그 담론들과 견해들만 상대하게 된다. 우리가 화제로 삼는 책들은 사실 실재(實在)하는 책들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과 환상이 끊임없이 뒤얽혀 재구성된 파편적인 오브제(objet, 객체)이다. 언젠가 실재하는 책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부질없는 꿈에 불과하다.

책의 내용을 잊어버린 경우 모든 독서는 시작하는 순간부터 내용뿐 아니라 독서행위 자체에까지 미치는 망각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결국 ‘읽은’ 책과 ‘대충 훓어본 책’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책 자체가 아니라 부분적 독서에서 뽑아낸 서로 뒤얽혀 있고 개인적 환상에 의해 손질된 텍스트의 조각들이다. 독서의 주체 역시 자기 자신을 확신하는 단일화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알아볼 수 없는 텍스트 조각들 사이에서 방황하는 불확실한 존재다. 독서가 기억일 뿐 아니라 망각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심리적 원군이 된다.

 

담론의 상황들

사교 생활에서  사교 생활에서 다른 사람들과 책 이야기를 할 때는 언제나 어떤 구체적인 책과 관련해 언급되는 일련의 책들이 등장한다. 이때 이 책들은 그들이 대표하는 "집단도서관"이나 특정 문화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다른 사람들과 책에 대한 의견을 교환할 때면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가 우리의 내부에 구축한 “내면의 도서관”이 다른 사람들의 도서관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이런저런 알력이나 갈등을 야기할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조금씩 우리를 만들어 온, 그래서 이제는 고통 없이는 우리와 분리될 수도 없게 된 축적된 그 책들의 앙상블은 바로 우리라는 존재 자체다.

선생 앞에서  어떤 작품을 전혀 읽지 않은 학생들이 보여주는 작품에 대한 관념은 그 작품 이야기를 듣기 훨씬 전에 구성되어 있다. “내면의 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집단적이고 개인적인 표상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어떤 요소들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결정하면서 텍스트를 능동적으로 재구성한다. 작품을 읽거나 알기 전이라도 책에 대한 발언을 얼마든지 시작될 수 있는 이유는 모든 책 이야기가 실제로는 자신들의 “내면의 책”에 대한 견해를 표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책을 읽지 않았거나 다른 문화권에 있는 독자는 오히려 그 책에 대해 신선하고 창조적인 논평을 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작가 앞에서  작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책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자신이 썼다고 상상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의식하게 된다. 서로가 가진 “내면의 책”이 다를 수밖에 없어 독자가 저자의 책에 포개는 그 책을 저자가 자기 책으로 확인할 가능성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의 글로부터 분리된 뒤로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그것들로부터 멀어지게 되며, 책에 대해 말을 하거나 그 책을 정확하게 기억함에 있어서 과연 작가가 우리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는지는 그리 확실치 않다. 따라서 어떤 작가 앞에서든 그의 작폼에 대해 세부 내용을 언급하지 않은 채 모호한 표현으로 좋게 말해주는 것이 가장 좋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상대와 동일한 독서를 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공통된 독서를 하는 것, 이는 사랑의 감정이 움틀 수 있는 조건들 중 하나다. 그래서 연애 관계 초기부터 사랑하는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고 서로의 내면의 도서관이 가깝다는 점을 상대에게 느끼게 해줄 필요가 있다. 타자에게 깊이 각인된 책을 결국 자기 자신의 책이 될 만큼 세세하게 탐구할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바로 문화에 대한 진정한 대화의 조건이며, 이상적으로 공유되는 사랑이란 어쩌면 타자를 구성하는 토대인 타자의 가장 은밀한 책들에 이르는 길을 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처요령

부끄러워하지 말 것   한 권의 책은 "집단도서관"이라 불리는 방대한 전체 속의 한 요소이며, 이 집단도서관의 특정 부분을 읽지 않았다고 해도 그 책에 대해 나름의 의사표명을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실천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문화에서 비독서를 인정하는 데 수치심과 죄책감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책들에 관한 토론이라는 유희의 공간, 혹은 위선의 공간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규칙 중 하나는 어떤 사람이 어떤 책을 읽었다고 할 때, 어떤 점에서 그가 실제로 그 책을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 규칙을 어기는 순간 그는 교양이라는 것이 아무리 심화된 경우라도 구멍과 균열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으며 개인의 무지와 지식의 파편화를 감추는 역할을 하는 하나의 연극이라는 “교앙의 진실”을 폭로하게 된다.

자신의 생각을 말할 것   어떤 책의 내용은 그 책에 관해 논의될 담론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실제로 책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체계 안에서 그 책(또는 저자)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다. 책 자체는 절대 변하지 않지만 어떤 책이 집단 도서관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계속 바뀌며, 이는 책이란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닌 유동적인 오브제이며 그 유동성은 책을 중심으로 짜이는 권력 관계 전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텍스트의 유동성과 이 유동성에 의해 밝혀지는 우리 자신의 유동성은 어떤 작품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자유롭게 제시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라 할 수 있다.

책을 꾸며낼 것   사람들을 특정 책을 읽은 쪽과 그 책을 모르는 쪽으로 양단하는 것은 독서 행위의 불확실성을 모르는 소치이다. 타자들이 책에 대해 나보다 잘 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책들에 대해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다. 실제로는 비독자나 독자 모두가 원해서든 아니든 책들을 꾸며나가는 끊임없는 과정 속에 들어가 있으며, 중요한 것은 거기에서 어떻게 빠져 나오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런 과정의 폭과 역동성을 증가시켜 독창적인 창조의 기회로 삼느냐이다. 

자기 예기를 할 것   작품은 담론 속에서 증발하면서 불안정하고 환각적인 오브제인 “유령 작품”에 자리를 내준다. 따라서 개락적으로 알고 있거나 전혀 모르는 어떤 작품의 일부 요소만을 파악한 후 나머지 내용에 개의치 않고 고유의 성찰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내면 책의 원고를 편찬하는 편이 더 낫다. 중요한 것은 책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 혹은 책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텍스트에 대한 거짓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거짓이다. 읽지 않은 책에 관한 담론은 자기 자신과 책들의 분리가 이루어지는 최초의 순간, 즉 다른 사람들의 말의 무게에서 마침내 해방된 독자가 자기 자신의 텍스트를 만들어내며 한 사람의 창작주체로 탄생하게 되는 순간으로 이끌 수 있다.

 

스스로의 마음에 깊이 간직한 바로 그 성경이 변형되고 왜곡된 텍스트의 조각에 불과하며,

그들이 그렇게도 애지중지하는 ‘성경 자체’에 도달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꿈?

개인적 단상

이 책은 제목만 보자면 책 좀 읽는다는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가볍고 사기성 짙은 처세서처럼 보이지만, 저자는 이 흥미진진한 책에서 독서를 신성시하는 주류문화가 가르쳐 온 책읽기와 관련된 고정관념에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독서 행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시도한다. 저자에 따르면 ‘독서’와 ‘비독서’는 명확히 구분할 수 없고, 독서 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책은 “망각의 강”과 “내면의 책”을 통과한 후 불완전하고 왜곡된 형태로 재구성된 텍스트의 파편에 불과하며, 책을 읽는 독자 역시 확고하고 불변하는 주체가 아니라 알아볼 수 없는 텍스트 조각들 사이를 정처 없이 떠도는 불확실한 존재일 뿐 아니라, 서로 다른 “집단도서관”과 “내면의 도서관”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두 사람이 화제에 올리는 책은 실제로는 서로 간에 거의 겹치지 않는 ‘다른 책’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이유로 저자는 ‘우리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어자피 독자든 비독자든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든 사람은 책들을 '꾸며나가는' 끊임없는 과정 속에 있다. 어떠한 책을 어떤 수준으로 읽었는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 과정을 창조적으로 승화시켜 타당하고 통찰력있는 견해를 제시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저자는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통찰력있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창조의 세계를 열어주는 시작점이 될 수 있으며, 어자피 불가능한 꿈인 ‘책 자체’에 도달하려는 시도를 중단한 후 개략적으로만 알고 있거나 전혀 모르는 텍스트의 일부 요소만을 가지고 ‘책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시도하는 편이 더 낫다고 강조한다. 결국‘읽지 않은 책에 대한 이야기'의 최종 목표는 “다른 사람들의 말의 무게에서 마침내 해방된 독자가 자기 자신의 텍스트를 만들어내며 한 사람의 창작주체로 탄생하게 되는 순간”이다.

이 책을 읽으며 저자의 생각을 불편하게 생각할 사람들 중 단연 으뜸은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성경 텍스트가 문자 그대로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자신들이 성경을 읽어온 독법 - 이 책의 표현을 빌자면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내면의 도서관”이나 그들이 속한 “집단도서관” - 이야말로 유일하게 바른 ‘정통’의 방식이라고 확신해 마지않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열심히 읽고 또 읽어 스스로의 마음에 깊이 간직한 바로 그 성경이 변형되고 왜곡된 텍스트의 조각에 불과하며, 그들이 그렇게도 애지중지하는 ‘성경 자체’에 도달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꿈이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4. 그러나 이 책을 다 읽은 나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이 책에서 가장 많은 것을 배워야 할 집단이라고 확신한다. 성경읽기란 결국 유동적이고 불확실한 인간이 결코 완전히 도달할 수 없는 텍스트와 만나 파편적이고 불완전한 오브제를 얻어내는 행위라는 사실, 그리고 성경읽기의 목표는 성경 텍스트에 완벽하게 도달하려는 집착에서 벗어나 그  텍스트의 조각들을 바탕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좀더 새롭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써나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긴다면 우리는 좀더 겸손하고 좀더 자유로우며 좀더 창조적인 독자요 해석자, 더 나아가 제자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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