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많이 알고 있음에도 가장 숙고되지 못한 '십계' 읽기
가장 많이 알고 있음에도 가장 숙고되지 못한 '십계' 읽기
  • 정한욱
  • 승인 2018.11.25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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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외 9인, '십계’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 글항아리, 2018년
김진호 외 9인, '십계’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 글항아리, 2018년
김진호 외 9인, '십계’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 글항아리, 2018년

어거스틴이든, 아퀴나스든, 루터든, 칼빈이든, 바르트든

그 어떤 위대한 신학자의 훌륭한 신학도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 라면,

어자피 그분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신명나게 즐긴

한바탕 놀이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책은 2012년 가을, 신앙인아카데미, 우리신학연구소(가톨릭),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까지 세 단체가 연합하여 개최한 ‘지금 여기로 걸어나온 십계’라는 공동 강좌의 내용을 글로 풀어 엮어낸 책이다. 중간에 필자가 바뀌거나 원고를 몇 번씩 고쳐쓰는 등 책으로 나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한다. 대표 필자인 김진호 목사는 이 책의 서문에서 비기독교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고 교파를 막론하고 많은 교회와 신자들이 강력한 교리적 구속력을 지니는 것으로 여기는 십계는, 사실 성경 전체에서도 가장 제대로 숙고되거나 성찰되지 않은 주제 중 하나이며 바로 이 점이 이 책을 기획한 이들이 십계에 주목했던 핵심적 이유라고 말한다.

이 책의 필자들이 공유하는 기본적인 인식은 십계명에 속한 계율 하나하나는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이들이 하나의 묶음본으로 만들어져 반포된 역사의 자리는 이스라엘의 광야유랑 시절이 아니라 ‘국가’시대, 특히 요시야 왕정시대라는 것이다. 필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십계명은 요시야 개혁의 요체를 담은 선언으로 지금까지 단지 훈육과 통치의 대상이었던 농민대중을 ‘법의 백성’으로 호명함으로서 말과 통치의 새로운 주체로 세우려는 정치적 기획의 일환이었다. 또한 출애굽기 내러티브에서 십계명이 여호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해방사건인 출애굽과 결합됨으로서, ‘법의 백성’은 '신의 백성', 신이 부여한 자유의 주체로까지 격상되었다.

더 후대의 텍스트인 신명기에서는 이 법이 과거의 주체들인 조상들뿐 아니라 현재의 주체들인 “여기 살아 있는 모두”를 대상으로 한다고 말한다. 이 법은 과거의 법이 아니라 현재의 경험 속에서 살아 재해석된 것이며, 신은 바로 그런 현재의 사람들에게 이 법을 통해 “얼굴을 마주보면서” 대화를 건네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들은 이 책에서 이러한 신명기의 정신에 따라 우리 시대의 맥락과 무관한 경직된 의미로 해석되어왔던 교회의 십계 독법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고, 21세기의 한반도라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십계 항목 하나하나와 새롭게 대면시켜 재해석하는 흥미로운 해석의 모험을 감행한다.

혹시 필자들의 해석이 너무 자유로워 불편을 느끼는 분이 계실듯 하다. 그렇다면, "성서의 '소유권'을 논하거나 ‘성서는 누구의 것인가?’ 라고 묻는 것은 그 자체로 주제넘은 일이자 신성모독 행위이며, 오늘날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전 교파 및 ‘비신앙의 눈으로’ 성서에 접근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인류는 성서의 '일시적인 소유자'이자 '종신 세입자'"라는 위대한 교회사학자 야로슬라브 펠리칸의 말을 떠올려 보라. "어거스틴이든, 아퀴나스든, 루터든, 칼빈이든, 바르트든 그 어떤 위대한 신학자의 훌륭한 신학도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 라면, 어자피 그분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신명나게 즐긴 한바탕 놀이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내 말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부디 이 다채로운 해석의 잔치를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가져주시길 바란다. 책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기로 한다.  

요 약 

1계명 -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 (‘신이 하나’라는 말에 대한 범재신론적 해석, 이찬수)

구약성경에서 1계명은 야훼를 중심으로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해나가자는 정치적이고 실천적인 요청을 품은 일종의 택일신론(henotheism)이라고 할 수 있다. 예레미야 시대에 인간의 내면에서 활동하는 신을 발견하게 되면서 진리가 내면화되었으며, 이는 신은 하늘 위에도 계실 뿐 아니라 모든 곳 안에도 계시다는 ‘내재적 초월’ 혹은 ‘초월적 내재’ 라는 신약의 핵심적 신관으로 이어진다. 범재신론(panentheism)이라 불라는 이 입장에서는 신이 인간 인식의 대상이라기보다 주체에 가까우며, 인간에 의해 파악된 범주를 언제나 넘어선다(all≤God). 또한 이 입장은 ‘하나의 신’이라는 말의 ‘하나’를 수량적 하나가 아니라 전체이자 근원으로 해석하게 해줌으로서 유일신론을 택일신론 수준으로 남겨두는 상당수 기독교인들의 오해를 극복하게 해준다.

2계명 -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신의 이름을 둘러싼 전통, 상상, 그리고 진실, 이상철)

데리다의 차연(diffréance)이란 차이와 연기의 의미를 함께 담고 있는 단어로 차이를 계속 생성한다는 뜻이며, 틈과 여백이 계속 생겨난다는 것이다.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ehyeh asher ehyeh”로 알려주신 기독교의 하나님은 충족과 완전이 아닌 차연과 틈새로 존재하는 신이며, 우리가 이 신을 부르는 순간 안정적이고 견고해 보였던 닫힌 세계에 차이와 균열이 발생하면서 그 체계의 불안정성과 비정상성이 드러나게 된다. 이는 해체와 변혁에 대한 메시아적 환상으로 사람들을 인도할 것이고, 스스로 안정적인 체계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포를 유발하는 ‘유령’이 될 것이다.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말은 금지가 아니라, ‘틈으로 존재하는 신’을 잘 호명하라는 뜻이다.

3계명 -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체제의 분할 전략을 넘어서 - 안식일 정신과 기본소득운동, 유승태)

교회는 그동안 3계명을 어떻게 계약백성 경계 밖의 사람들을 우리 편으로 포섭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체제분할전략’의 관점에서 이해해 왔을 뿐, 이 계명이 인간과 자연을 아우르는 피조세계 전체를 이롭게 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안식일의 참 의미를 되찾기 위해서는 노동의 본질과 과정 자체를 새롭게 상상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 필요한 가장 중요한 실천은 자본주의적 질서에 따라 결정된 여러 문화적 경계를 뛰어넘기 위한 조건을 만드는 작업이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무조건적 은혜를 인간과 우주의 존재 근거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 복지’를 전제하며, 기본소득은 사람들이 의미 있는 일, 또는 자신의 내적 욕구에 따라 일할 수 있게 해줌으로서 성서적인 ‘안식’을 실현하는 방법일 수 있다.

4계명 - 네 부모를 공경하라(부모 공경의 계명과 아동학대, 김희선)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는 폭력과 학대를 경험하는 아동들에게 ‘무조건’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종교적 계명과 부모에 대한 원망을 금기시하는 도덕적 규범을 강요함으로서 부모로부터의 폭력을 정당화시키고 아동 학대의 폐혜를 더욱 조장해 왔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을 학대한 부모에 대해 원망의 감정조차 품을 수 없게 된 피해아동들은 내면으로 깊숙히 억압된 분노와 상처로 인해 자아의 혼란과 원인을 알 수 없는 각종 신체적 질병에 시달리기도 한다. 교사와 목회자를 포함한 교회 공동체 내 사람들은 이제 아이들에게 ‘네 부모가 너를 존중하고 충분히 사랑해주지 않으며 아프게 한다면 옳지 않다’ ‘네 잘못이 아니다’ ‘너는 도움을 받을 수 있다’라고 말해줌으로서 ‘간접 보호자(der Helfende Zeuge)’ 의 역할을 할 수 있다.

5계명 - 살인하지 말라(서바이벌의 체계를 척결하라 - 사회적 타살로서의 자살에 대하여, 김진호)

성서는 자살이나 자살로 해석되는 행위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살인 금령 위반이라고 선언하지 않는다. 자살을 자기살해로 해석하여 비난했던 대표적인 그리스도교 지도자는 아우구스티누스였으며, 도나투스파와의 이단 논쟁의 와중에서 나온 그의 비난은 신학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이었다. 그러나 이 교리는 곧 신학적 일반론으로 격상되어 자살자의 시신을 훼손하고 유족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교회 폭력의 신학적 알리바이를 제공했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 사회는 점차 자살을 사회적 타살로 이해하기 시작했으나 교회는 지금까지 자살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스스로를 세상과 대화 불가능한 게토에 가두고 있다. 한국에서 양극화와 맞물린 서바이벌 사회와 그것이 초래한 절망이야말로 많은 이로 하여금 스스로 생명을 끊게 하는 자살 교사범이다.

6계명 - 간음하지 말라 (이성애 가부장제 없이는 불가능한 간음 제도, 김나미)

이성애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 중심적 시각으로 기록된 구약에 따르면 여성은 남편의 소유물로 여겨졌으며, 간음은 그 여성의 남편에 대한 범죄이자 상속과 부계의 질서를 흔드는 사회적 범죄였다. 현대 사회에서 ‘결혼의 진실’은 자본주의와 국가 시스템 유지를 위해서 여성의 가사노동과 육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며, 간통죄는 ‘가족’이 아닌 ‘가족제도’를 보호하고 유지하는 데 목적이 있다. 성서시대에 6계명의 반포는 공동체가 개입해 간음여부를 분별하는 과정을 거치게 함으로서 막강한 힘을 가진 가부장들의 질투나 오해에 의한 사적 복수를 방지하는 순기능을 발휘했다. 그러나 오늘날 간음의 형사처벌은 공권력의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로 간주되며, 성서는 현대 사회에서 성과 관련된 다양한 이슈들에 대해 일관된 시각을 제공해주는 지침서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7계명 - 도둑질하지 말라 (악마는 뒤쳐진 자부터 잡는다, 정용택)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은 부정의하게 구조화된 사회적 상호작용 및 제도 실행의 과정이 수많은 백성을 노예의 길 죽음의 길로 유인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탄생했으며, 소규모 자영농민들에 대한 지배 엘리트들의 전방위적인 수탈, 곧 토지의 강탈로 시작하여 지대의 탈취를 거쳐 고리대를 통한 노예화로 귀결되는 사회구조적 차원의 인간 도둑질/도적질을 금지하기 위해 제시된 계명이다. 7계명을 포함한 십계명 전체는 초기 이스라엘로 돌아가려는 유토피아적 열망을 바탕으로 인간을 소외된 존재, 즉 노예화된 삶으로 유인하는 이스라엘의 정의롭지 못한 사회적 관계의 구조를 개혁하라는 야훼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야만적인 체제의 첫 번째 희생자는 그 사회에서 맨 뒤로 처진 사람들, 가장 밑바닥으로 추락한 사람들이다.

8계명 - 네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하지 마라 (살리는 말의 주인이 되라 : 말이 말 같지 않은 시대의 말에 대하여, 홍정호)

8계명은 상대방을 곤경에 빠뜨리는 거짓말, 특히 재판에서 상대방을 억울한 피해자로 만드는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는 명령이다. 요시야는 부와 권력을 독점한 이들의 횡포에 맞서고 재판에 공정성을 더하기 위해 십계명을 통한 법률의 역사화 곧 법의 말을 통한 대중의 주체화를 시도했다. 정의는 법치의 철폐도 그것의 실현과도 동일시될 수 없는 ‘아마도’의 가능성에 머물며, ‘아마도’의 가능성을 벗어던진 정의, 법치의 이상과 동일시되는 정의는 법의 말을 통한 주권자의 현 지배를 정당화시키는 권력의 수사로 전락할 뿐이다. ‘법의 말’을 넘어 ‘참말’이 일으키는 사건에 이르기 위해서는 내 손에 들린 올바름의 잣대로 최종판단을 내리는 대신, 타자의 말이 놓인 맥락 속으로 용기 있게 걸어 들어가 거기서부터 올바름의 내용을 재구성하는 지난한 길에 나서야 한다.

9계명 -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 (가부장제로부터 성과 사랑을 해방하라, 백소영)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십계명을 살핀다는 것은 계시로서의 보편 복음을 찾기 위한 노력이며, 이를 위해 먼저 가부장들이라는 특수 그룹의 편견을 벗겨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성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근현대 사회에서 존재론적으로 여성을 열등하다고 폄하하는 것이 어렵게 되자, 근대적 형태의 가부장제는 결혼 제도 안에서 기능적 위계를 통해 여성의 성 통제를 이어가려 했으며, 남편과 아내는 존재론적으로 평등하지만 기능적으로는 위계적이라고 선포하며 성별 기능 분업을 신성시는 현대 기독교 담론이 그 전형적인 예다. 9계명의 핵심은 간음이 아니라 탐심이며,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어에 내포된 하나님의 계시는 간음이 행위의 문제라기보다는 응시와 관계성의 문제라는 것이며, 상대방을 인격체나 인간으로 보지 않고 대상화하여 음욕을 품는 것 자체가 간음이라는 것이다.

10계명 - 이웃의 소유를 탐하지 말라 (탐욕의 다수결인 시대, 우리 안의 탐욕, 이숙진)

이 계명은 ‘탐심’에 대한 금기라기보다는 ‘탐욕이 추동되는 전 과정’에 대한 금기이자 법의 비호 안에서 합법적인 방식으로 이웃의 소유를 취하는 행위에 대한 금지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오랫동안 중죄로 간주되었던 탐욕은 풍요로운 삶과 교회 성장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으나, 가진 자의 소유권은 어떤 이유로도 가난한 자의 생존권을 앞설 수 없으며 탐욕의 시스템을 돌리는 공범자로 살지 않겠다는 것은 편함과 풍요에 길들여진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이다. 내 생활에 밀접한 관계를 끼치는 이웃의 범위는 역사의 진행에 따라 넓어졌으며 우리의 이웃은 전 지구적 차원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가 지켜야 할 마지막 계명은 지구 이웃에게 행하는 모든 탐욕에 대한 금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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